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by 민정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잠시 눈을 감고 내가 지금 편히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가 새삼 깨달아 본다.

이 책은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인 김범석 교수가 여러 환자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쓴 책이다.

나이 탓인지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었다.


우리에게 공평하게 일어나는 일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알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사랑만 하며 살기도 부족한 시간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탓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얼마 전 올해로 80이 된 큰 형부가 갑자기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동안 건강했고 언니와 두 분이 매일 산책 다니면서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부는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가족 모두에게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형부 수술받는 날 갑자기 불어 닥친 회오리바람의 한가운데 초췌하게 서 있는 언니의 모습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p55

“암에 걸리는 것은 허허벌판을 지나다 예고 없이 쏟아붓는 지독한 폭우를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우산도 없고 피할 곳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스란히 쏟아지는 비를 맞는 것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움직이지 않으면 체온만 떨어지고 그런 채로 죽어간다면 ‘뭐든 해볼 걸 그랬나?’ 하고 후회되지 않을까? 어차피 맞을 비라면 맞으면서 걸어가는 것이 낫다. 물론 걷다가 돌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가시덤불에 긁힐 수도 있다. 그러나 비를 피할 만한 장소를 마주칠지도 모른다. 혹은 비를 가려줄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갑자기 내린 비와 그 길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을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내공이라는 것이 생긴다.”


내공, 정말 중요한 힘이란 것에 동의한다. 나에게 주어진 또는 앞으로 주어질 모든 일이나 환경에 대해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순리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내공이 쌓일 것이다. 그 내공은 나를 어려움에서 구해줄 것이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내공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의 경험을 토대로만 쌓을 수 있는 능력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나름의 내공이 있으리라 믿는다.

형부와 언니가 이 시기를 지혜로운 내공으로 이겨 잘 극복하길 기원해 본다.


p63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특별한 보너스 일지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도 한다.

“자, 당신의 남은 날은ㅇㅇ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물론 이 문제를 다 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빈칸으로 남겨두기에는 아쉬운 일이다."


나도 10여 년 전에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나야말로 보너스 같이 주어진 시간을 속절없이 낭비한 느낌이다. 나에게 남은 숙제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만큼 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주어진 숙제를 잘 풀어서 숙제를 잘 한 초등학생이 자신 있는 발걸음으로 등교하듯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즐겁고,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많이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 다짐해본다.


p134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을 늘 조건으로 삼는다. 좋은 직장을 구하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부자가 되려면 긍정적이어야 한다.라는 식이다. 물론 긍정적인 사고는 중요하다. 매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보다 밝고 긍정적으로 임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암에 걸렸다고 해서 우울해하기만 하는 것보다야 밝게 지내는 것이 환자 자신에게도 훨씬 좋다. 암 진행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희망, 인내, 용기를 잃지 않게 되기 때문이고, 삶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에 대한 긍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과정과 태도에 대한 긍정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잘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그 자체가 긍정이어야 한다. 이 점을 오해하면 결과에 대한 기대가 과도하게 커져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면 내가 열심히 치료받겠다는 조건부 긍정이 되기도 한다.”


희망, 용기, 인내’ 평생을 배워온 덕목이다. 그러나 막상 어려운 일이 닥치면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지만 주위 상황에 휘둘리기 쉽다. 그렇지 않기 위해선 항상 내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은 나 밖에 못 고친다. 절망을 희망으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것도 내가 해야 한다. 도덕경에 차혼중생 아도아수(此昏衆生 我道我修 이 어두운 중생들아 네 길은 네가 닦아라)라는 말씀이 있다. 내 마음에 수시로 상기하는 말씀이다. 내 일은 내가 한다는 마음으로 살면 불평 낼 일도 없다. 상대에게 바라지 않으면 미워하고 원망할 일도 없다. 70이 다 된 나이에 바라는 것은 죽는 날까지 내 손으로 내 일 하고 내 발로 내가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상대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서로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무장해서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없도록 마음 조심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순간 나는 다짐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자세로 살 수 있기를.




p193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 선생은 <제법 안온한 날들>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라고 했다. 의사가 보기에 아무리 불행해 보이는 환자와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갈 것이며 불행은 그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그 말이 옳다.




p210


서울 아산병원 종양내과 김선영 선생 역시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환자들에게 잘했던 때는 내가 푹 자고 푹 쉬고 스스로 편안했던 때였다.”


내가 불안하고 편치 않으면 그 감정이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안내 방송으로 나오는 사항이 있다. 비상사태에는 본인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고 그다음에 아이에게 씌워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이를 생각한다고 아이에게 먼저 씌워 주려다가 잘 되지 않으면 둘 다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돌볼 때에는 어느 정도는 이기적이어야 이타적이 될 수 있다. 결국 이기심과 이타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볼 수 있고 스스로 평온함을 찾을 수 있는 이기심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보호자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나 자신을 보살펴야 하는 스스로의 보호자 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먼저 돌 볼 사람은 나뿐이다.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을 때 남을 돌 볼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생긴다. 이타적이기만 하려다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서 다른 사람도 돌보지 못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환자들에게 잘했던 때는 내가 푹 자고 푹 쉬고 스스로 편안했던 때였다.”




정말 정말 공감한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나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소용없다. 우선 내가 건강해야 상대를 돌 볼 수 있고 내 마음이 편해야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도 생길 것이다. 내 코가 석자면 상대를 도울 수가 없다.


부부 중 한 명이 아프게 되면 한쪽이 간병을 해야 하는데 70대 이상 부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형부의 경우 언니도 70대 중반이고 건강도 좋지 않으면서 형부 수발을 들어야 하는 언니가 안쓰럽기 그지없다. 이번 일을 접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노년으로 접어든 우리 부부는 각자 건강 챙기고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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