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기업 근무 7년 차 직장인의 이야기 - 2
"나 한국 음식 좋아해! 러시아에 많이 팔아, Korean Carrot!"
러시안 매니저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아, 러시아에 한국 당근이 수출되나? 그렇다고 해서 당근을 생식하지는 않을 텐데...? 그게 뭐냐고 되묻자 동료가 보여준 것이 바로 아래와 같은 당근 볶음이었다. 이 음식은 마르코프차(марков-ча)라는 음식으로, 고려인들이 무 대신 당근으로 담근 김치로,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이주한 많은 고려인들이 만들기 시작하면서 점차 중앙아시아를 비롯하여 구소련 전역으로 퍼지게 된 요리라고 한다. 현재는 한국식 당근 샐러드라고도 불리며, 마트나 슈퍼 등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별 것 아닌 에피소드이지만, 나는 이것이 다국적 기업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의 장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다른 문화권을 공부하려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동료와 나누는 잡담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것. 그리고 그러한 차이가 각 국가의 비즈니스 모델에 어떻게 반영되고 로컬라이징 되는지를 알 수 있으니 이만큼 효율적인 공부가 또 어디 있을까.
내가 현재 재적하고 있는 일본지사에는 총 13개 국적의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또한 다국적 기업에서는 각 국을 몇 개의 클러스터 분류하여 협력을 도모하는데, 한국과 일본이 함께 소속된 아시아 클러스터에도 8명의 다양한 국적을 가진 직원들이 있다.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하면 자연히 시야가 넓어지고 문화의 다양성과 상대성에 대해 조금 더 열린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또한 각자의 배경과 생활환경에 따라 하나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보니, 다방면의 리스크를 고려하고 이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이 가능해진다.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환경은, 결국 톱다운 형식의 수직적 의사결정이 아닌, 수평적이고 유기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나는 이것이 다국적 기업의 다양성이 가진 가장 강력한 장점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다양성"이라는 것이, 때로는 다국적 기업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국적의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대부분의 매니지먼트팀이 글로벌 모회사, 혹은 다른 국가의 오피스의 매니지먼트팀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이 주재원의 형식으로 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나처럼 일반 로컬 사원들과 연봉 패키지나 대우 면에서 큰 차이가 없는 형태의 계약 조건으로 근무하고 있는 해외 국적 직원들도 다수 있지만, 약점이 되는 부분은 바로 이 파견 형식의 매니지먼트이다.
글로벌 자회사(로컬 지사)에서 로컬 인재를 육성하여 매니지먼트 레벨로 성장시키는 것은 부담이 큰 장기 프로젝트이다. 다국적 기업에 근무하는 인재들의 경우 근속연수가 연봉 상승으로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직을 통해 몸값을 높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한 마디로 시간과 돈을 투자한 인재가 다른 회사로 이동해버릴 수 있는 케이스가 많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외부에서 관련 업종의 경력을 쌓으며 매니지먼트 레벨에 오른 인재를 영입해오거나, 더 빠르게는 모기업에서 혹은 다른 국가의 자회사에서 이미 매니지먼트를 경험한 직원들을 파견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매니지먼트로 부임하는 해외 파견 직원들은 성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짧으면 3년, 길면 5년이라는 기간 동안 로컬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단기간에 파악하고, 액션을 취하여 무언가를 이루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하게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기존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백지화하여 로컬 직원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또한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닌 경우, 이미 그들이 떠난 후에 눈에 보이는 성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결과가 좋던 나쁘던 책임자였던 매니지먼트가 이미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로 인해 로컬 직원들은 매니지먼트는 일을 벌여놓고는 책임을 지지 않고 떠나버린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또한 주재원 형식으로 로컬 직원들에 비해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만 해당되는 일 일지도 모르겠으나) 언어 장벽으로 인해 실력 있는 로컬 직원들이 매니지먼트 레벨로 도달하지 못하거나 도전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인재의 풀이 언어 장벽이 없는 직원들로 한정되다 보니, 로컬기업들에 비해 관리직으로 채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 내 다국적 기업 인사팀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에서 가장 큰 화두였던 것이, 어떻게 로컬 직원들을 관리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냐라는 것이었으니, 대다수의 기업들이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다른 능력은 없지만 영어가 능통하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이 역시도 다국적 기업의 경쟁력을 둔화시키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케이스는 아주 극단적인 케이스로, 내가 만난 대부분의 매니지먼트들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노련히 이끌어나가는 훌륭한 리더들이었다. 그리고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기 때문에, 불만을 가지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한국이 글로벌 모회사의 거점이 되는 기업, 예를 들어 한국의 대기업들에 취업을 했으면 될 일이다. 또한 다국적 기업에 근무함으로써, 반대로 내가 매니지먼트 레벨이 되었을 때 다른 국가에서 비즈니스를 이끌어나가는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아도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다면 우리는 공간의 제약을 넘어 함께 일할 수 있다. 이전에도 글로벌 모회사와 다른 국가의 자회사들과도 협력하며 일해왔지만, 이제는 하나의 사무실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국경의 제약을 넘어 함께 일할 수 있는 더 넓은 의미의 원격 근무가 가능해졌다.
우리 팀의 한 직원은 3개월 전 호주 지사에서 일본으로 이동하였는데, 현재는 본인의 고향인 미국에서 근무 중이다. 시차의 문제로 협력을 할 때는 서로의 근무시간을 고려하여 미팅 시간을 조정하고, 또 미국 현지에서 파악할 수 있는 업무와 관련된 뉴스나 정보를 실시간으로 얻는 등 새로운 방식의 업무방식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이런 변화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또 어떤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생기게 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