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나리 Mar 20. 2016

17_베를리너_슬로우라이프_양말 브랜드 창업자_앙카

Hanka Vanatkova

나와 그녀의 이야기_

2년 전 여름, 베를린에 갓 도착해 아직 이 도시가 낯설던 때. 당시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던 나탈리가 주말 벼룩시장에 함께 참여해보자고 제안했다. 신청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 딱히 팔 것도 없으면서 흔쾌히 오케이를 외쳤다. 뭘 팔까 고심하다 결국 유부초밥과 참치 주먹밥을 싸가기로 했고, 같이 살던 일본 친구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겨우겨우 20인분을 만들어 갔다. 당일 아침 일찍 장터로 가보니 나탈리는 이미 또 다른 참가자인 그녀의 체코 친구와 함께 매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뽀얀 피부에 새빨간 립스틱, 그리고 세련된 꽃무늬 점프슈트를 입은 앙카라는 그 친구는 자신이 손수 만든 액세서리나 티셔츠, 그리고 본인이 입지 않는 옷 여러 벌로 부스를 한껏 꾸미고 있었다. 그녀의 아이템들은 한 눈에 봐도 "와 예쁘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 나는 지난밤 새 주먹밥을 준비하느라 쩌든 피곤에 오징어 같은 인상을 하고 있었고, 괜히 그녀의 예쁜 옷에 냄새가 밸까 주눅까지 들고 말았다. 하지만 앙카는 이런 내 맘을 읽었는지, 내 야심 가득 주먹밥을 판매대 가운데 올려놓더니, 선뜻 2유로를 내밀며 말했다. "오늘 내 생일이야! 이 주먹밥, 꼭 케이크처럼 생겼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주변 마트에 가서 와인 세 병을 사 왔고 내가 싸온 주먹밥을 안주삼아 장사는 잊은 채 연거푸 낮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심지어 물건을 팔아 돈이 생기는 족족 와인을 사 대는 통에 결국 단 한 푼의 돈도 남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 날은, 우리 모두에게 잊지 못할 베를린의 여름을 만들어 주었음은 분명하다.

> 양말 브랜드 '캠핑' 창업자 _ 앙카 <

Hanka Vanatkova

체코 제2의 도시 브루노(Brno) 출신으로, 프라하 예술대학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정부의 후원을 받고 베를린의 로컬 가죽 디자인 회사에 인턴으로 일하면서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는 프라하에서 알고 지내던 디자이너와 함께 손잡고 양말 브랜드 '캠핑(Kempink)' 창업에 매진하고 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인생의 참 가치들을 양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참고) 캠핑 웹사이트 http://www.kemp.ink


바쁜 사장님

우리 셋이 인터뷰를 결심하면서부터 앙카는 늘 1순위 섭외 대상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창 프라하와 베를린을 분주히 오가며 지내던 그녀였기에,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탈리를 통해 그녀가 3일 간 베를린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주저 않고 앙카에게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도 프라하로 돌아가는 버스가 세 시간쯤 남은 무렵, 드디어 앙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부랴부랴 약속 장소로 달려가니 고맙게도 앙카는 마당에 커피와 과자를 마련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도 느꼈던 그녀의 세련된 배려가 한껏 더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프로슈카우어 커뮤니티

나탈리와 앙카는, 우리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프로슈카우어(Proskauer)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사이다.  한 독일인이 세를 준 건물에서 우연히 처음 만나게 되어 13살이라는 나이차가 무색하게 친구로 지내고 있다. 베를린 프리드리히자인(Friedrichshain)지역에 위치한 이 건물 1층에는 주인 안드레아스가 직접 헌책방을 운영 중이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명절에는 건물에 사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이 곳에 모여 파티를 열기도 한다. 내가 나탈리에게 처음 초대받아 갔던 그곳, 핀란드 친구들을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프로슈카우어 4번지, 이 독특한 건물에 처음 커뮤니티를 꾸린 건 다름 아닌 앙카였다.  

