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 Apr 06. 2022

퇴근하고 뭐해요?

건강한 삶은 포기한 만성피곤러

소싯적 난 매우 자기계발러였다. 퇴근 후 버스를 타고 집 반대 방향에 있는 무용 학원을 찾아 운동으로 포장된 춤 수업을 듣거나, 회사 근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한국을 여행 중인 외국인들을 만나 서울의 숨은 핫플레이스를 소개해준다거나,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큰 서점에 들려 베스트셀러를 쭉 훑어본다거나, 이도 아니면 친구들이나 동기들과 만나 맥주잔을 부딪히며 타 직종의 삶을 엿보곤 했다.


토요일이 되면 동호회 활동을 했는데,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모인 그곳에서 공연을 만들어보겠다며 틈틈이 짜둔 안무를 가르치고 대본을 복사해 나눠주고 무대를 구상하고 극 연습도 하고 뒤풀이도 하고 그랬다. 그 전엔 노인복지시설이나 아동돌봄기관에 가서 청소도 하고 식사 수발도 들고, 병원의 아동병동에서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놀이봉사도 하고, 아 매달 헌혈봉사 그룹도 이끌었댔다.


이렇게 젊은 시절을 불태웠는데, 그 시절 난 일주일에 하루는 반쯤 영혼을 흘려보낸 사람처럼 침대나 소파와 물아일체를 이루며 숨만 쉬었더랬다. 꼼짝없이 누워 충전을 하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에게서 빼앗긴 에너지를 보충하지 않으면 난 물기 하나 없이 말라버린, 내다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화초 같았다.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잠을 자며 기력을 찾아야 했다. 분명 사람들은 나를 보며 참 활달하고 외향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난 지극히 내향적인 I이다. 그리고 지금의 난 만성피로러다.


그 열심히 살던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철저히 전형적인 I의 표본처럼 집-회사-집에 충실한 내가 되었다. 이 조차도 재택근무로 전환되면서 ㅈ-ㅣ-ㅂ의 무한 지속이었고, 어쩌다 미팅으로 외출을 하고 돌아와 현관 문고리를 걸고 나면 다음 외출 때까지 집 밖을 1도 나가지 않았다. 혼자 밥 먹기 싫지 않냐, 혼자 일하기 힘들지 않냐, 답답하지 않냐, 밖에서 놀고 싶지 않냐 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이 오히려 몸과 마음이 편하다. 다만 동네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할 정도로 급격히 살이 쪘고, 가끔은 자본주의의 기름칠이 좔좔 흐르는 음식이나 남이 내려주는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정도만이 아쉽다.


어떻게 보면 너무 일찍 모든 에너지와 즐거움을 쏟아낸 것은 아닌가 싶다. 더 이상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이 별로 없으니 말이다. 무한정 역량을 개발하고 발전해서 업무의 성과를 올려주길 바라는 회사 놈들 때문에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으니 내 본연의 삶에 집중하고 나에게 바쁘기가 쉽지 않다는 건 핑계일까. 더욱이 새롭게 창궐한 바이러스 덕분에 더더욱 나의 활동량은 줄어들어 0이 되었다. 재택근무 기간 중 워킹의 취미를 갖겠다며 구입한 애플 워치는 집 안에서 아이폰을 찾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야 말았다.(사실 이 기능이 제일 유용하다.)


요즘은 퇴근과 동시에 눕는다. 그리고 저녁 메뉴를 고민한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건 꽤나 귀찮지만 지금 배달을 시키면 1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하루 종일 앉아 옴짝달싹 하지 않아 놓고선 또 배는 왜 이리 고픈지 기다릴 수가 없다. 잽싸게 냉장고의 재료들을 떠올리며 후다닥 챙겨 먹고 나면 미친 듯이 몰려오는 피로와 졸음이 밀려온다. 안돼, 오늘은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뭔가를..해야.. ..하.. .. ..ㄴ ..ㅡ.. ㄴ..


다시 퇴근 후 활기를 찾을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파이어족은 어떻게 되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