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들이 나를 두고 사라져 버리는지 알았어
겨울이 왔다. 정규직이 되었다. 한 달에 보름만 집에 들어가고 보름은 회사에서 새벽까지 일하고 잤다. 검은색 플라스틱 의자를 3개 나란히 놓고 그 위에 웅크리고 누웠다. 추워서 선풍기처럼 생긴 온열기구를 켰는데,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면 한 곳만 못 참을 정도로 뜨거워져서 회전시켰다. 얼굴이 따뜻하면 다리가 추웠다. 다리가 따뜻하면 얼굴이 추웠다.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차였다. 시도 쓰지 못했다.
정규직 첫 달. 사흘 밤을 세서 편집장이 시킨 일을 마쳤다. 모터쇼에 참가한 자동차 회사들의 새 차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편집장한테 MSN 메신저로 파일을 전송하는데… 없었다… 파일이.
“파일을 날린 거 같습니다.”
1분쯤 후에 편집장은 말했다. “너 같은 애도 기자라고 이름을 적어줘야 하니?” 사무실엔 스무 명 정도가 일하는 중이었다. 눈물이 떨어지려고 했다. 눈을 크게 뜨고 참았다. 3분 정도 후에 밖으로 나왔다. 두 층 내려가서 계단에 앉아 엉엉 울었다. 내가 똑똑하지 않은 건 알았지만 그 정도로 바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입사 1년을 넘겼다. 그런대로 해냈다. 어느 날 전화를 받았다. “저, <GQ>에 나지언이라고 해요.” 숨이 멈추었다. 정말로. 잡지 기자가 된 이후로 줄곧 내가 가고 싶었던 매체는 남성 잡지 <GQ>였다. 특히 나지언의 글을 읽으며 언젠가 나도 이런 글을 쓸 거야, 다짐했었다. 그 나지언이 전화를 건 것이다.
“편집장님이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시네요.”
한 달 후 나는 <GQ>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임원진 면접 때 높은, 아주 높은 두 분을 만났다. 내 이력서를 짧게 훑고는 상식적인 질문을 몇 개 했다. 나는 떨어졌다. <GQ>는 대기업에서 발행하는 패션 매거진이다. 그런 회사에 들어가기에 내 이력은… 일단 학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편집장이 두 분을 찾아가서 설득했다. 운이 좋았을까? 나는 겨우 <GQ>에 입사했다.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편집장에게 물었다. “일은 우리 우성이가 더 잘할 거라고 했어. 네가 명문대 나온 애들한테 뒤지는 게 뭔데?” 그는 ‘우리 우성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름은 이충걸이다.
하지만 이충걸은 천사가 아니었다. 입사 첫 달, 내 첫 기사를 그는 난도질했다. 프린트된 기사 위에 붉은색 플러스펜으로 수정사항을 적었다. 더 적을 공간이 없을 때까지. 그는 말했다.
이 하나마나한 말들을 봐봐. ‘너무 중요하다’는 문장에서 ‘너무’가 필요해?
‘너무’가 없으면 안 중요한 거야? 수사를 빼. 수사가 얼마나 못 생긴 건지 아니?
수사에 신경 쓰느라 본질을 다 놓치는 거야.
나는 그 붉은 종이를 컴퓨터 모니터 옆에 붙였다. 수백 번 보았다.
입사한지 두 달 째인가, 세 달 째인가. 자정이 넘도록 회사에 남아 기사를 다듬고 있는데, 나를 불합격시켰던 임원 중 한 분이 편집부 사무실로 들어오셨다. 혼자 남아 있는 나를 보더니 다가와서 말했다. “우성 씨, 내가 후회를 했어. 지난달에 우성 씨가 쓴 기사를 보고 말이야. 미안해요.” 그리고 그는 갔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기사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새벽에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들어오셨을 때 인사를 하고, 엎드려서 잤다. 꿈에 아빠가 나왔다. 아빠가 나를 안아주었다. 한 번도,초등학교 이후로 한 번도 나를 안아준 적이 없는, 아빠가.
나는 겨우겨우 사회생활이라는 걸 해나갔다. 열등감이 심해서 열심히 일했다. 글을 잘 쓰지는 못했다. 그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여전히 시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굵고 긴 나무들이 많았는데, 그 나무들 밑을 멍하니 지나가면서, 이렇게 사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학교에 있는 후배들 생각도 났다. 후배들도 학교를 졸업하면 나처럼 시를 쓰지 못하게 될까 봐 미안했다.
언젠가 기사 마감을 하고 있는데 편집장이 불렀다. 내가 넘긴 기사를 읽으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때리고 싶었다.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하지만, 도대체 나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건지… 막막했으니까.
우성아, 정말 이정재가 하하하 웃었어? 세상에 그렇게 웃는 사람이 있니? 하하하, 는 네가 관습적으로 알고 있는 웃음의 표현 방식이잖아. 그런 걸 쓰지 마. 모든 글이 마찬가지야. 네가 보고 네가 느낀 걸 써. 네가 본 이정재가 있을 거야. 함께 있었을 때의 풍경과 공기 같은 것들을 떠올려봐. 너만의 표현을 써야지.
너는 시인이 될 사람이잖아.
아무도 나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나는 다시 시를 썼다. 시라기 보다, 내가 느낀 나만의 문장과 상념을 적고 싶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늦은 밤이었다.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썼다. 2년 동안 거의 거르지 않았다. 매주 한 편 씩 시를 써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임에도 나갔다. 끝나면 다 같이 술을 마시러 갔는데, 나는 집에 갔다. 시를 썼다. 가끔 술을 마시러 함께 가면, 잠깐 밖에 나와 PC방에 갔다. 거기서 시를 쓰다가 다시 술 자리에 갔다.
2008년 가을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그해 12월 19일 전화를 받았다. 신문사 기자였다. “혹시 중복 투고하셨습니까?”동일한 작품을 다른 신문사 신춘문예에도 응모했냐는 얘기였다. 내가 대답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나에게 왜 물어보는지 이해가 안 됐다. 당선 통보를 받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 같이 지방대 나온 사람은 안 시켜주는 건 줄 알았다. 기자가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내가 물었다. “뭘요?”
운전 중이었다. 강남 도산사거리에서 신사동 방향으로 좌회전하는데 눈물이 주룩주룩 내렸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아아.” “너, 왜 그래?” “내가 됐대.” 엄마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10초쯤 지난 후에 말했다. “좋은 날인데 왜 울어, 아들.”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인문관 잔디밭 앞에 플래카드 걸어주세요. 우리가 꿈을 이뤘어요. 흑흑.” “고맙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나는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 힘들었는데 아무한테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위로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로받으면 외로움이 줄어들까 봐.그래서 기도했다. 간절함이, 고독이 더 커지게 해 달라고. 나는, 시간이 어딘가로 사라진다고 생각했었다. 매일 밤 시를 써도 나에게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었다. 그 시간들이 나를 여기로 데려다 준 것이다.
*다음 글에는 사적인 이야기 집어 치우고, 인터뷰에 대해 적겠습니다.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걸 써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