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

by 서쪽 숲나라

(2018년 1월에 쓴 글입니다.)


또 화이트 아웃 상태다. 이놈의 흰 종이만 보면 머릿속의 지우개가 열심히 움직인다. 쓱싹쓱싹. 뇌가 어슴푸레하게 떠올렸던 잔상마저 깨끗이도 지워버린다. 한순간에 백치가 되어버린 당혹감에 사로잡혀 잠시 얼어 있다가 용기 내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의 반쯤 남은 카푸치노는 이미 식어가고 있다. 구름 같은 거품 위에 촘촘히 뿌려진 시나몬 가루의 향도 옅어졌다.


나는 무언가를 쓸 때마다 마치 내가 지금 쓰는 글이 생방송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중이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처음 새긴 발자국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근거 없는 부담 때문에 나름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신중히 고른다고 고르며 쓰게 되고, 당연히 이 작업은 즐거움이라고는 1도 없는 고행에 가까워진다. 정말 억울하고 짜증나는 점은 그렇게 고심하며 텍스트화 시킨 글이 너무나 허접하고 남루해 보인다는 것. 소설가 김연수는 모든 작가들, 혹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이런 토고(토나오는 초고)를 견디는 것도 글쟁이의 덕목이다.”라고 말했다. 초고를 보며 느끼는 자괴감은 이렇듯 ‘견뎌야’할 정도로 힘든 것이다. 그 힘듦이 두려워서 내 손가락은 도무지 속도를 내지 못한다.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인 신촌에서 에세이 수업을 들은 지 4주가 지났다. 그간 현직 작가들의 글을 읽고 감상평을 나눴었는데, 다음 주부터는 수강생들의 작품이 차례로 도마 위에 오를 예정이다. 그리고 나의 순서는 첫 주 두 번째.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보편적 진리에 기대면 유리한 것 같고, 다른 이들보다 마감시간이 촉박하다는 점에서는 불리하다. 현장에서 생생하고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할 나의 결과물에 대한 이른 연민,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칭찬만 듣고픈 초딩 저학년스런 마음과 잡스런 상념들이 어지러이 오가는 동안, 어느덧 글을 업로드하기로 한 화요일이 되었다. 수많은 작가들의 피를 말리는 마감의 위력을 나도 지금 실감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최종 꿈은 그 마감에 시달리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작가라는 말은 너무 광범위하니‘글을 쓰는 사람’이라 해두자.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돈과 환산될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시겠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거론될 만큼 명작을 쓰게 된다면 물론 기쁘겠지만, 그걸 기다리느니 로또를 사서 천원어치의 희망을 품는 일이 더 현실적이라는 걸 알기에 열외로 제쳐두고.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되는 글을 쓰는 것이다. 적은 돈이라도 상관없이 내 글이 경제적 가치성을 띄게 되면 정말 보람찰 것 같다.



이렇듯 자본주의적 속물 같은 생각머리를 가진 나에게도‘쓰고 싶은 글’이 있다. 그래도 딴에는 글쟁이를 꿈꾸는 사람인지라 나는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고 다양한 글들을 읽었고 그것들을 크게 두 분류로 나눈다. 한번 읽어버리고 마는 글과 두고두고 다시 찾아 읽게 되는 글. 후자를 나는‘반려글’이라고 부르며 자주 즐겨 읽는다. 그게 꼭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작품이라거나, 몇 백 년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작이라거나, 세계적으로 천문학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한 밀리언셀러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남들은 거의 읽지 않는 소소한 에세이나 칼럼, 심지어 동화일 수도 있다. 사람으로 친다면 계속해서 만나고 싶은 편안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랄까.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읽고 또 읽어도 여간해서는 질리지 않는, 읽는 이의 생에서 시그니쳐가 될 수 있는 그런 글. 심장에 시나브로 스며들어 마음에 깊이 새겨져서 몇몇 문장은 밑줄을 긋고 가끔 읊조리게 되는 글. 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게 소설일수도, 수필일수도, 시일 수도 있다. (아직 장르조차 정하지 못한 문학적 정체성이라니...)


사람이 저마다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완료해야 할 어떤 소명처럼,
평생 누군가에게 반려글이 될 수 있는 작품을
한편이라도 쓰고 싶다는 아릿한 로망은
꾸준히 내 곁을 맴돌고 있다.


