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행적 논란과 전쟁영웅 논란
백선엽(白善燁, 1920년 11월 23일~2020년 7월 10일)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합동참모의장 등을 지낸 군인이자 교통부 장관 등을 지낸 관료이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직에 종사했다.
1941년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1932년에 설립된 봉천군관학교 .. 박정희는 1939년에 설립된 (만주)신경군관학교 2기))로 졸업했다.
1943년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3년간 복무하였다.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북부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를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띈 북방 공산 게릴라 토벌 부대였다.
1944년 여름, 간도특설대는 러허성(熱河省)을 떠나 허베이성(河北省)으로 이동했다. 백선엽과 간도특설대는 여기서 1945년 1월까지 항일 세력을 상대로 한 작전을 벌였다. 작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복귀명을 받고 귀대했다.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백선엽은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친일행각 비난이 일자 그는 "동족상잔의 사례를 같은 조선인으로서 가슴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토벌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당시 백선엽은 만주군 "헌병" 중위였다. 그는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만나 명월구에서 강제 무장해제를 당했다.
1945년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광복을 맞아 평양에 돌아왔고, 독립운동가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소련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 제5연대 중대장을 맡았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개성 제1사단장으로 승진한 이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 초기 인민군에 패퇴하여 수도 서울이 조기 함락되는 원인을 제공하였으나
미군과 함께 다부동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며 32세에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대장에 올랐고,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1952년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휴전 문서 조인식에 참석했다.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을 지냈으며, 한국종합화학∙한국에타놀 사장도 역임하였다.
동생 백인엽과 인천대학교 등 선인재단을 설립했다.
2020년 7월 10일에 9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백선엽은 스스로 자신이 죽으면 대전현충원에 안장해달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현충원에 반민족 친일행적을 벌인 것으로 추측되는 백선엽이 묻히면 안된다는 의견과, 대한민국의 존립을 가능케 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구국의 영웅으로서 묻히는게 당연하다는 주장이 계속 병존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원수 진급 대상자가 되었으며 실제로도 원수 진급 심사를 실시했으나 친일 의혹으로 인해 원수 진급이 누락되었다. 아직 한국에는 한 명도 원수 계급자가 없다.
-위키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