나탈리, 안드레아스, 그리고 앙카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내 방을 찾아 돌아다녔어. 그런데 정말 쉽지 않더라고. 그러다 누군가 지나가던 말로 이 거리에 책방을 운영하는 한 남자가 남는 방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정말 무작정 찾아와서 방이 있냐고 물었지. 그게 안드레아스야. 때마침 그가 '프라하 여성'이라는 책을 읽고 있던 찰나여서 우리 둘은 참 신기한 인연이다 싶었지. 그렇게 이 건물에서 3년을 지내며 내가 아는 프라하 친구들이 이 건물에 머물기도, 또 헬싱키에서 인턴을 하며 알던 라우리라던 친구가 옮겨 오기도 하면서 점점 우리만의 커뮤니티가 생겨갔던 것 같아." 과거 동독 시절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주인 안드레아스는 외국에서 온 젊은 아티스트 청년들에게 싼 값으로 플랫을 제공해주고 있다. 때문에 이 건물에는 전 세계에서 온 디자이너, 사진가, 화가, 음악가 등으로 꽉 차 있다. "하지만 커뮤니티라고 해서 우리끼리만 몰려다니는 건 결코 아니야. 각자 열심히 할 일 하다가, 모두가 원할 때 같이 뭉쳐서 노는 거지. 가끔 혼자 방에 있다가 갑자기 맥주나 와인이 마시고 싶을 때, 창문 밖으로 맥주 마실 사람!이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해. 그럼 꼭 누군가가 응답을 해 와."


현재 앙카가 프라하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의 방은 또 다른 핀란드 친구가 쓰고 있는 중이다. 그녀에겐 언제든지 돌아와 지낼 수 있는 베를린의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른다.


책방 안 에서, 앙카.


패션 디자이너, 앙카

한편,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시 체코 프라하의 예술대학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앙카. 4년 전, 짧은 기간의 인턴으로 베를린에 머물기 시작했지만 일이 끝난 이후에도 이 도시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처음 일한 곳은 가죽 제품을 다루는 베를린의 작은 로컬 브랜드였는데, 베를린 패션 위크에도 매 번 참여할 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는 회사였어. 여기 있는 동안 유럽의 패션 대도시인 런던이나 밀라노, 파리와는 또 다른 베를린만의 매력을 느끼게 됐지." 그 전, 밀라노와 헬싱키에서 인턴을 한 적이 있는 앙카는 당시 빠른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계의 속도를 맞추기가 너무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 비해 베를린은 훨씬 여유로워 디자이너로서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과거 체코와 비슷한 공산주의 체제를 겪은 동베를린이 나의 '느리게 가는' 패션 철학과 맞물려 있기도 했지." 그리하여 앙카는 베를린에 더 머무르기로 결심했고, 인턴이 끝난 후 찰란도(zalando)라는 스타트업 패션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됐다. 다름 아닌,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와~~~ 멋지다!"라고 감탄하는 우리의 반응에, 반대로 앙카는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지치는 시간이었어. 디자이너로서 쌓아 온 경력도 인정받지 못하고, 내 창의성 또한 전혀 발휘되지 못한 채 무거운 옷을 나르며 카탈로그에 들어갈 뻔한 사진만을 내리찍느라 어깨가 다 상할 지경이었으니까. 결국 이러다 나를 잃겠다 싶어서 3년을 채우고 그만뒀지."

