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외국인 외톨이
이 한국어 학원에는 여러 명의 선생님이 일하고 있지만, 대부분 온라인 수업을 하거나 수업이 있을때만 출근하는 현지인 파트타임 선생님이고, 사무실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하는 상주 직원은 나를 포함해서 세명밖에 없다. 현지인인데 한국어를 한국사람보다 더 잘하는 총괄 매니저와, 인니어가 모국어인 현지직원, 그리고 한국어 원어민인 나. 한국 본사와 업무를 처리하거나 매니저와 상의하거나 수업을 할 때 모두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근무하는데 특별히 인니어가 필요하지는 않다. 다만 내가 여기서 생활하는게 불편할 뿐.
현지직원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지만 잘 못해서 셋이 있는 자리에서 항상 한명이 소외되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둘이 인니어로 대화를 할 때는 내가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나랑 매니저가 한국어로 이야기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현지직원이 소외되는 상황...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저 없이도 나랑 현지 직원은 제법 잘 어울렸다. 그녀가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니 아주아주 쉬운 한국말로 이야기해 주거나, 서로 번역기를 사용해가면서 둘이서 카페도 가고 쇼핑도 다녔었다.
...과거형이다.
이미 상처받은 이 외국인 노동자는 다시는 그녀와 둘이 외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파견교원인 내가 사무실에 합류하면서부터 둘만 있던 사무실이 시끌시끌해져서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하며 셋이 같이 주말 여행을 가자고 이야기를 해왔었는데 날짜 잡기가 어려워 흐지부지 된 게 여러번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며칠 휴가를 다녀오는 동안 둘이서 이미 구체적인 계획을 모두 세워놓고, 내가 사무실에 복귀하자마자 나의 일정을 물었다. 매우 기뻤고 당연히 조절할 것도 없이 확정이었다. 그들은 여기에 가족과 친구가 있어 다른 약속을 조절해야 하는 현지인이지만, 나는 여기에 가족도 친구도, 아는 사람조차 없으니 내 일정 잡기는 훨씬 수월하다. 근무시간 외에는 약속이 전혀 없다. 아- 한국에서의 나는 늘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하는 항상 바쁜 사람이었는데, 여기에서는 그냥 인간관계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타지인이다.
조금 설레며 주말을 기다리던 그날, 매니저가 개인적인 일정이 생겨버려서 미안하지만 우리 여행을 미룰 수 있겠냐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직원은 흔쾌히 괜찮다고 대답했다.
난 실망을 하기도 했지만 약간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약속을 취소한 게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케줄 조절을 못한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대신에, 날짜를 바꾸거나 1박 2일이 아니고 일요일 하루만 다녀오는 건 어떻겠냐는 그녀의 말에, 오기가 생긴 나는 다른 직원과 함께 토요일에 출발하고 그녀가 일요일에 와서 셋이 만나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어로)매니저에게 말했다. 나랑 직원은 먼저 가서 자고 다음날 만나면 되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이 외국인이 걱정됐던 매니저는 차 없이(원래는 본인이 운전해서 같이 갈 계획이어서)잘 찾아 갈 수 있겠냐며 직원에게 (인니어로)선생님이랑 둘이 먼저 가 있겠냐고 묻는 듯 했다. 인니어로 잠시 이야기를 하더니 청천벽력같은 말을 했다.
"통역사(=매니저) 없이 둘만 가는 건 말이 안통해서 부담스럽다는데요." 라며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너무 서운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나랑 번역기를 사용해가며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이제와서 나랑은 말이 안통해서 둘만 여행을 갈 수는 없다니! 그동안 본인이 먼저 집에 가기 싫다고 나랑 놀고 싶다고 했었잖아! 혼자 쇼핑 간다는 나에게, 먼저 같이 가자고 한 게 누군데!!
