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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Jan 10. 2017

그 남자의 이름


‘피카소 옹 별세’ 


1973년 4월 9일 경향신문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실 이 정도 수식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천재 예술가의 죽음을 알린다. 그렇다, 피카소가 사망한 것이다. 나와는 단 하루도 동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데… 뜬금없는 얘기지만, 이건 정말 아쉽다. 정확한 시간은 ‘8일 하오 7시 40분께’라고 한다. 

또 뜬금없는 얘기지만, 경향신문은 피카소에게 꽤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다음 날 ‘예술가는 돈거래 않는 법’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프랑스의 휴양 도시 니스의 재단사 미셀 사폰 씨는 피카소가 양복 값을 현금으로 지불하지 않았다고 술회한다. 그럼 뭐로 냈어?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예술가요. 그리고 당신도 또한 예술가요. 예술가는 서로 돈을 주고받지 않는 법이요. 우리는 서로 작품을 교환하기로 합시다.” 


와, 진짜 멋있다. 나는 시인이기도 한데, 그래서 예술가라면 예술가인데, 그래서 주변에 예술가가 많다면 많은데, 요즘 예술가들에겐 저런 의식이 없다. 저런 말했다간 정신 나간 놈 소리 듣는다. 시대가 달랐구나, 불과 40년 전인데, 그때만 해도 낭만이 있었구나. 그런데 피카소가 손해 아닌가. 내가 알기에 피카소의 그림 <꿈>은 2013년 한 개인 컬렉터에게 1억 5500만 달러에 팔렸다. 당시 환율로 1626억 2000만 원이었다. 피카소의 그림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비싸다. 내가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재단을 열심히 배워서 니스의 양복쟁이가 됐어야 하는 건가? 나쁘지 않은 삶일 것만 같다. 

지난달 21일, 그러니까 2016년 6월 21일, 피카소의 그림 ‘앉아 있는 여인’이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733억 원에 낙찰됐다. 애초 예상가는 510억이었다. 무려 223억이라는 격차를 전문가들은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 즉, 브렉시트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딜러와 경매업체 임원들은 경제적 혼란을 부를 브렉시트 우려 때문에 작품을 경매에 내놓지 않는 위탁자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미술품은 금처럼 경제 상황에 영향을 덜 받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자산으로 간주돼 위기가 예견될 때 수요자가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연합뉴스 6월 22일)


보통 이런 기사에는 ‘우리 집에 저런 거 걸려 있으면 이사 갈 때 버리고 간다’라는 댓글이 달린다. 그림 한 장에 억도 아니고 수백 억 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림으로만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영 일리 없진 않다. 하지만 피카소라는 천재 예술가를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1973년에 한국에서 피카소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지 모르지만 주요 일간지를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한 사람을 대한민국 사람들이 왜 알아야 할까? 왜 그런 사실을 보도했어야 할까? 심지어 양복 값을 그림으로 지불했다는 것까지.  

기아에 허덕이는 몇몇 나라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카소라는 이름을 안다. 그가 무엇을 그렸는지는 모르더라도, 그가 무엇인가를 그렸다는 것은 안다. 그 그림이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피카소의 그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그것이 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피카소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림 값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면 한 가지로 귀결되는데, 바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아는가, 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 한 장이 왜 이렇게 비싼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당신이 피카소의 이름을 알기 때문에. 또한 이러한 사실은 피카소가 인류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증명한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그의 가족에게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뜬금없는 얘긴데, 아까 그 재단사 아저씨는 도대체 어떤 그림을 받았을까? 

피카소의 사망 소식은 (지금 내가 찾아볼 수 있는 지면으로는)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에 실렸는데, 두 신문 다 ‘피카소 옹’이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20세기 최대 화가’라고도 적었는데,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람을 평가할 때 ‘최고’가 아니라 ‘최대’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도 흥미롭다. 요즘도 훌륭한 사람을 설명할 때 ‘큰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로 봐선 ‘최대’로 사람을 수식하는 게 영 어색하진 않다. 피카소는 친구인 브라크와 함께 입체파의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기사에 적혀 있지 않다. 최대 화가라고만… 왜 최대 화가인지는… 몰랐나? 1973년이었으니까. 물론 피카소는 그때도 이미 한국에 꽤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뭐 기자들은 피카소라는 이름은 알아도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몰랐을 수도…. 

두 신문의 기사에 의하면 피카소 ‘옹’은 죽기 직전까지 창작활동에 정열적으로 매진했다고 한다. 그는 아흔한 살이었다.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우리는 자주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피카소는 여전히 세계 여러 나라의 매체에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어쩌면 꽤 많은 사람들이, 오래 만나지 앉은 친구보다는 피카소를 훨씬 더 자주 생각하지 않을까? 마치 피카소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그리고 피카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내 아이가 나와 함께 공유하게 될 이름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내 아이의 먼 미래의 아이는, 그러니까 내 손자나 손녀 역시 내 아이와 그 이름을 공유할 것이다. 위대한 이름은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예술의 시대였다. 앞으로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20세기처럼 화려하게 혁명적이었던 예술의 시대는 오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사실이다. 인류는 오래도록 20세기 예술의 자장 안에서 살 것이다. 20세기에 수많은 예술 영웅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 피카소가 가장 위대했는가는 단정할 수 없지만, 피카소라는 이름이 가장 유명한 건 사실이다. 심지어 친구 이름처럼 친근하게 들리는, 그러나 우리가 만난 적 없는, 그 남자의 이름. 


2016 07 국립 민속박물관 웹진


_ 몇 번 청탁을 받아서 여러 차례 글을 썼는데, 이 글을 쓸 때 수정 요청이 있었다. 요지가 뭐냐면,  2015년 9월 14일 서울옥션 스페이스에서 열린 고서 경매에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이 출품됐다. 보물 제1683-2호다. 낙찰가 7억 5천만 원에 국립민술박물관이 하피첩을 소유하게 됐다. 이 얘기를 끼워 넣어 달라는 게 요지였다. 박물관 높은 양반이 굳이 이 글에 그 이야기를 같이 하고 싶다고 요청을 한 건데, 그게 이 글이랑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엮이지를 않았다. 거절 의사를 나타냈지만, 담당자가 곤란해했다. 그 사람은 뭔 죄... 인가... 싶어 억지로 끼워 맞춰서, 글을 다시 보냈다. 그 후로는 청탁이 오지 않는다. 

언제나 문제는, 자기 실적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저 쓸모없는 기관장 같은 양반들이라고, 나는 무지 강하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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