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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 May 31. 2020

디자인과 언제나 서먹한 디자이너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입시 미술을 시작한 고등학생 때부터 디자인 대학  군데를 거쳐 디자이너로 일하  오늘날까지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강산이 한번 하고도 반절이 바뀌었을 시간 동안 정도를 걸은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울타리 안에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하고 디자인에 관련하여 의견을 내는 것이 부끄럽다. 화제가 이쪽으로 돌아가면 일부러 입을 다물 때도 있다. 나의 말이 너무 가벼이 나올까 두렵기도 하고  반대로 무거운 말로 들릴까 염려도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뛰어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디자이너들이 수두룩하고 수려한 외관을 지니거나 신박한 기능을 가진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중 몇몇은 그것들을 멋들어지게 소개하고 디자인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한다.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고, 혁신과 혁명을 넘나드는 눈부신 활약이다. 그러나 그들을 보면 나는 다른 세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득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고, 했던 공부가 좋고, 이 분야가 좋다. 언제나 흥미롭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모든 것이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사실 디자인과 관련한 많은 부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새로운 기술이나 새로운 소재 등에 관심이 거의 없다. 그것들을 보고는 신기한 마음에 눈을 반짝이며 창작욕에 불타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학사를 마친 학교에 컴퓨터 디자인에 저명한 교수님이 계셨다. 컴퓨터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코드를 입력하면 특수 로봇이 그에 맞추어 오브제를 제작하는 기술이었다. 로봇이 만들어낸 오브제는 사람이 만든 것보다 훨씬 규칙적이고 정교했다. 그러나 나는 그 교수님의 수업 방식도 그렇고 로봇이 만든 오브제도 영 탐탁지 않았다. 분명 대단한 기술이고 미래가 창창한 분야겠지만 나의 반감을 얻으면 얻었지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이뿐 아니라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자주 마주치는 신기술을 접목한 작업들을 보아도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소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것만 이용하고 새로운 소재로 실험하는 것을 꺼려했다. 혁신과는 거리가 먼, 참으로 나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숙연해지는 마음을 밀쳐두고 내가 디자인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선은 손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어내는 것이 즐겁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무'에서 출발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이나 조건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이 좋다. 그 안에서 내 주관이 듬뿍 담긴 아름다움을 녹여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겠다. 또한 항상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 좋다. 디자인은 실생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직업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디자이너로서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좋다. 상황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디자인이라면 그 상황이 사회 전반에 걸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그 답이 공익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모든 디자인에 공익을 바랄 수는 없지만 사회를 위한 디자인이 가능하다는 것을 많은 디자이너들이 증명해냈다. 그리고 지금도 사회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있다. 그들을 보며 디자이너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이모저모에서 부족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이 길을 가야 한다는 위로를 받는다.    


처음 디자인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패션이었고, 후에 무대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왔다. 반짝이는 패션쇼와 마음을 울리는 무대가 좋았다. 프랑스에서 입시의 역경을 혹독히 겪은 후 겨우겨우 공간디자인과에 편입했다. 학교 생활을 하며 프랑스를 알아가던 중에 시립극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살 것이 없어도 슈퍼마켓에 들리듯 극장이 공연을 보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를 만나고 난 후 극장이 폐쇄적인 공간이 아닌가 생각했다.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예술 공간을 모두가 누릴 수 있도록 고심하는 이들이 있다지만 그럼에도 그곳은 높은 담벼락을 가진 공간이다.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한정적이다. 이것은 분명 내가 생각하는 사회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길거리와 광장 같은 도시 공간이다. 이곳은 온전히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슈퍼 옆에 있는 거리가 예술 공간이 된다면 주민들은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예술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술이 대수인가. 그러나 때로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예술이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술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면 말이다.


나는 디자인에 정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나의 전문성에 의심을 갖는다. 나는 디자인사에 대해 줄줄 꿰고 있지도 못하고 관련된 이론이나 기술 등을 설명하지도 못한다. 사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디자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디자인 "세계"가 아니다. 어느 디자이너가 새로운 제품을 출시했고 어느 색이 유행하고 어느 소재가 주목받고 있다는 소식은 안타깝게도 관심이 없다. 그저 신문 여느 면에 나오는 소식과 다를 바 없는 감흥을 안긴다. 그러나 내가 관심이 있고 열의를 가지고 이해하고 싶은 것은 사회의 문제다. 왜 이토록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운동장을 바로 세울 수 있는지. 적어도 그 안에서 공생할 방법을 찾을 수는 없는지. 가라앉은 곳에서 굳이 위로 올라가지 않더라도 행복할 수는 없는지. 그래서 나는 월가 점령 시위를 보며 가슴 뛰어했고 난민 문제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 나는 자본주의에 눈살을 찌푸리고 민주주의에 찬사를 보낸다. 나는 기계는 무턱대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람은 마다않고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나의 관심은 지극히 사람에게 있다. 이 관심을 가지고 디자이너로 일하려 하니 결국 다다른 곳이 도시 공간이다.


디자이너라고 떳떳이 소개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는 언제나 사람이 나의 가치관에서 가장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삶을 영위하는 공간을 함께 바꾸어 나가는 것,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누구든 누릴 수 있는 도시 공간을 만드는 것, 그래서 생계에 일분일초가 바쁜 사람들의 삶에 감히 작은 쉼표를 들이미는 것, 이것이 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간 디자인이 무어냐는 질문에 나는 '사람과 공간을 이어주는 일'이라고 답하기로 했다. 사람과 공간 사이, 사람과 사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화롭게 이어주는 공간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사회를 이해하려는 나의 열망과 관심이 무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디자인 세계에 관심이 없어도 디자이너로 역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붙이지 않아도 좋고, 굳이 내 주관이 담긴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않아도 좋다. 다만 욕심을 내어본다면 사회 문제에 적극 뛰어들 수 있는 집요함과 대담함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가야 할 길이 멀고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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