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ole Jachmann
나와 그녀의 이야기_
베를린에서의 세 번 이사 끝에 드디어 오랜 기간 머물 수 있게 된 곳을 찾게 되었다. 1여 년의 기간 동안 늘어난 살림살이에 이사 트럭을 빌릴까 고심하던 찰나였다. 아는 친구의 소개로 운전을 아주 잘 한다는 니콜을 소개받았다. 돈을 주겠다는 내 요구에 질색을 표하는 니콜에게 대신 '맛있는 한국요리를 해줄게!'라고 약속했고, 그렇게 렌터카 가게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비가 주룩주룩 오던 이삿 날, 우리는 함께 열심히 짐을 날랐고, 나는 그날 밤 닭볶음탕을 대접했다. 다행히도 니콜은 매우 만족해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절친이 되었다. 니콜도 나도 아르바이트로 돈벌이를 하며 각자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애쓴다는 점에 있어서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을 때에는 두말없이 그 첫 주자가 되어 주었다. 처음이라는 핑계로 모든 게 어설프고 서툴렀지만 니콜은 특유의 웃음소리로 우리 셋을 안심시켜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인터뷰를 시작했다!
Nicole Jachmann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마스트릭트(Maastricht)출신인 니콜 잭만은 영화 시나리오 전업작가를 희망하며 3년째 베를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총 두 편의 단편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 라이제 공원
베를린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한 라이제 공원(Leise Park)에는 다른 공원에서 발견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서려있다. 작은 규모의 공간 안에 너른 풀밭이나 공터 대신 큰 나무들과 예쁜 묘비, 놀이터와 길, 벤치와 조형물들이 오밀조밀 자리를 잡고 있다. 니콜을 만나자마자 때마침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한 아이가 우리 옆을 지나간다. “공동묘지에서 저렇게 소리 지르고 뛰어다닌다는 게 상상이 되니? 보통 어른들한테 바로 제지당했을 거야.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슬퍼야 한다, 엄숙해야 한다는 생각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하는 듯 해. 하지만 그런 것도 어쩌면 다 학습된 게 아닐까? 아이들의 시선은 어른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것 같아. 그래서 난 그들을 바라보는 게 참 좋아." 죽은 자와 산 자, 노인과 아이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베를린의 이 작은 공원이야말로 니콜에게는 인생의 거대한 돋보기인 셈이다.
> 첫 발을 내딛다
니콜은 2년 전 베를린에서의 영화 시나리오 워크숍에 장학생으로 뽑혀 처음 이 곳에 오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신방과를 졸업한 후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도전한 게 운 좋게도 뽑히게 된 것이었다. 이 도시에 갓 도착했을 때는 40도를 웃도는 한창 더운 날씨의 8월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거의 매일 같이 사람들이랑 밤에 열리는 야외 영화관에 갔었어. 커다란 스크린으로 선선한 여름 바람 쐬며 영화 보는 재미가 끝내줬거든. 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 자그마한 영화관들이 널려 있는데 정말 저렴한 가격으로 최신 영화를 접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 이렇게 영화를 사랑하는 이 도시에서라면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내 길도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지." 당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니콜은 '엠마'라는 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가정의 불화를 겪는 어린 소녀 엠마가 우연히 만난 창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어른들의 세상을 꼬집고자 하는 블랙코미디였다. 니콜이 본격적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써 보겠다고 마음먹은 후 완성한 그녀의 첫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니콜은 기약 없는 베를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 잠자는 '엠마'
다음 해 그녀는 이 시나리오를 들고 베를린 국제 영화제(International Berlin Film Festival; Berlinale)를 찾았다. 여러 프로듀서와 업계 투자자를 만나면서 '엠마'를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막말로 맨 땅에 헤딩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이미 니콜과 비슷한 지망생이 수도 없이 많았을뿐더러 종종 그녀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은 아이와 창녀가 함께 등장하는 설정이 과하다며 결국에는 돌아서곤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영화제는 별 다른 성과 없이 끝나버렸다. 이후 꽤나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엠마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 했다. “의욕을 갖고 시작했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불안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보이는 결과가 없다고 해서 그 시간이 전혀 의미 없었던 건 아니야." 그렇게 완성된 시나리오를 품고,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의 느린 과정을 니콜은 덤덤히 견뎌내고 있었다. 현재까지 카메라와 음악감독의 섭외가 이루어졌고, 투자자와 제작자를 여전히 물색 중에 있다.
> 베를린에서의 일상
요즘 니콜은 옷 가게와 사우나에서 일을 하며 베를린에서의 생활비를 벌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그녀에게는 모두 영화 캐릭터 수집의 과정이 된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베를린이다 보니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접하게 돼. 사우나에서 만났던 마사지사 아주머니한테서는 젊은 시절 히피로 살았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듣기도 하고, 공원에서 만난 노인들로부터는 그들의 생생한 베를린 러브 스토리를 듣기도 해. 정말 살아있는 이야기들이지." 누가 시나리오 쓰는 사람 아니랄까 봐 니콜은 항상 이렇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달고 산다. 문뜩 우리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이사 트럭 안에서 니콜은 온갖 사적인 질문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도 진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바로 이게 니콜이 가진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최고 장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녀는 무슨 일을 하고 어디에 사는지 등의 단편적인 정보를 늘리기보다는 항상 그 너머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삼 년 전에 자전거를 도둑맞았는데 지금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그 자전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보다 당시 분하고 억울했던 기분들이야.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그 사람이 잊지 못할 그 감정과 느낌을 나도 함께 나누고 싶어."
> 매 순간이 영화라면
인터뷰가 끝나고 며칠 뒤 니콜은 우리에게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해왔다. 암스테르담에서 진행되는 단편 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3개월 동안 네덜란드 영화 제작자, 감독, 시나리오 작가, 편집자, 음악, 미술감독 등이 한 데 팀을 이뤄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너무 하나의 시나리오에만 매달려 있다 보니 나도, '엠마'도 약간의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았어. 하지만 주변에서 걱정하는 것처럼 이 일이 잘 되지 않아서 우울하거나 좌절한 건 절대 아니야. 이 시나리오를 품고서 동분서주 베를린을 뛰어다닌 지난 2년이 나에게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 비록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거나 극적인 사건을 겪진 않았지만 분명 천천히 나와 엠마는 성장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에서는 적절한 시점에 항상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니콜은 매 순간의 감정을 어떻게 느끼느냐, 또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분명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게 우리 삶을 영화보다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꼭 하이라이트가 없더라도 늘 이어갈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