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흩어지게 하는 그 녀석을 가둬보았다
아이들과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보니, 바깥 세상과 단절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핸드폰만 있으면 세상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영상, 글귀 등과 쉴새없이 맞닿게 해주는 고마운 그 녀석.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심심해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친구를 만날 때도 손을 뻗게 되는 그 녀석. 나를 향해 끊임없이 "나를 켜주세요. 재밌는게 있어요. 좋아요를 드릴게요" 라고 신호를 보내는 듯한 그 녀석이 내 삶을 흩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켜면 오늘도 어김없이
재미있고 센스넘치는 릴스가 끝없이 재생되고
여기 저기 피 튀기는 잔인한 영상이 OTT에서 플레이되며
나만 빼고 다 잘먹고 잘사는 듯한 사람들의 웃음과 행복, 소비가 SNS에 전시되고 있다.
뉴스를 클릭해도, 너무나 자극적이고 감정을 들쑤시는 듯한 이슈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불같이 타올랐다가 갑자기 재가 되어버리는 사회 이슈들. 누군가를 죽일 듯이 물어뜯다가도 관심이 사그라들면 그 분노는 다른 이슈로 전이되어 버리고 만다. 빨라진 속도, 얕아진 깊이. 감정만 남은 이슈들. 그렇게 재로 변한 이슈들은 반복 될 뿐이다. 개인에게만 분노를 쏟아내고, 시스템이나 제도는 바뀌지 않으니 말이다. 제도를 다루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그것일까.
홍수처럼 범람하는 많은 사람들의 말들 위에 떠다니고 휩쓸리는 느낌이 싫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보의 수위는 바다가 아니라 잔잔한 호수였는데, 핸드폰 그 녀석이 나에게 정보라는 명목으로 나에게 계속해서 물을 붓는 격이었다. 그 물을 붓는 주체는 다름아닌 나의 손이었다는 것이 가장 문제이고 말이다.
마침,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을 읽으며 더욱 확신이 들었다. 3만 마일을 비행하고, 250명의 전문가와 인터뷰를 하며 많은 이론, 실험,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쓴 저자 요한 하리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집중력 부족 현상을 분석하고 그것이 시스템의 문제임을 밝혀낸다. 한 연구에서는 미국인 대학생이 무언가에 얼마나 자주 주의를 기울이는지를 조사했는데, 학생들은 평균 65초마다 하는 일을 전환했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성인도 평균적으로 3분만 한가지 일에 집중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기자인 요한 하리는 1달 동안 핸드폰 없이 지낸 프로빈스타운에서 바다를 바라봤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너무 오랫동안 내 시선을 트위터 피드처럼 아주 빠르고 일시적인 것에 고정하고 살았다. 속도가 빠른 것에 시선을 고정하면 근심에 빠지고 흥분하게 되며, 움직이고 손을 흔들고 고함치지 않으면 쉽게 휩쓸려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면 지금은 아주 오래되고 영속적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바다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있었고, 나의 사소한 걱정이 잊힌 뒤에도 오래도록 이곳에 존재할거라고. 트위터는 온 세상이 나 자신과 내 작은 자아에 푹 빠져있다는 느낌을 준다. 세상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싫어하고, 지금 이순간 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다는 온 세상이 온화하고 축축하고 우호적인 무관심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바다는 내가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결코 맞대응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정보의 소방호스를 잠그고 자신이 선택한 속도로 물을 홀짝인 (p.53)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도 호기심과 부러움을 일으켰고, 마침 "나 혼자 산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연예인이 금욕상자를 사용하는 에피소드를 보고 나는 외쳤다. "바로 저거야!!"
그리고 도착한 금욕상자.
TV에 나온 연예인 처럼 10시간동안 그녀석을 감금 시킬 용기는 나지 않아서 서너시간 정도씩 그녀석을 잠궈두었다. 주말에는 남편이 있으니, 급한 연락은 남편 핸드폰을 통해 했고 무엇보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집전화가 유용했다. 당장 해야 하는 전화나 문자는 집 전화를 이용했다. (쓰고 보니 완벽한 디지털 디톡스는 못했다 싶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답답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석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이 더 컸다. 꼭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꼭 알지 않아도 되는 신호들로부터 해방된 느낌. 그렇게 그 녀석이 금욕상자에 갇혀 있는 동안 현실에서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독서, 산책, 집안일 등등. 그리고 집안일을 하면서도 평소에 핸드폰을 흘깃거리느라 놓쳤던 여러 감각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타타탁 재료 다듬는 소리, 보글보글 끓는 소리, 멍하게 하늘도 보고, 엄마 퀸카 엄마 퀸카를 부르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아이의 뒷모습도.
한달쯤 되니, 요즘은 금욕상자를 매일 사용하게 되진 않는다.
정말 내가 이 녀석에게 너무 휘둘리는 느낌이 들 때. 꼭 집중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만 그녀석을 넣어둔다.
금욕상자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몰랐던, 그 녀석이 없을 때의 장점을 이제는 알기에 어느 정도는 스스로 조절이 가능해 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에게 나는 금욕상자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한번 사용해보라고. 생각보다 너무 좋다고 말이다.
나에게 금욕상자란.. 이런 의미이다.
욕구를 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욕구들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 현실의 삶에 필요한, 잊고 있던 생생한 욕구들을.
* 금욕상자는 내돈내산이며 이글은 전혀 광고나 협찬과 관계가 없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