여기까지 읽으면 나란 인간은 숨 쉬듯이 엄청난 습작들을 쏟아내는 열혈 작가지망생 같다. 대충 올려 묶은 머리에 충혈 된 눈, 세상 편한 집구석 패션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토고와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한 줄이라도 더 써서 공모전이든 뭐든 열심히 내놓으며 세상에 내 글을 알리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뻔하고 익숙한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현실은 전혀 다르다. 글이라고는 마지막으로 끄적거려 본 것이 반 년 전 다이어리 한 귀퉁이가 고작이었으며, 적당한 상금이 있는 공모전이 뜨면 온갖 장밋빛 미래를 시뮬레이션 하며 잠시 잠깐 불타올랐다가 한 네다섯 줄 써보고 포기하기를 연례행사처럼 반복하고 있다. 이렇듯 글 쓰는 빈도가 가뭄에 콩 나듯 하다 보니 주위 지인들도 내 꿈이 작가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상이 이렇게 한심한데 글은 무슨 놈의 글로 돈을 벌어먹겠다는 것이냐, 라는 질문이 나올 법 하다. 그러게나 말이다. 글 쓰는 것 자체를 그리 즐기지도 않고 열심히도 안 하면서 왜 나는 언감생심 글쟁이가 되려 하는 것일까. 안정적인 직업도 아니고, 일반 기업 입사처럼 정형화 된 루트를 통해 갈 수 있는 길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글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게 하는 꺼지지 않는 불씨들이 있기 때문이다. 설핏 부는 바람 한줄기에도 금방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미약한 불씨이지만 분명히 아직 살아있으므로.


그 첫 번째는 유전적인 필연성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교내외 백일장에 나가서 크고 작은 상들을 탔었다. 아마도 글에 대한 원초적인 끼는 엄마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리라. 엄마는 나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독서량과 문학적 소양을 지니신 분이었다. 신춘문예 같은 메이저급은 아니어도 문학계에서는 알아주는 계간지에 시와 소설로 모두 등단하셨고 시집 한 편을 세상에 내놓은 이력이 있는 문인이시다. 그런 엄마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딸인 나 또한 가야 할 길이 왠지 이쪽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왔다. 두루뭉술한 그것을 확실한 꿈의 형태로 빚어준 것은 중학교 때 만난 한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중학교 1학년 국어시간, 당시 까칠하면서도 유머러스해서 인기를 끌고 있던 국어선생님은 본인의 수업시간에 떠드는 행위를 절대로 용납 못하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의 성향을 알면서도 수다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몰래 입을 놀리는 극소수의 반동분자들은 늘 존재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선생님이 내린 형벌은 특이하게도 ‘반성문 써오기’였다. 국어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지난 시간에 걸린 죄인들은 반성문을 선생님께 제출했고, 그것을 선생님은 큰 소리로 모든 아이들에게 읽어주셨다. 어찌 보면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벌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처음 걸렸을 때부터 그게 싫지 않았다. 그래서 첫 반성문을 나름 정성스럽게 써갔는데 그것이 히트를 쳤다. 개그욕심이 강했던 나는 중딩스러운 과장법과 치기어린 감성을 총동원해서 떠들다 걸렸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자조적인 회한이 서린 사죄로 글을 마무리했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 아이들은 빵빵 터졌고 그걸 읽고 계신 선생님도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 이후 내 반성문이 읽혀지는 시간은-그렇다, 한 번 걸렸으면 갱생할 법 하건만 나는 계속 꾸준히도 떠들었던 것이다-우리 반의 암묵적인 유희가 되었다. 아이들과 선생님 모두 내 반성문의 애독자(?)가 되어 그 순간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내 글을 다 읽고 특유의 무표정으로 내게 말씀하시곤 했다.


“이정원, 잘 썼어. 넌 나중에 커서 글을 써봐라, 꼭.”


그 순간 느꼈던 희열은 뭐랄까, 내 인생이라는 필름 전체에서 마지막까지 박제해두고픈 한 컷이며 이것이 두 번째 불씨이다. 내가 뭔가를 잘해서 칭찬과 인정을 받았고, 내 글로 인해 많은 이들이 즐거워했다는 점이 내 온 몸의 세포를 떨리게 했다. 너무나도 순수하고 선명한 기쁨에 도취되어 나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글 쓰는 어른이 되리라 다짐했다.


