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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달 Aug 31. 2023

아이에게서 나와 내 남동생의 모습이 보일 때

삼촌과 조카의 이야기

첫째 아이는 외적으로 나를 많이 닮았다. 

숱이 많고 굵은 머리카락, 동그란 눈썹과 눈, 웃을 때 도드라지는 광대뼈, 조그마한 입, 구부정한 자세, 하체가 통통한 체형, 약간 평발인 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똑닮은 아이를 보며 나와 비슷한 생각, 사고를 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성격과 뇌는 내 남동생을 닮은 부분이 많다. 쉽게 말하면 "공대생" 같은 스타일이라고 할까. 둘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MBTI로 말하면 T 형), 기계를 엄청 좋아해서 실제로 남동생은 IT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고 첫째는 코딩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가끔은 사람보다 기계와 있는 것이 더 편안하고 행복해보이는 내 남동생과 내 아이. 기계치에, 문학을 좋아하는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그대들인 것이다.

외삼촌과 조카의 모습이 겹쳐보이게 될 줄이야!


사실 나와 남동생은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이라고 할수는 없다. 어린 시절에는 매번 티격태격하며 자라났고, 성인이 되어서는 서로가 바쁘다 보니 생존신고만 하며 사는 정도라고 할까. 남동생과는 좋은 기억보다 싸우거나 갈등이 있었던 기억이 더 많다보니, 내 아이가 남동생을 닮았다는 것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남동생이 조카를 살뜰하게 챙겨주거나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남동생과 내 아이가 서로를 이해하는 듯한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너무 신기하다. 




한번은 가족사진 촬영을 하러 스튜디오에 갔다. 

완전 외향형인 둘째는 스튜디오에서 가족들과 촬영하는 순간순간들을 너무나 즐기며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발산하고 있었다. 반면, 첫째는 최선을 다해 웃는 표정을 지어봤지만 길어지는 촬영으로 후반부에는 "하기 싫어"를 연발하며 더이상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뭐랄까...인위적인 웃음을 짓기가 너무 힘들었나보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가족, 삼촌까지 7명 모두가 함께 찍어야 의미가 있는데, 첫째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사진 찍기를 힘들어하니 우리 모두 난감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초반에 가족사진 단체컷을 찍어놓은 것이 있어서 그 중에 베스트 컷을 고르기로 하고, 다른 조합으로 여러 컷을 찍으며 사진 촬영을 마무리했다. 


나는 내심 미혼인 남동생에게 눈치가 보였다. 첫째가 협조를 안해서 가족사진 촬영을 제대로 못했으니 화가 나지는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남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어렸을 때 이런거 너무 싫었어. 이해해. 
 근데 임마,너는 가족들이 네 그런 성격 이해해줘서 좋겠다."

하는 것이었다. 어렵게 시간을 냈는데 첫째 때문에 촬영이 조금 어그러진 것에 대해 버럭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런 비슷한 일들이 몇번 있었다. 

외식 할 때 혼자 화나서 뾰루퉁해 있는 첫째를 보고 

"나는 너를 이해해. 삼촌이랑 같이 가자"

하며 어깨동무를 하고 내 아이를 끌어당겨주는 남동생의 모습. 


아이 둘을 낳고 키우면서 나만이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울퉁불퉁했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조카를 받아들이는 남동생을 보며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남동생도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남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대신 모나게 행동하는 통에 가족들도 온전히 받아들여주지 못한 점이 있었는데 내 아이의 그런 모습을 삼촌이 되어 어 이해해주니 미안하기도 했다.

어쩌면, 여전히 남동생과 투닥투닥하는 어린 시절의 내면 아이에 머물러있는 나보다 나은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물론, 삼촌이라는 존재는 아이를 가끔씩 만나고 24시간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호혜와 배려를 베풀 수 있는 위치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며 내가 나이길 바라지 않는 마음이 때로 아이에게 전이된 경험이 한번쯤은 있지 않은가. 나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 모습을 아이가 닮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내가 싫어하는 나의 표정, 성격, 모습을 아이 얼굴에서 볼 때, 버럭하고 화를 내고 마는 그 마음 말이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걷어내고 자신을 닮은 아이를 받아들여주는 남동생의 모습을 볼 때, 뭔가 찌릿한 감동이 느껴지는지 모른다.




얼마전 읽은 최은영 작가님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는 소설집에 실린 <이모에게>라는 단편소설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조카를 키우는 이모는, 조카가 자신을 닮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강하게 키운다. 조카는 성인이 되어서야 그 마음을 이해한다. 


이모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느꼈던 내 마음을 선선히 인정했다. 내가 거듭해서 이모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결국 비슷한 주름을 얼굴에 새기면서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만 늘려가는 인간이 될까봐, 자기 상처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의 상처는 무시하고 별것도 아니라고 얕잡아 보는 편협하고 어두운 인간이 될까봐 겁이 났다는 사실을.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사진 속의 이모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정말 다르다고 생각해, 이모?' 이모는 내가 여린 탓에 함부로 대우받고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이모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모는 자기 자신을 대하듯 나를 대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누군가(대부분은 가족)가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제대로 사랑을 전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자기 자신을 대하듯 조카를 대한 이모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어야, 그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달으며. 

오늘도 내 아이를 받아들이려고, 아니 그전에 내 자신을 받아들이려고 애써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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