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김영
두 얼굴의 사나이
남자 모델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나보다 키 크고 잘생겼기 때문이다.
김영이라는 모델이 있다. 얘는 좋다. 왜? 잘 웃는다. 입이 커서 얼굴 전체로 웃는 것 같다.
2년 전, 제주도에 갔는데 친한 패션기자가 화보 촬영을 하고 있었다. 김영이 그 촬영의 모델이었다. 얘는 이날 말을 탔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영국 신사처럼 말을 타고 폴로 경기를 하는 '콘셉트'로 패션 화보를 찍었다. 처음 봤는데 엄청 웃었다. 그 정도로 경계심 없는 성인이 요즘 있을까?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타고, 사진가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갑자기 묵직한 남자가 됐다. 김영은 감정을 가라앉히는 재주가 있었다. 농도가 짙은 액체 같았다.
"제 매력이라고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데, 저에게 두 가지 면이 존재해요. 말하지 않고 있으면 무뚝뚝해 보이고 화가 나 보이는데, 웃을 때는 웃는 것밖에 못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카페에서 그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목울대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내 목울대를 손가락으로 찾아보았다. 열등감을 느꼈다. 그게 뭐 별거라고.
김영이 어떤 모델이냐면, 아저씨 같은 모델이다. "영아, 넌 말이야, 아저씨 같아. 그런데 그냥 아저씨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장난기 넘치는 멋쟁이 아저씨 같기도 하고, 영국의 중후한 신사 아저씨 같기도 한데, 또 대한민국의 소심한 '딸 바보' 아저씨 같기도 해. 아무튼 넌 어리고 곱게 생긴 꽃미남은 아니야."
가끔 여자들이 우리 둘을 약간 흘기듯 쳐다보며 걸어서 지나갔다. 이놈의 인기. 유리벽 없이, 노출된 야외 테라스 형태의 카페였다. 우리 둘은 잘 진열된 물건 같았다. 나도 어지간히 생겼지만, (아, 제발, 비난하지마세요. 웃기려고 하는 말이니까) 사실… 영이가 정말 멋있어서 여자들 눈에 나는 안 들어왔을 것이다. 드문 일이지.
"그렇죠. 저는 데뷔할 때부터 '영'(young)한 캐릭터는 아니었어요." 영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영인데, 캐릭터는 안 '영'하네. "저는 저의 그런 점이 좋아요. 남들과 다르다는 점, 그게 제 무기예요. 저를 지켜낼 수 있게 해줘요."
여기서 잠깐, 일반적인 남자 모델에 대해 이야기하면, 말랐다. 피부, 하얗다. 곱상하게 생겼다. 영이는 마르지 않았다. 체격이 좋은 편에 속한다. 피부는 까무잡잡하다. 안 곱상하게 생겼다. 특히 옆모습은 약간 무서울 만큼 남자답다.
"2 대 8 가르마, 클래식한 슈트는 누구보다 잘 소화해낼 수 있어요. 동시에 섹슈얼한 느낌도 표현할 수 있고요. 제가 찍은 패션 화보는 거의 그런 거예요."
김영은 그런 모델이다. 늙는 거, 아니, 아저씨가 되는 거, 꽤 멋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런 환상, 나는 안 싫다. 딴죽걸기 좋아하는 '애'들은 결국 명품 옷이나 선전하는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고, 돈 없으면 늙어도 추할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다 맞는 말인데, 모델이 등장한 패션 화보를 고작 그딴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진짜 위대한 것을 못 본다.
그 위대한 게 뭐냐면... 취향과 태도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글이 완전히 딴 데로 가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고가 브랜드의 옷을 사지 않아도 좋은 취향과 좋은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영화 <킹스맨>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매너가 신사를 만든다고. 아무튼 다시 안 영한 영의 얘기로 돌아오자면, 영이가 이런 모델이어서 내가 영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영아, 모델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은 뭐야?"
"인격이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기분 탓인가? 느닷없는 이상기온 때문에 거의 녹을 것 같았는데.
"모든 일이 마찬가지잖아요. 공통분모가 있어요. 그게 가장 중요한 거예요. 지각하지 않고, 윗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아랫사람에게 권위적으로 굴지 않는 거."
그랬네,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네, 라고 남자가 남자에게 가로수길 카페에 단둘이 앉아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대신 영이처럼 웃으려고 흉내 내보았다. 얼굴 전체로 웃는 게 나는 잘 안됐다. "어렸을 때부터 잘 웃었어요. 그러다가 사춘기 접어들면서 웃음이 줄어들었고, 성인이 되면서 웃음이 없어졌어요. 어느 날 거울을 봤는데 음침하고 무서운 사람이 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웃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이렇게 웃음이 헤픈 사람이 됐고요." 웃음의 힘 때문일까? 영이의 말투에는 다정함이 묻어난다. 그와 나는 제주도에서 만난 이후 우연히 길에서 한 번 마주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혀엉" 하고 부르면, 물론 걔가 나보다 더 형같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커피 값을 내가 내게 되더라는 말이다.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알았는데, 영이는 연기를 하려고 한다. 정점을 찍은 모델들은 하나같이 배우가 되려고 한다. 문제 될 건 없는데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걸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게, 소위 그 '바닥'은 너무 빨리 바뀐다. 이런 말 조심스러운데, 어린 게 최고다. 영이는 서른두살이다. 모델로서는 많은 나이다.
"월수금 연기 수업을 받아요. 원래는 모델로서 표정과 포즈를 더 잘하기 위해서 시작한 거예요. 패션기자나 디자이너 선생님들이 원하는 콘셉트를 표현 못할 때 정말 괴롭거든요. 그런데 연기라는 게요, 계속하다 보니까, 제가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설레니?"
"네."
영이가 모델이 된 건 2006년이다. 누가 봐도 김영인지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크게 나온 사진이 단 한장이라도 패션잡지에 실리는 게 목표였다. 물론 목표를 이뤘다. 너무 당연해서 적는 게 멋쩍다. 영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패션모델이다. 그리고 4월 '케이 모델 어워즈'에서 올해의 패션모델상을 받았다.
"이제야 비로소 '모델'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만한 자격증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형이 아까 아저씨 같다고 한 그 부분을 저는 계속 밀고 나갔어요. 제 노력이 인정받아서 기뻐요."
영이의 삶에서 한 시대가 저물고 새 막이 열리는 것 같다. 잘할까? 영이가 배우를 잘해낼까?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영이보다 먼저 연기를 시작한 모델이 꽤 있다. 몇몇은 유명한 배우가 됐다. 하지만 누구도 김영 같진 않다. '아저씨'는 김영뿐이다. 아니다. 아저씨 아니다. 내가 너무 쉽게 말한 거다. 사람은 누구나 몸에 드러나는 삶의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김영은 주름을 사랑한다. 주름에 새겨진 시간의 역사를 존중한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수분크림을 엄청 많이 발랐고, 사실 비비크림도 발랐다. 나는 시간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어서 김영을 '아저씨' 같다고 적는다.
영이와 헤어지고 나서 걸어서 신사역 8번 출구로 들어갔다. 겨우 몇분 사이에 나는 건조한 사람들 속에 섞였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영이는 지금도 어딘가로 걸어가면서 웃고 있을 텐데. 웃는 김영을 보면 누구라도 자신은 왜 웃지 않는지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웃는 표정을 지어볼 것이다. 지금 내가 이유 없이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것처럼.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고발자, 연대하는 모든 분들을 지지합니다. 더 많은 마음이 그분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