여행이 취소됐다는 것 보다, 역시 나는 그냥 말 안통하는 외국인이었나 싶어서 슬프다 못해 화가 났다. 석달 넘는 시간 동안 동료를 넘어 점점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 안통해서라니...말이 안통해서라니...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굳어 입을 꾹 다문 나 때문에 사무실 분위기는 경직되었다. 본인 탓으로 여행이 취소되어 미안하다며 매니저가 커피를 사겠다고 했지만 됐다고 거절했다. 사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샷하고 싶었지만 자존심도 좀 챙겨야 했다. 업무 이야기를 빼고는 직원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나 때문에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이틀간 입을 열지 않는 내가 답답했는지, 퇴근 후에 직원이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화가 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고 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화가 난 것인가? 나는 이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아서 답장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대답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고 있을 그녀를 생각해서 솔직하게 답장을 했다.
나는 지금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배신감이 들어서 슬퍼진 것 뿐이라고. 그동안 함께 잘 지내며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랑 말이 안통해서 둘만 같이 가기는 부담스럽다는 말에 당황스러웠다고. 그런데 이건 너의 잘못이 아니고 그냥 나의 감정의 문제라서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번역기를 돌린 듯한 답장이 왔지만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다음날,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매니저가 우리를 불렀다. 본인이 일정 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를 하며, 우리도 좀 풀어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직원이 매니저에게 뭔가 이야기를 했을 것 같았지만 나 또한 다시 한번 확실히 하고 싶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매니저와, 그보다 훨씬 어린 현지인 직원이다보니, 순간 내가 지금 어린애들하고 유치한 감정싸움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만 인간관계에서 이렇게 나이를 따지면 안될거라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짧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사실 약속을 또 취소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지만, 나와 다르게 여기에 가족과 친구가 있는 사람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것 또한 이해하려고 한다고. 그런데 취소가 몇번 반복되다 보니 내가 많이 실망한 것 같다고. 그리고 약속이 취소된 것 보다는, 말이 안통해서 나와 둘이 함께할 수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건데, 이건 그냥 내가 당신들을 동료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의지했던 거라서 내 감정이 격해진 것 뿐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감정을 추스리면 되는 일이니 더 이상 일터에서 불편할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동료라고만 생각했다면 여행을 계획했겠냐며, 일 외에는 의지 안한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어차피 여기 아는 사람도 없는데 본인들이라도 의지하고 지내야 하지 않겠냐며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애썼지만 이미 마음을 닫은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 직원은 며칠간 나에게 말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사무실에 둘만 남은 오후에, 매니저는 못가게 되었으니까 자기네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랑은 말이 안통해서 안가겠다더니 이제와서 무슨소리람? 그래서 다시 한번 말했다. 그동안 번역기를 사용하느라 불편했지만 오히려 재밌기도 했다고. 그런데 여행을 가지 않는 이유가 나랑은 말이 통하지 않아서라니, 나는 충격을 받았고, 그곳은 더이상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차갑게 말하는 내 마음도 편하지 않았고, 그녀들을 생각보다 많이 의지했었는지, 번역기에 메시지를 써서 그녀에게 들이내는 동안에도 울컥해서 눈물이 고였다. ㅠㅠ
그랬더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며 긴 대답이 왔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는데, 매니저 차를 타고 가는 것 보다 둘만 움직이면 택시를 타야 하고 숙소비용도 있으니 그것도 부담스러웠다고... 본인이 나를 안내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낀 것 같았다. 학원에서 둘이 이야기할 때도 번역기를 사용해야 할만큼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데, 현지어를 모르는 나와 함께 타지에서 길을 찾고 식당에서 주문을 하는 모든 것이 본인에겐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여행을 가기로 했었던 그 주말을 앞두고 근처 화산이 분화했다.
우리가 가려고 했던 지역을 갔었더라면 매캐한 연기만 마시다 올 뻔했다.
게다가, 그 주말에 매니저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결국 셋이서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일이 이렇게 되려고 여행을 취소한건가, 하는 이야기를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직원과는 다시 조금 편안해져서 셋이 있을 때는 예전과 같아졌으나 당분간은 둘이서 어울리는 일은...잘 모르겠다.
예전같았으면 상대의 마음이 불편할까봐 그 마음을 받아주려고 애썼는데, 이제는 내 감정에 더 충실해지기로 했다. 내 마음이 서운한거면 서운한거고, 내 감정이 풀리지 않으면 그냥 풀릴때까지 기다릴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