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3,600원에 불판 120장 닦은 이야기.
'4,110원'
이 글을 쓰기 위해 2010년도 최저시급이 얼마인지 검색을 해봤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나는 일찍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위해 상고를 입학했다. 나름 공부머리는 있었던지라 내신등급은 잘 나왔었고 반에서 1등도 해봤었다. 그러나 꼴통들 모아놓은 상고에서 반 1등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시의 나는 꽤나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살았었다. 연이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는 기울 대로 기울었고, 오빠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입대한 상황이었다. 지금에야 병사 월급이 몇십만 원을 웃도는 금액이지만, 그때는 한 7~8만 원 언저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장 생활비도 급하고 군에 있는 오빠에게 용돈이라도 보내주고 싶었던 나는 같은 반 친구가 알바를 한다기에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첫날. 아버지가 매장 밖에서 한참을 보다 가셨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아르바이트한다는 딸이 걱정도 되고 속상하기도 해서 먼발치에서 지켜보셨다고 한다. 당시엔 형편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린 딸내미가 나가서 돈 벌겠다고 하니 아버지 입장에선 얼마나 미안하고 속상하셨을까 싶다. 그때는 돈 버는 사회가 너무 무섭고 하루하루 힘들었지만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2010년도 당시 최저시급은 4,110원. 그리고 내가 받던 시급은 겨우 3,600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금액이다. 일이 급하기도 했었고 그때의 사회 분위기는 최저임금이나 노동법에 그리 예민하지 않던 걸로 기억된다. 지금 같았음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어린 나이에 첫 알바다 보니 어리바리 그냥 주는 대로 받았었다. 사장님 부부는 각자 삼겹살 매장을 하나씩 운영하고 있었고 내가 일하던 매장은 사모님이 관리하던 곳이었다. 당시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던 시절이 아니었지만, 요즘 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그 사모님은 정말 가스라이팅의 귀재였다. 만약 가스라이팅하기 대회가 있었다면 나가서 상을 휩쓸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리고 정말 독한 사람이었다. 소리 지르는 건 기본이고 일하는 게 맘에 안 들면 쟁반으로 등을 내려치기도 했었다.
이젠 시간이 많이 흘러 그냥 그랬었지 하고 넘기지만, 겨우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난 어른이 그런 사람이라는 게 참 안타깝다. 18살의 나를 만난다면 빨리 도망치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교 후 바로 매장으로 가면 4시 30분쯤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출근 후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고기 불판 닦는 일이었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장화를 신고 주방으로 들어가면 밤새 물에 불려놓은 불판이 나를 반기곤 했다. 뜨거운 물은 가스비가 많이 나오니까 찬물에 주방세제를 풀어서 불판을 닦게 했다. 고무장갑도 주방 이모들이 쓰다가 구멍 나서 남긴 거 나 쓰라고 주곤 했었다. 이미 오래 사용해서 방수기능을 잃은 앞치마 또한 내 몫이었다. 하루는 너무 힘들어 대체 이 불판이 몇 장인가 하나씩 세어보면서 닦은 적도 있다. 그렇게 세어 본 불판은 120여 장이었다. 가녀린 여고생 손목으로 닦을 분량이 아닌데 그걸 다 반짝하게 닦아놓은 나도 대단하다 싶다.
불판을 다 닦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홀에 나가 서빙을 했다. 반찬을 세팅하고 불판을 갈고 상을 치우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래도 친구랑 같이 하는 알바라 그런지 나름 재밌는 추억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가 떠오를 때면 우리 정말 힘들지만 재밌었다며 웃으며 얘기하곤 한다.
그렇게 내 시간과 손목을 갈아 넣어 일을 하면 통장에 찍히는 돈은 30~40만 원 남짓이었다. 그 돈으로 매점 가서 친구들이랑 소시지빵도 사 먹고 군에 있는 오빠 용돈도 보내주곤 했었으니 힘들었지만 나름 보람은 있었다.
그렇게 일한 지 반년이 훌쩍 넘어가던 가을쯤이었다. 제 날짜에 입금되지 않는 월급에 불만을 느끼기도 했고 오만 소리를 다 들어가며 일을 하는 게 점점 지쳐갈 때였다. 그동안 친구들이 너무한 것 같다며 그만두라 수차례 말했을 때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더니 심신이 지치고 나니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시작했던 친구는 2주 정도 일하고 먼저 런 했었다. 현명한 녀석)
어느 날 하굣길. 너무너무 가기 싫어 친구에게 징징대고 있었다. 친구는 그냥 가지 말라 그랬고 나는
'그래 이건 다 친구가 가지 말라 그래서 안 가는 거야'
라는 고등학생 다운 철없는 생각으로 사모님에게 장문의 문자를 남겨놓고 출근을 하지 않았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은 상태에서 그렇게 그만둔 게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결국 10여 일 치의 월급을 받지 못한 나의 통장사정도 편치 않았다. 내가 좀 더 성숙했더라면 그만 둘 의사를 밝히고 돈도 제대로 받았을 텐데, 18살의 나이에 면죄부를 주자고 스스로 위로해 보아도 여전히 찝찝하기 그지없다.
이 글은 내 작가의 서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글이다. 형편이 어렵던 시절의 이야기라 지인들이 본다고 생각하면 좀 민망하기도 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운 과거이기에 발행을 할까 말까 많이 고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행을 결심한 이유는 누구에게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로 정리하면서 옛날의 내 상황도 다시 돌아보고 지금의 모습과 비교도 하면서 나를 한 번 더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지나간 일은 그냥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과거에 묻어두는 성격이다. 물론 더 어린 나이 때에는 이렇게 감정 섞지 않고 무덤덤하게 추억하기가 힘들었다. 그 당시의 감정이 떠올라 눈물도 흘려보고 괜히 화도 났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더 이상 과거의 일에 동요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힘들었던 감정은 점점 무뎌졌고, 그 당시의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또 내가 한 행동에 대한 반성도 하고 사회생활에 대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힘든 과거가 떠오를 때면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지난 힘들었던 일들이 점점 무뎌지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