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가족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Mar 29. 2022

오빠, 착한 척 그만하자.

청각장애 여동생을 둔 사춘기 오빠에게


어느 날, 카카오 브런치에서 글을 읽다가 눈길이 갔던 글이 있었다. 읽다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고 가슴이 뭉클해졌으며 옛 기억들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글은 바로 장애를 가진 형제를 둔 비장애 형제 인터뷰에 대한 글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빠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지만, (우리 남매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이다.) 먼 훗날 우리가 나이를 많이 먹고 조금은 낯이 덜 간지러워진다면 오빠와 함께 맥주나 커피 한잔하며, 오빠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옛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한번 나누고 싶다.


오빠는 어릴 때부터 긍정적이고 배려심 넘치는 성격 덕분에 인기 많았고 늘 친구가 많았다. 그런 오빠를 보며 오빠에 대한 동경이 생기기도 했다. 요즘 표현대로라면 조용한 인싸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신기한 것은 스스로 인싸가 되려고 나서지도 않고 그렇다고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빠에 대해 호감을 갖고 관심을 표현했다. 이에 비해 나는 깍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며 사춘기 때부터는 쉽게 정을 안주는 성격 덕에 차가워 보인다는 말도 많이 듣곤 했었다. 이처럼 다른 연년생 남매이지만 그래도 어릴 땐 심리적으로 많이 위안이 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빠는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내 생일날, 큰 문구점에 가서 하늘색 다이어리를 사줬다. 사실 부모님이 선물을 사줄 거라는 생각만 했지 오빠가 내 손을 붙잡고 문구점에 날 데려갔던 그 순간이 아직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아있다. 친구하고 다툰 일이 있으면 오빠 방으로 달려가서 조잘조잘 하소연하기도 했다. 내가 말이 많기도 하고 별 재미없는 이야기였을텐데 그럴 때마다 오빠는 ‘원래 여자들은 그런 일 많이 겪기도 한다더만, 네가 먼저 손 내밀고 해 봐’ 라는 조언을 건네곤 했다. 단순히 듣지 않고 조언만 하는 꼰대 오빠가 아니라 정말 내 얘기를 공감하면서 들어줬기 때문에 그런 조언들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보통 남매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면, 친오빠들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나와 오빠의 관계를 부러워한 친구들도 많았다.


사실 남매로서 한 집에 산 것은 둘 다 성인이 되기 전인 약 20년간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오빠에 관한 기억들도 내가 성인이 되기 전인 옛날 기억들이 주된 기억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사춘기 연년생 남매로 치열하게 싸우던 때 일어난 일이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 한창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관문에 화난 표정으로 아빠가 나타나셨다. 우리가 싸우던 소리가 꽤나 크게 났던 모양이다. 아빠가 들어오시자마자 남매 싸움은 끝이 났고 아빠는 거실로 우리를 호출하셨다. 오빠와 나는 거실에 앉아서 아빠한테 호되게 혼이 난 적 있다. 나는 오빠가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고자질하고 울기만 했다. 반면에 오빠는 대드는 모습이 아닌 묵묵히 입 다문채 가만히 있었다. 그땐 그런 오빠의 모습이 여우처럼 느껴졌고 이럴 때 착한 척하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대가 되어 그때 오빠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보니 참 짠하기도 하고 슬펐다.  오빠도 다른 아들처럼 ‘쟤가 먼저 그랬다고’ 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래서 그날도 오빠가 많이 혼나기도 했었다. 오빠가 혼날 때 나는 방에 들어갔었고 아마 그날 오빠는 속으로 많이 억울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도 나는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뱉어냈고, 얻고자 하는 일은 꼭 얻어내고 만 고집쟁이 딸이었다. 반면에 오빠는 부모님에게 대들지도 않고 뭘 하고 싶다. 갖고싶다 투정 부리는 아들도 아니었다.


난 맏이가 아니고 오빠가 아니었기에 그때의 어린 나에게 양보를 많이 하고 참기만 하던 오빠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러면서도 엇나가지도 않고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의 오빠였다. 아마 부모님이 나를 병원에 데려가고 수술한 나에게 더 신경을 썼음에도 울산에서 부산에 있는 병원까지 내가 심심할까 봐 만화책 10권을 가져다주고 병문안도 와줬던 오빠였다. 내 앞에선 절대 투정 부리거나 하지 않던 오빠였는데 부모님에게 왜 동생만 편애하느냐고 내가 없을 때 물어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적어도 내 앞에선 든든한 오빠의 모습을 보여주려던 어렸던 그 시절의 오빠를 토닥여주고 싶다. 멀리서 바라봤을 누군가에게 오빠는 그저 잘 컸구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많은 걸 양보하고, 특히 부모님의 관심을 양보했던 오빠에게 너무 미안했다. 오빠도 다른 사람들처럼 비장애인 동생을 뒀으면 훨씬 관심도 받고 예쁨을 받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장남이기도 하고, 청각장애인 동생을 둔 나의 오빠.  

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엇나가지 않고
지금처럼 내 오빠로 듬직하게 남아 주어 너무 고맙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슈퍼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