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호른을 찾아서
세계지리를 배울 때나 TV의 여행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빙하 지형이 주는 독특한 풍광은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볼 수 없어서 그런지 충격이 상당했다. 특히나 파라마운트사의 영화를 볼 때 항상 등장하는 마테호른은 빙하의 침식작용에 관해서 머리에 쏙쏙 박히는 대표적인 예시였다. 그때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년설이 덮인 드높은 산맥과 그 가운데 뾰족하게 솟은 마테호른을 실제로 보면 좋겠다는 로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마테호른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스위스 남부 도시 체르마트는 입사 후 1000일 휴가로 떠난 스위스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이후로 5년 만에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15일이나 되는 장기 휴가였고 안 가본 나라들도 많았지만 인 앤 아웃 모두 취리히 공항으로 정했다. 일정을 맞출 이가 없어 혼자 떠나는 장기 여행이었기 때문에 뭐든지 내 맘대로 설정할 수 있었다. 오로지 나의 의견만 반영할 수 있는 여행이었기에 큰 고민 없이 스위스만 여행하기로 했다. 스위스 이외에 다른 나라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마테호른을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그래서 총 13박 15일 중에서 루체른 3일 - 인터라켄 2일 - 외슈넨 1일 - 체르마트 5일 - 샤모니 몽블랑 1일 - 베른 1일 - 취리히 2일로 일정을 정했다. 이왕 가는 거 알프스 3대 미봉을 모두 보고 오자는 생각에 중간에 프랑스 국경을 넘기도 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눈을 상상할 수 없는 초여름에 떠난 스위스였지만, 산악지대는 날씨가 좋은 날 보다 안 좋은 날이 더 많았다. 거대한 스케일의 산등성이들은 구름과 안개에 제대로 된 모습을 감춰버리고는 잘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해발 2,000m 위에 있는 하이킹 코스는 눈이 녹지 않아 거의 통제되어 있었다. 여행지에 성수기가 있는 건 절경에도 때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체르마트에서의 일정을 5일이나 잡은 건 그중에 하루라도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확률적인 기대 때문이었다. 결국 5일 중에서 마테호른이 온전한 제 뿔을 보여준 건 진짜로 딱 하루였다.
그동안 국철만 계속 타다 새로운 기차를 타고 협곡을 넘어 체르마트에 도착했을 때에도 비가 내리고 있는 우중충한 날씨였다. 마테호른도 구름에 가려 아예 흔적도 보이지 않아 어느 방향에 있는지 당최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화장실을 공용으로 쓰는 오래된 호텔 1인실에서 묶었는데, 뿔 모양의 산봉우리는 일절 보이지 않고 1시간만 걸으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체르마트 시내는 그동안의 여정 중에 가장 답답하고 재미없는 도시였다. 그동안의 숙소는 뒤 돌면 저 멀리 티틀리스 산이 보이고 앞에는 한적한 호숫가가 있는 에어비엔비나, 별이 쏟아지는 아이거 북벽 아래에 있는 호스텔, 해발 1500미터 위에 있는 외슈넨 호수 앞에 있는 아담한 호텔이었는데, 체르마트의 첫 번째 숙소는 몇 년 전의 고시원 생활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물가 비싼 스위스에서 편히 쉴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의 숙소를 찾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다음 숙소를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고르너그라트 Gornergrat
체르마트에서 마테호른을 전망할 수 있는 방법은 3가지 코스가 있다. 첫 번째는 톱니바퀴 열차를 타고 3,089m 고르너그라트 역까지 올라가는 방법, 두 번째는 푸니쿨라를 타고 4.5분 만에 라이 호수가 있는 2,288m 수네가 파라다이스까지 올라가는 코스, 마지막으로 해발 3,883미터의 가장 높은 전망대에서 마테호른을 조망할 수 있는 마테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코스가 있다. 하루하루씩 순서대로 각 코스를 다녀왔는데, 첫날은 흔적조차 볼 수 없던 마테호른이 그다음 날 고르너그라트 열차를 타고 올라가면서 거대한 실루엣으로 나타났다. 올라가서는 안타깝게도 꼭대기의 뿔 부분이 구름에 가려져 온전한 모습을 도통 보여주지 않았는데, 구름이 흘러 걷히는 듯하면서도 계속 가려져있어 한참을 기다렸다. ‘저 구름만 지나가면 조금이라도 보이겠지’ 기대하기를 3시간 정도 하다가 뿔 모양 위에서 구름이 계속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마음을 접고 마을로 내려왔다. 마테호른한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기만 한다면 역시나 매일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네가 Sunnegga
체르마트에 와서는 매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다. 바로 아침 해를 받아 빛나는 황금 호른을 보는 것. 고르너그라트에서 돌아와 잠들었다 새벽에 깨보니 구름 한 점 없었고, 뭔가 예감이 좋았다. 알람에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서 처음으로 마주 한 마테호른의 모습은 그 꼭대기가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친김에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밖으로 나가 빛나는 봉우리에 포커스를 맞췄다. 실제로 황금 호른을 보다니 너무나도 황홀한 경험이었다. 나에게 항상 불운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그 날은 행운만 있을 것 같았다.
