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그때 내가 배운 것은,

by MIN

어릴 적 집이 매우 가난했다. 풍요로운 삶을 사는 이가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싶지만, 우리 집은 정말 정말 가난했다. 이건 엄마의 탓도 아빠의 탓도 아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사람을 온전히 믿었던 엄마와 아빠의 순진함 때문이었을까.


엄마 아빠는 참 열심히 살았는데도 돈이 없었다.




9살 때 처음으로 피아노 학원을 갔다. 학교 바로 앞에 있는 피아노 학원이었는데, 손이 남들보다 얇고 길었던 일까, 아니면 내가 정말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을까- 아무튼 나는 피아노 신동소리를 들었다. 배운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콩쿠르대회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처음으로 느꼈던 두근거림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순간에는 너무나 행복했었다.


하지만 10살이 되는 해. 동생은 유치원에 가야 할 나이가 되었다. 가난했던 우리 집은 동생의 원비와 나의 피아노 학원비를 모두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던 그날, 참 많이 울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 앞에서 떼를 썼던 날이었다.


사실 그 뒤로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초등학생부터 꾸준히 써왔던 일기도 이 즈음에는 쓰지 않았으니까.


엄마가 회사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은 점점 괜찮아졌다.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어린 동생은 내 몫이 되었다. 12월 31일에 태어난 동생은 동급생보다 왜소한 편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동생의 끼니걱정을 참 많이 했다. 그 덕분에 나는 12살부터 밥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밥을 짓고, 다양한 반찬을 만들어 동생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꽤 오랫동안 우리는 그렇게 저녁을 함께했다. 지금도 내 친구들은 종종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놀다가도 저녁시간만 되면 집으로 달려가 밥을 차려주고 다시 나왔던 나를.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참 감투 쓰는 것을 좋아했다. 반장 하는 것을 좋아했고 초등학생 때는 전교 회장도 했었다. 학예회, 축제, 체육대회 가리지 않고 공연이 있다면 나가서 춤을 췄었다.


내가 어릴 때 반장이나 회장을 하면 엄마가 학부모위원장 같은 것을 하며 학교 행사를 같이 했었다. 돈도 내면서.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래서 엄마는 다른 학부모에게 "엄마가 딸의 능력을 못 따라가네"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감투 쓰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대학생만 되면 모든 동아리, 학생회, 홍보대사 같은걸 전부 해보고 싶었다. 댄스 동아리에 들어가 춤도 추고, 학생회 일을 하며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며 그런 것들은 모두 후순위로 밀려났다. 공부를 꽤 잘했기에 과외를 했고, 시급이 높았기 때문에 돈도 많이 벌 수 있었다. 내 손으로 돈을 직접 벌자 욕심이 생겼고 동아리, 학생회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내 용돈을 내가 직접 벌며 대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은 온 가족이 돈을 벌기 때문에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빚을 청산하고 1년에 2-3번 해외여행도 간다. 아빠가 꿈에 그리던 자동차를 뽑아 타고 다니기도 한다.


지나온 순간의 대부분은 힘들었고, 때로는 원망했지만 지금 행복하니 그걸로 됐다. 결국은 모두 잘 해낸 우리 가족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하지만 문득문득, 나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을 먼저 떠올린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누군가를 챙겨야 한다는 마음이 더 먼저 올라온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완전히 내 몸에 배어버린 태도 같기도 하다. 누구보다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시간.

그래서 지금은 그 시절을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정하게 껴안고 싶어진다.


수고했다, 나 자신.

수고했어요, 엄마아빠.

수고 많았다, 내 동생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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