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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미에 Sep 06. 2020

13. 여수

잊을 수 없는 게장의 맛

게장의 기억


  여수를 처음 가본 것은 첫 내일로 여행 때였다. 기차역이 있는 여수는 내일로 루트에서 전라도 지역을 여행할 때 보성이나 순천에 이어 필수로 포함되는 도시였다. 고등학교 수련회 때 순천만 갈대습지는 가 본 적이 있는지라 보성에서 농가체험을 하고 유명한 녹차밭을 둘러본 후 순천에서는 역만 경유해서 전라선으로 갈아타고 여수로 내려갔다. 첫 여행 때만 해도 여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경상남도인 통영-거제-남해 라인의 바닷가 도시만 익숙했던 나에게 여수는 비슷한 풍경이지만 들려오는 말들이 너무나 생소해서 다른 평행세계에 온 것만 같았다. 그때만 해도 표준어를 완벽히 구사하기 전인 데다가 첫 전라도 여행이니 지역감정에 의해 괜히 시비라도 걸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경계했었다.

  

여수 봉산동 게장거리 (2011)

여수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라 첫 번째 일정으로 여수에서 가장 유명한 게장골목에 들렀다. 첫 기차여행에서 8년이 지난 지금은 현지인만 아는 맛집, 사람이 덜 붐비는 곳을 찾아가지만 모든 경험이 처음이었던 그때는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곳은 무조건 가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모두가 게장골목에 가면 가봐야 한다는 맛집이라고 하는 두 식당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사실 속살을 발라먹기가 어려운 게요리는 찜으로도 먹는 것을 싫어하고 꽃게탕도 국물만 먹는다. 심지어 우리 집에서 간장게장이란 음식이 식탁에 오른 것을 본 적도 없었다. 여수의 게장골목에서 맛보았던 그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이 내 인생 최초로 영접한 게장 음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게장백반이 8000원이라는 혜자스러운 가격에 밥과 게장 모두 무한리필이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점심값을 생각하면 놀라운 가격이다.


게장백반 (2011)


   여기가 전라도 백반집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널찍한 상에 각종 반찬들과 주인공인 간장게장, 양념게장이 채워지고 스테인리스 냉면그릇에 담겨 나오는 밥까지. 그때까지 담양 - 해남 - 보성을 여행하면서 전라도의 상차림에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그 정점을 찍는 게장백반이었다. 비록 게 자체는 크기가 작은 돌게장이었지만, 지금까지 몰랐던 게장 맛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간장에다 비벼먹어도 맛있고, 양념에다가 비벼먹어도 맛있는데, 왜 밥을 냉면그릇에 담아 주는지 너무나도 이해가 갔다. 밥은 왜 순식간에 없어지는지, 처음에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밥을 한 번 리필을 하고, 게장 그릇이 비워지니 게장도 리필하고, 밥은 다 먹었는데 게장이 남아있으니 뭔가 아쉬워서 밥을 또 한 번 더 시키고… 결국은 혼자서만 밥 세 대접을 싹 비우고서야 그곳을 나올 수 있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여수의 필수 여행지인 진남관과 이순신 광장을 둘러보고 오동도도 거뜬히 한 바퀴 돌고 왔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밥을 많이 먹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지금은 밥 한 공기 다 먹으면 많이 먹었다 할 정도인데, 그때는 “내 위는 우주다”라는 어느 일본 드라마의 대사를 외치고 다닐 정도로 많이 먹었고 돌도 씹어먹을 정도로 기운이 넘치던 나이였다.


여수 돌산대교 (2012)


  마지막으로 여수에 간 건 바로 다음 해였다. 교환학생 때문에 머물던 도쿄의 여름이 생전 처음 겪어보는 찜통더위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여름방학 막바지에 집으로 피서를 왔었는데, 부산에 있는 동안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오로지 게장을 먹기 위해 당일치기로 여수에 다녀왔다. 물론 그 전 해 여름에 먹었던 게장백반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던 내가 적극적으로 여수행을 추천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정통 한국음식이 먹고 싶었던 것도 있다. 사실 도시 분위기로 따지자면 통영과 상당히 흡사한 곳이 여수인데, 거리로 따지자면 통영이 훨씬 가까웠지만 게장골목은 오로지 여수에만 있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수로 떠났다.


게장백반 (2012)

  

지금은 사라진 그 게장집 (2012)

그러나 문제는, 그 당시 게장골목에 집단 식중독 파동이 일어나 1년 전에 갔던 식당을 포함해 인근 가게들이 영업정지를 당했다. 어쩔 수 없이 봉산동 게장골목과는 좀 떨어져 있는 있는 곳의 비슷한 게장집을 찾아갔지만, 눈물 날 정도로 맛있어서 밥을 세 그릇이나 먹고 나왔던 그때처럼 감탄을 연발하며 먹지는 못했다. 백반 가격이 올랐고, 게장 리필도 한 번 밖에 안된다는 달라진 가게 정책 탓도 있겠지만,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여행자의 초심과 여행 중의 긴 여정에서 오는 배고픔이 그때의 게장 맛을 더 돋워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때의 게장 맛이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맛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여행에서 미식을 그렇게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 않게 되어버린 나 자신에게 ‘음식’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다음의 여행부터 여행지에서 꼭 들러야 하는 맛집들에서 그 게장백반집만큼의 충격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서서히 맛집 방문에 투자할 시간에 다른 명소를 하나라도 더 둘러보게 된 것 같다. 이제는 나에게 맛집이라는 것이 무조건이 아닌, 그 여행지에서 해보면 좋을 체험 정도의 가치밖에 지니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맛으로 기억되는 여수는 그만큼 희소하고 특별해서 오래 그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사실 그 이후로 여수에 간 적은 없지만, 횟수로 훨씬 더 많이 가보았던 통영보다는 좀 더 특별했던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지금 여수는 밤바다도 유명하고 바다 위에 케이블카도 떠 있지만 나에게는 배고픈 여행자 시절 먹었던 게장골목의 게장이 최고였다.


여수 진남관 (201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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