체르마트에 오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찾아간 곳이 있었다. 체르마트 역 앞 쇼핑센터 안에 있는 ‘Fly Zermatt’라는 곳으로, 패러글라이딩 예약을 받고 장비를 대여하는 곳이다. 여행 전부터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가 바로 스위스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것이었는데, 인터라켄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장면은 TV 예능에서도 많이 소개되었지만, 나는 무조건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예약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탈 수 있는 게 아니고, 날씨와 바람을 봐야 한다고 했다. 당시 상황은 바로 다음날은 힘들고 그다음 날을 기대해 볼 만 한데 이 마저도 불확실하다고 했다. 가능하면 아침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다행히 아침에 연락이 왔다. 그리고 바로 샵으로 뛰어나갔다. 오후에는 날이 안 좋아져 바로 뛰어야 한다고 해서 아침 일찍으로 정한 것이다. 오늘 일정은 수네가 파라다이스에서 하이킹을 할 예정이었는데, 패러글라이딩을 위해 먼저 푸니쿨라를 타게 되었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신라면 낙하산이 펼쳐졌다. 인생에서 스위스 하늘을 날아보는 경험은 해 볼 가치가 충분한 일이다.
환상적이었던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돌아와서 이 여행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 체르마트의 두 번째 숙소에 체크인을 하러 갔다. 체크인을 도와주던 호텔 직원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이 호텔에서 가장 좋아하는 방이에요”, 테라스에서 마테호른이 보이는 방. 이틀 숙박비가 호스텔에서 일주일을 묶을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체르마트에 왔으니까 이 정도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린델발트 길바닥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아이거 북벽의 별 사진을 찍을 때와는 달리 편하게 테라스 의자에 앉아 삼각대를 옆에 세워놓고 마테호른의 별 사진을 찍었다.
스위스 여행에서 세 번째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 날임은 분명하다. 스위스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이루고 왔기 때문이다. 운 좋게 패러글라이딩도 했지만 마테호른을 보며 걷는 수네가 5대 호수 하이킹은 지금부터다. 다시 푸니쿨라를 타고 수네가로 올라가 하이킹의 시작점 블라우헤르트까지 곤돌라를 타려고 했지만, 운행 중지 상태였다. 그렇다고 하이킹 루트가 막힌 건 아니어서, 오르막을 걸어서 올라갔다. 6월임에도 불구하고 곤돌라나 케이블카가 기상 상황 때문에 운행 중지인 경우가 많았다. 내가 스위스 여행을 결정한 건 SNS에 한 사진작가가 올린 단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였는데, 마테호른을 정면으로 두고 호숫가 바위 위에 앉아있는 여성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산악인의 공간으로만 여겨졌던 알프스에 머리를 땋은 여인이 예쁜 옷을 입고 앉아있는 사진을 보고 ‘저곳에 나도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진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고, 그 배경이 된 장소가 단 몇 걸음 앞에 있다. 아일랜드 이후로 더 이상 로망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면서 산다.
로망의 배경이 되었던 마테호른이 비치는 그림 같은 슈텔리제 호수 Stellisee 에서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고, 또 다른 호수를 향해 길을 걸어갔다. 그린드예 Grindjisee - 그륀제 Grünsee - 무스이예 Moosjisee - 라이 Leisee 호수까지, 4시간 반의 하이킹 동안 일하면서 제대로 못한 하이킹에 대한 욕구도 풀고 잠시 앉아서 눈 앞의 마테호른을 멍하니 보기도 했다. 오후로 시간이 흘러가면서 서서히 봉우리를 뒤덮는 구름이 많아졌는데, 아쉽지만 마냥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마테호른을 보는 건 이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일 동안의 스위스 여정 중에서 이 날이 없었더라면 쉽지 않은 이 여행을 다시 결정하고 로망을 실현하기까지 또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날이 있었기에 나는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하고 그 추억으로 오늘을 버티고 있다.
* 해발 2천 미터의 햇살은 살갗을 따끔하게 태울 수 있으니 여름 하이킹 시 주의할 것. 온몸에 선크림은 필수.
마테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Matterhorn Glacier Paradise)
꿈같았던 어제를 뒤로하고 환상적인 숙소 테라스 뷰에 걸맞지 않게 다음날은 날씨가 급변했다. 비도 올 것 같았고 바람도 어마 무시하게 불었지만, 그래도 호텔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계획했던 여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열심히 걸어서 올라간 매표소에서는 날씨 때문에 글래시어 파라다이스까지 가는 곤돌라는 운행 중단 상태였고, 겨우 운행한다는 트로케너 슈테그까지의 티켓만 끊어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아마 눈이 녹기 전까지는 운행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6월은 아무래도 스위스 여행의 최적기는 아닌 모양이다. 겨우 올라간 전망대에서는 마테호른의 남측 모습은커녕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의 칼바람을 때려 맞고 도망치듯 다시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렸다. 그래도 뭔가 아쉬워서 퓨리에서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갈아타지 않고 걸어서 체르마트 시내로 하이킹하는 기분으로 내려왔다. 그래도 어제가 있어서 그런지 마지막 마테호른으로의 여정이라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해방감과 상쾌함이 좋아 산 타기를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산을 가까이했고 가족이 다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이 산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뒷산을 뛰어다니던 장산의 날다람쥐는 속초에서 눈 덮인 설악산의 설산을 보고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껴 저런 산봉우리들이 수십 개나 모여있다는 알프스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제일 높이 올라가 본 한라산보다 높다는 곳, 산이라는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는 느낌이 무엇일지, 온전히 스위스에서 그 자연을 만끽하고 싶었다.
자연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대하기가 어려웠다. 비싼 티켓값과 숙박비를 기꺼이 내고 이 모든 것을 정복하고 오겠다고 호기롭게 떠난 체르마트행에서 마테호른의 용안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왔다. 물론 그중에서도 운이 좋은 편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또다시 와달라고 그런 여운을 남겨준 것 같다. 다음에는 꼭 산을 사랑하는 우리 가족과 함께 마테호른을 보고 싶다. 꼭 그렇게 할 것이다. 나에게 새로운 꿈이 또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