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셋을 키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미국과 한국을 비교하게 된다. 더군다나 나고 자란 나의 고향, 서울과. 마흔 되어 이민을 왔으니 나는 이미 너무 한국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이 미국에서 놀랄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자유와 책임을 근간으로 하는 시민의식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살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확연히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Volunteer"이다.
이곳 미국에서는 일상생활 속 누구나 당연히 하는 것이 바로 이 'Volunteer'이다. 어린 아이나 중, 고등학생, 대학생이나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까지도 사회 곳곳에서 자원봉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주변의 여러 공공기관 예를 들어 도서관이나 학교, 커뮤니티시설, 공원이나 스포츠시설 등 비영리기관은 물론 옷가게, 미술관, 쇼핑몰 등 영리 기관에서도 늘 발런티어를 상시 모집하고 시스템을 구축해두고 있다.
한국에서의 자원봉사는 학교 졸업 시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시간, 혹은 잘못에 대한 벌점을 위한 사회봉사 정도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발런티어를 할 수 있는 기관 또한 제한적이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발런티어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어느 기관이든 자신의 취미와 관심이 있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발런티어 지원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테니스를 좋아하면 퍼블릭 테니스클럽에 지원하면 된다. 나이가 어리면 부모와 함께하면 된다. 대부분 중학생까지는 부모나 가디언과 함께라면 봉사가 가능하다. 큰 제약이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즐기며 임하면 된다. 자원봉사자에게 맡겨지는 명확한 임무가 마련되어 있으므로 적극적인 마음가짐만 있으면 된다. 따라서 이 모든 자원봉사 경험은 아이들에게는 현실판 키자니야(한국에서 직업체험으로 유명한 키즈 체험시설, 아주 비쌈)가 되는 것이다.
요즘 큰 딸아이와 나는 열심히 발런티어를 다니고 있다. 미국에 와서 어떻게 하면 빨리 적응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니 봉사만큼 좋은 것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사춘기 딸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라니 더욱 특별하다. 함께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경험을 쌓고 어려운 일을 함께 해결하기도 하며 더욱 각별해지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봉사를 하러 가면 많은 미국인 부모와 자녀들이 가족 단위로 함께 봉사를 하러 오고 회사에서 같은 팀끼리 단체로 와서 하기도 한다. 즐기며 하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았다. 우리나라 기업에서도 회식 대신 발런티어를 한다면? 참 멋지지 않을까!
미국의 발런티어 경험은 학생들에게는 미리 사회를 경험하고 자신의 전공이나 관심사를 발견하기도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성인들의 경우는 특히 취업을 할 때에 경력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플러스 요인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는 발런티어를 굉장히 존중해 주는 문화가 있다. 항상 고맙고 감사함을 표현해 주니 봉사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 나의 작은 노력이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니 뿌듯해진다. 영어를 못해도 괜찮다. 여러 가지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에 맞는 일을 시켜준다. 적극적인 자세와 즐기려는 마음가짐만 필요하다.
처음에 가장 많이 봉사했던 곳은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동네 파머스마켓이었다. 지역 주변의 농장 주인이나 개인이 소규모로 제작, 판매하는 벤더들이 모이는 곳이다. 야채와 과일, 직접 만든 빵과 잼, 꽃 등을 파는데 세금도 안 붙고 가격이 저렴하다. 첫 봉사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이유는 난 아줌마라서 시장이 가장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마켓 홈페이지에 가서 발런티어를 신청했다. 우리 큰딸은 시장에 가면 맛있는 것이 많을 것 같아서 엄마를 따라왔다고 한다.
마켓에서 봉사했던 일은 여러 가지였는데 처음에는 입구에 서서 사람들이 하루에 몇 명이나 오는지 카운팅을 하는 일이었다. 숫자가 넘어가는 기계를 손에 들고 웃으며 "헬로~웰컴투 파머스마켓~~ "하는 거였다. 한참을 기록하던 기계를 우리 큰 딸이 실수로 리셋을 시켜버린 일도 있었다. 다행히 잘 해결되었지만 아직 열두 살인 아이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나 싶었는데 그다음에 갔을 때는 승진을 시켜주었다.
마켓 피자가게에서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는 일이었다. 아 큰일이다. 영어도 짧은데 이를 어쩐담.. 이탈리안 사장님은 걱정하지 말라며 아예 현금통을 우리 앞에 놔주신다. 권한 위임을 너무 많이 해주시는 사장님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서 정말 메뉴를 달달달 외우고 가격도 완벽하게 외웠다. 저녁 타임이라 손님이 정말 많았다. 딸과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최선을 다했고 다행히 큰 실수 없이 그날의 장사는 훌륭하게 마무리되었다. 한국인의 일 잘함을 확실히 보여드렸다. 사장님이 너무 고마워하셨고 공짜 피자도 받아서 집에 왔다. 그날부터 우리 큰딸의 꿈은 피자가게 사장님이다. 애플페이 결제는 이제 자신 있다며 피자종류도 많이 안다고 어찌나 허세를 부리는지. 마켓이 끝나면 직원들을 도와 청소도 열심히 했다. 함께 땀 흘리며 일하니 이제 직원들과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우리의 부족한 영어를 열심히 들어주고 대화해 주는 좋은 직원들이다. 마켓에서 뭘 사야 성공적인 소비를 하는지 팁도 많이 얻는다.
조금 자신감이 붙자 다른 곳에서도 봉사를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은 Food Lifeline이라는 곳. "Hunger doesn't have to happen"이라는 슬로건으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이다. 이곳은 생산된 잉여 농작물, 레스토랑의 남은 식재료, 마트 등에서 팔지 못한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 등을 모아 다시 분류하고 재포장하여 워싱턴주의 쉘터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을 한다.
처음 도착하자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교육을 시킨다. 미리 제작된 짧은 영상을 보는 것이었다. 영상을 통해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중요한 일인지 느끼게 된다. 음식을 그냥 버리지 않고 재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더욱 열심히 임하게 된다. 봉사활동을 위한 위생 절차에 대해서도 배운다. 어린아이도 이해하기 쉽도록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보기가 좋았다. 실제로 이곳은 10살부터 봉사가 가능한 곳이다. 큰 아이와 나는 이곳에 여러 번 방문해서 티백을 소포장하는 일도 해보고 천장까지 쌓여있는 감자를 골라내어 포장하는 일도 해보는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영어는 도구일 뿐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인 것 같았다. 내가 이곳의 일원이 되어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아직은 두렵다고 영어 못한다고 한국인 커뮤니티 안에만 머무를 것인가.
작년에 나는 미국인만 보면 알레르기 있는 사람처럼 피하고 싶고 숨고 싶고 말하기 싫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집에서 한국드라마만 봤다. 마트에서 계산할 때 점원이 스몰토크할까 봐 눈도 안 마주쳤다. 그러다 보니 향수병이 왔다.
그러나 요즘 발런티어를 계속 다니다 보니 미국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훨씬 편안해졌고 사람들의 말도 잘 들린다. 자꾸 미국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그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미국 문화와 영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중이다. 나는 이곳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중이다.
가족도 친구도 하나 없는 이곳에서 우리 존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순수한 기쁨을 맛볼 때면 힘들어도 또 한걸음 내딛게 된다.
우리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우리를 도와주던 많은 미국인들이 있었다. 나중에 그들도 모두 자원봉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도 당연히 그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자발적인 발런티어 문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 속의 봉사 문화가 선순환이 되어 미국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