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억
얼마전 민족의 명절 추석연휴가 끝났다.
지난 일요일까지 회사가 휴무였으나, 판매가 부진하여 지난주 금요일에 출근해서 대리점대표 회의를 실시해야해서, 나는 목요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추석만 되면, 나는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른다.
열일곱 살 때, 늦은 출생신고 덕분에 9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간 나는 1993년 17살이 되던 해,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즐겨하셨다, 그 덕분에 간경화가 오고 결국에는 추석날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매년 추석전날에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날에는 차례를 지내곤 했다. 아버지 제사를 30년동안 지내고 어머니는 30년 지냈으면 할 도리는 다했다고 하시며, 제사를 그만 지내겠다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슬프지가 않았다. 술을 드시기 시작하면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드시고 식사도 거르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면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고, 어머니는 그런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온갖 시중을 다 드시고,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건축업을 하셨는데, 남은 우리 세 식구에게 빚만 잔뜩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두 살 터울인 남동생도 나랑 비슷한 마음인지, 슬픔을 느끼지 못한 것 같고, 어머니만 원망에서 오는 슬픔이셨던지 굉장히 많이 우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가족이 아닌 지인들에게는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그러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돌아가신 이후는 그 많았던 지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떠나면 모든 게 필요가 없구나, 그때 많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일찍 안 돌아가셨으면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빚으로 인해 단칸 월세방에서 어머니와 동생이 생활하면서, 생활고를 빨리 이겨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아버지가 남겨준 빚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굉장히 힘든 생활을 하게 되었다.
동생은 대학 진학을 못하고, 부사관 입대를 했고, 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을 진학하였다.
그땐, 아버지에 대해서 애틋함, 그리움보다는 원망이 많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살이 지나고, 나이가 점점 먹어가니 가끔 그 원망스러웠던 아버지가 생각나기도 하고,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결혼을 하여, 지금은 중학교를 다니는 아들을 키우다 보니,
또, 가족의 생계를 위해 힘든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아버지라는 사람의 책임감, 무게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그때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드셨을까 하는 약간의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잘 때 "아빠, 다리가 너무 아파요" 하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성장통을 겪다 보니, 다리가 아플 때가 있고, 나 또한 어릴 때 겪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일어나셔서 내 다리를 열심히 주물러주신 생각이 많이 났다.
지금 내가 피곤함을 이겨내고 일어나듯이, 아버지도 그때 나와 같은 마음이셨을게다.
먼지가 쌓여, 잘 찾아보지는 않은 80년대 앨범을 들춰보게 되었고,
아버지가 나의 손을 잡고, 동생을 업고 계신 사진을 보며
아버지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마흔둘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을 하셨고, 나는 지금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넘어 50세를 바라보고 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잘 이해를 못하고, 그때의 원망이 다 수그러진 것은 아니나,
나이가 들고 가장의 무게를 점점 느끼는 지금 이 시점, 아버지가 요즘 자주 생각이 난다.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부산근무 발령이 나서는 진주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가끔 찾아가곤 한다.
이번 추석 명절전에도 아버지 산소를 다녀왔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를 생각나게 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