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성 May 05. 2021

우주의 아이

ktx magazine, 2021_03

호수 민박


박준

                           

민박에서는 며칠째

탕과 조림과 찜으로

민물고기를 내어놓았습니다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제 점심부터는 밥상을 물렸고요


밥을 먹는 대신

호숫가로 나갔습니다


물에서든 뭍에서든

마음을 웅크리고 있어야 좋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동네의 개들이 어제처럼 긴 울음을 내고


안개 걷힌 하늘에

별들이 비늘 같은 빛을 남기고


역으로 가는 첫차를 잡아타면

돼지볶음 같은 것을

맵게 내오는 식당도 있을 것입니다


이승이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이곳은

공간보다는 시간 같은 것이었고


무엇을 기다리는 일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박준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라고 하니 내가 엄청 어른 같은데, 얘랑 나랑 세 살 차이다. 뭐 그렇다고. 근데 왜 아이라고 했냐면, 음, 추억 하나를 꺼내야겠어. 2012년 가을이다. 내 시집이 여름에 출간됐고, 얼마 후 합정동 어딘가에서 준이를 만났다. 준이에게 물었다. “야, 너는 시집 왜 안 나와?” 멍청한 질문이었지. 준이가 나보다 1년 먼저 등단했다. 시집은 내가 먼저 출간했다. 오만했을 것이다. 내가. 그러니 그런 질문을 했지. 마음 속으로 응원했으면 될 일인데.

“음, 저는 사는 동안에는 못 낼 거 같아요.” 준이가 웃었다. 시집은 훌륭한 형이나 누나 혹은 어른들만 내는 거 아닐까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어른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줄 안다. 준이도 그랬다…고 내가 생각한 거지. 멍청했던 것이다. 훌륭한 형인 내가. ‘사는 동안에는’이라는 말, 아이들이나 할 법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준이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믿었고 부족한대로 뭐든 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방향인 거지.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웠듯, 보통 이런 사람들이 훗날 훌륭한 업적을 세운다.)

그해 12월 박준 시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이다. 이 시집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굳이 적을 필요 없을 것 같다. ‘사는 동안에는’이라는 말에 담긴 진지함이 독자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나는 그 시집을 보자 마자 울었는데 나 스스로가 바보 같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시집 한 권 먼저 낸 거 가지고 폼을 잡고 살았다니. 준이가 시를 쓰기 위해 기꺼이 감내한 시간은 내가 오만하고 방자하게 보낸 나날이었다.

준이의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2018년 12월에 출간됐다. ‘호수 민박’이라는 시는 이 시집에 실려 있다. 평범한 단어로 덤덤하게 썼다. 이 시집엔 몸이 가거나 마음이 간 ‘여행’의 기록이 꽤 실려 있다. 그의 여행은 목적이나 이유가 없어 보인다. 쓸쓸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도 알 수 없다. 준이는 무엇인가 찾고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막연하고 당연히 기댈 만하지 못하다. 어떤 시인은 그 막연한 것의 실체를 빨리 찾아내서,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고, 거기에 기댄다.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닐 수 있다. 준이는 그 막연한 것을 마음에 품고, 진지하게, 혼자 간다. 천천히 걷는다. ‘사는 동안에는’ 결코 밝혀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마음으로, 이 시대에 아직, 시라는 걸 쓰는 사람이 있구나, 나는 준이를 보며, 나도 시인이면서, 생각한다.

두 권의 시집으로 준이가 얻은 걸 굳이 ‘명성’이라고 적는다면, 명성이 너무 커서 이제 나와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게 준이에게 의미가 있을 것 같진 않다. 한 문장과 한 문장 속에, 그리고 그 사이에, 준이가 담고 싶어한 것은 어떤 본질에 대한 것이고… 솔직히 이 부분부터 나도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시를 쓰느라 밤을 세고, 서서히 세계가 밝아지는 것을 볼 때의 몽롱한 희열. 사실은 그런 밤일수록 한 줄도 쓰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적히지 않은 문장은 반드시 손끝을 통해 드러난다. 기다리는 자가 그것을 받아 적는다. 끝끝내 그 순간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며 나는 시를 읽는 것이, 시인을 응원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에겐 서운한 이야기려나. 하지만 누군들 더듬더듬 나아가는 ‘아이’의 순수한 여행을 응원하고 싶지 않을까. 한 ‘아이’가 ‘마음을 웅크리고 바라본’ 호숫가에 서면, 우리가 바로 우주의 아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쓸쓸해도 나쁘지 않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