앙카가 디자인한 '캠핑'의 양말들

'캠핑'의 탄생

회사를 나온지 어언 1년, 앙카는 여느 때보다도 활기차 보였다. 그동안 그녀는 긴 휴가 겸 아이디어 구상 기간을 가졌다. "내가 정말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했어. 여전히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원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디자인으로 어떤 제품을 만들고 싶은 건지. 그래서 바로, 짜자잔!" 그녀는 대뜸 발을 들어 보인다. 신발일까 싶어 유심히 쳐다보는데 앙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말을 손가락으로 튕긴다. "이거야, 이거! 모두가 꼭 필요로 하는 아이템이면서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양말." 그렇게 그녀는 오는 여름, 양말 브랜드 '캠핑(Kempink)'의 체코 론칭을 앞두고 있다. 프라하에서 알게 된 파트너와 함께 디자인부터 홍보까지 손수 해 내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릴 적부터 꼭 함께 브랜드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하던 친구 슈테판카와 함께 캠핑을 갔어. 그러면서 그 브랜드에 우리 본연의 모습이 담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때 나온 키워드가 바로 쉬어 감, 행복, 자연, 좋은 사람들. 정말 간단하면서도 막상 얻기 힘들 것들이지. 그런데 바로 지금, 우리가 이 모든 걸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게 '캠핑'으로 우리의 브랜드 이름을 정했고, 역시나 꼭 필요한데도 그 소중함을 늘 잊고 사는 양말이라는 아이템에 집중하기로 했지. 우리의 양말을 신은 누군가가 잠시나마 이런 '캠핑'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목표야. 너무 거창한가? 하하 그렇지만 또 매우 심플해!"  


                          직접 양말을 천연 색소로 염색 중인 앙카 @ 출처 _ 앙카 개인 소장


그렇게 친구 슈테판카와 함께 동분서주 프라하와 베를린을 오가며 얻은 결과물을 드디어 다음 주 세상에 내놓는다. "회사 일을 그만둔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사람들이 요즘 뭐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매 번 설명을 해야 하는 게 불편했어. 그리고 준비 과정에서 엎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 내 스스로의 확신이 흔들린 적도 여러 번이었지. 그래도 좋은 파트너를 만나 여기까지 와서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 앙카는 먼저 프라하 시장에 뛰어들기로 했다. 이미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대학 친구들을 통해 유익한 시장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또 베를린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베를린의 포토그래퍼, 그래픽 디자이너 등과 일을 하면서 이 두 도시를 잇는 것에도 열심이다. "첫 시도에 대한 부담이 덜 하니까 프라하를 먼저 택했어. 그렇게 어느 정도 브랜드가 자리 잡으면 조만간 베를린 시장을 뚫을 거야. 4년 동안 이 도시에 머물면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일 해야 하는지 배웠으니까!"


앙카가 디자인한 양말 컬렉션의 첫 번째 테마는, 다름 아닌 식물이다. "어릴 적, 허바리움(herbarium)이라고 불리는 식물도감을 직접 만들곤 했었거든. 꽃과 풀을 바로 책 위에 붙이기도 하고, 아님 수채화로 그리기도 하고. 어느 날 조카랑 놀다가 영감을 얻었어. 우리가 구축하고자 하는 '캠핑'의 브랜드 이미지랑도 매우 잘 맞는 것 같아."

캠핑의 '허바리움' 컬렉션 @ 출처_ 캠핑 홈페이지


느리게 '캠핑'

'캠핑'을 론칭하기 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우리 또한 앙카의 소식을 들으며 도대체 양말이 세상에 나오기는 하는 걸까, 의심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녀만은 늘 느긋해 보였다. "삶에서 너무 빠르게 뭔가를 하는 건 좋지 않은 거 같아. 회사에서 바쁘게 일 하면서 배운 건, 내 삶에서 딱 두 가지만은 지키자는 거였어. 첫 번째는 즐기자! 그리고 일하는 과정에서 절대 무너지지 말자! 여전히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있고, 힘든 시간도 찾아 오지만 드디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요즘이야. 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절대 서두르지 않는 거지."


진정 자신이 하는 일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앙카를 보니, 우리 또한 생각이 많아지는 인터뷰였다. 앙카를 버스 정류장으로 떠나보내고 우리는 대뜸 각자의 양말을 살피기 시작했다. 별 거 없었다. 모두들 추운 발을 싸매는 용도의 시커먼 양말을 신고 있었다. 그때 한창 게임회사의 인턴 일로 근심이 많던 수민 왈 "절대 없으면 안 되는 이 양말을, 왜 우리는 몰라봤을까. 정작 이렇게 소중한 것을 소중히 다루지 못 하네. 남 얘기도 좋지만, 내 얘기도 좀 듣고 살아야겠다!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진정 원하는 것 말이야."

명랑한 앙카!


매거진의 이전글 12_베를리너_아나바다_빵집 알바생/아티스트_타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