개그욕심만큼이나 풍부한 감성을 지닌 나는 그것을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사실 단순히 좋아했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것은 꼭 신병(神病)같았다. 신기를 타고난 자가 무당이 되어야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낫는다는 그 병처럼, 나는 내 안에 가득 찬 감정을 끌어내고 표출해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게다가 표현력 또한-요새 핫한 말로다가-오지고 지렸다. 보통 사람이 레귤러 사이즈라면 나는 울트라 슈퍼 그란데였다. 그래서 사춘기의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이러다가 미쳐버리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성인이 되면서 그것을 고이게 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게 상책이라는 걸 알았고, 그를 위한 적절한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평생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친구들이랑 미친 듯이 수다 떠는 것은 기본, 합창단에서 열창을 했고, 동호회에서 춤과 연기에 홀딱 빠져봤으며, 연애에 심취하기도 했다. 시행착오 끝에 내가 택한 최후의 방법이 글쓰기이다.


글로서 나는 내 감정의 내장과 골수까지 다 뽑아내버리고 싶다.


아직도 심층부에 억눌려 있는 온갖 희노애락과 백팔번뇌들을 자유롭게 흩뜨려 놓고 싶다. 그것들은 천방지축 날뛰겠지만 잘 다스리고 길들여지면 나란 인간을 제대로 드러내주는 제법 괜찮은 단어가, 문장이, 문단이, 이윽고 한 편의 글이 되어 내게 정신적 오르가즘을 선사할 것이다. 글을 통해 자기표현 욕구를 해소하고픈 열정이 세 번째 불씨이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불씨는 몰입에 대한 갈망이다.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나란 인간은 타고난 끼에 비해 생의 대부분을 일정한 직업 없이 한가하고 여여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항상 무언가에 열중하며 바쁘게 사는 일상을 꿈꿔왔다. (그 무언가는 물론 내가 잘 할 수 있고, 많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현재로서 그에 가장 근접하는 것은 글쓰기이다.) 몰입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신기한 경험이다. 고도의 집중을 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는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한마디로 몰입은 무료한 일상을 일분일초 절실한 순간으로 바꿔주는 마법이다. 특히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생산적인 몰입을 통해 근사한 결과물이 나올 경우, 이는 당사자에게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만족감을 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기 일에 몰입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섹시하기까지 하다. 몇 번이나 그려봤는지 모른다. 마감이 있는 작가의 삶을 사는 내 모습을. 분신과도 같은 노트북을 끼고 거의 매일 커피숍으로 출근해서 심각하고 새침한 얼굴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정원 작가. 심심찮게 울리는 전화벨에 조금은 귀찮은 표정으로 “네, 편집장님. 어제 보낸 원고 컨펌 부탁드려요.”, “죄송합니다, 이번 달은 너무 바빠서 그쪽 연재는 못하겠네요.”, “네네, 지금 거의 다 되어가고요, 두 시간 안에 보내드릴게요.” 따위의 대사를 치는 그녀는 시크하고 유능한 도시여성이며 현직 글쟁이다. 여기까지 상상하며 나는 행복한 전율에 그만 눈을 감아버린다. 물론 부끄러움은 이를 지켜보는 타인의 몫이다.(드립니다, 죄송을.)


글쓰기를 지탱해주는 불씨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올해 내가 취한 액션 중 가장 잘한 일은 바로 이 에세이 수업을 등록한 것이다. 의지박약의 화신인 나로서는 글을 써야만 하는 환경을 이렇게 대가를 지불하고 얻을 수밖에 없다. 그간 토막으로나마 접했던 다른 수강생들의 글, 선생님의 말 한마디, 그리고 예정된 발표와 합평.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바늘과도 같은 자극이 되어 내 엉덩이를 의자에 붙어있게 하고 내 손가락들을 자판 위에서 움직이게 한다.


무언가를 생산함으로서 오늘 놀고먹지 않고 밥값을 했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몫을 제대로 해냈다는 뿌듯함. 그것으로 인해 받는 경제적, 혹은 정신적인 대가와 다시 불타오르는 창작에의 욕구. 이것이 바로 삶의 선순환 아닐까. 그 이점을 나는 글을 쓰는 행위로서 온전히 누리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 볼 것이다.


슬슬 마무리를 지어가면서 나는 여유 있게 얼마 안 남은 카푸치노의 거품을 홀짝인다. 어둑해진 창밖으로 오늘치의 일을 마친 해가 뉘엿뉘엿 퇴근중이다. 나도 이만 끄적거리고 네이버 밴드에 이 비루한 글-이라고 겸손 떨어도 내심 그리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을 업로드 시켜야겠다. 모처럼 생산적인 하루를 보낸 나 자신에게도,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안온한 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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