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오늘 명언 -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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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옮기는 자도 작은 돌 하나를 옮기는 것부터 시작한다. - 공자


공자(중국어: 孔子, 병음: Kǒngzǐ 쿵쯔[*]) 또는 공부자(중국어: 孔夫子, 병음: Kǒngfūzǐ 쿵푸쯔[*], 라틴어: Confucius [kənfjú:ʃəs] 콘푸키우스[*],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정치인 · 사상가 · 교육자이고[1],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였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서도 알려져 있으나,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같이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정치적으로는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었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孔子)"의 호칭에서 "(子)"는 성인을 부르는 존칭이다.[1]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다.


(仁)에 기반한 도덕 정치를 실현하고자 전국을 주유하며 군주들을 설득하였으나, 오직 부국강병책으로 천하통일만을 노리는 당시의 세태에서는 공자의 이상을 받아 주는 제왕이 아무도 없었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공자가 교육에 활용한 경전은 '육예(六藝)' 또는 '육경(六經)'이라 불리는 '역','시','서','예','악','춘추'이다. 당시 육경은 진귀한 서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속수 이상을 예물로 가져온 이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문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창작했다고 주장하였으며 고문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계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공자 이전에도 육경의 이름들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유가의 계술이 있은 후에야 단순한 점술서, 잡기의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실제로 '춘추'를 비롯한 종래의 사관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공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치관인 정명(正名)론을 끌어내었고 맹자는 이를 '춘추의 대의만은 공자가 은연중에 취했고' 춘추를 정명으로 귀결시키면서 '난신적자를 두렵게'했다고 평하였다.

공자의 말년에 아들인 백어([4])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 특히 아끼던 제자 안연자로마저 잇따라 죽었다. 이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5])

아들 백어가 사망하자 공자가 어린 손자를 키웠다. 그의 손자인 자사는 훗날 공자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증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문하에서 배워 조부인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훌륭히 이어 나갔다.


제자들

공자의 문하(門下)에서는 걸출한 대학자가 무수히 배출되었는데, 육경(六經)에 통달한 이만 해도 무려 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켜 '칠십자(七十子)'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학식이나 덕망, 재능이 출중하여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열 사람의 제자를 가리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이들은 안회, 민자건,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遊), 자하(子夏) 등이었다. 공문의 많은 제자들 중 안회의 학문과 덕이 가장 뛰어났다. 이는 스승인 공자와 동문 선후배 등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안회는 스승인 공자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 그를 크게 상심시켰다. 그의 학통을 후대에 전한 인물은 증자와 자궁(子弓)이었다.

이들 중에서 증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르쳤고, 훗날 맹자가 자사에게서 배웠으니, 맹자학파는 증자가 배출한 셈이다. 자궁의 손제자들 중에 한 분파는 순자한비자로 이어졌고 이는 법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말년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

공자는 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사상

공자의 중심 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는 지덕(至德), 지선(至善)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必也正名乎),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君君臣臣),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父父子子) 각자가 본분을 지킴으로써 국가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사회적으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盡己), 남을 부축하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強惡)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을 비롯한 제덕(諸德)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을 강악(強惡)이라 하여 악으로 간주했다.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군자는 두루두루 소통하되 끼리끼리하지 않고, 소인은 끼리끼리하되 두루두루 소통하지 않는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 설파하였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엄숙·온화·원만하였다.제자를 교육함에 있어서는 각인(各人)의 능력과 이해 정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하도록 유도하였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현세적이었으며, 실용적, 합리적, 상식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의 은자(隱者)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장자》에서 도척이 공자에게 하는 말이나 '논어' 18:7에서 노인이 공자에 대해서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님이란 말이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생산활동을 도외시하고 결과[利]보다는 뜻[義]를 고려하는 태도에 회의적이였던 의견들이 당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사(士)계급에 대한 비판은 법가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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