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색_20241115
어린 시절, 초등학생 때까지의 나는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절의 기억은 어딘가 흐릿한 회색 빛 같다. 그렇다고 불행했다 거나, 특별히 슬펐던 것도 아니지만, 유난히 재미있었거나 특별히 반짝이던 일상이었던 것 같지도 않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들어서며 공부를 잘했다는 사실은 기억나지만, 그때의 나는 비교하거나 깊게 생각할 만큼 인지가 자라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도 내 삶에서 공부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공부가 나의 ‘무기’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고, 그 덕분에 나는 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아이였다. 많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한 명쯤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와 깊은 우정을 쌓아간다는 확신도 있었다. 열심히만 하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던 시기였다. 물론 공부가 어렵거나, 친구 문제로 마음이 힘들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사건들이 있었기에 학창 시절이 심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시기의 나는 핑크 빛 희망과 10대 만의 풋풋한 민트 빛이 가득했다.
대학생이 되어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혼자 살아보니,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내 안의 어두운 부분, 부정적인 감정들을 처음으로 선명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자신 있던 공부는 더 이상 ‘무기’가 되지 않았고, 가볍게만 여기던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으며, 친구가 곁에 있어도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롭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막막하고 두려운 일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나는 누구고, 어디서에서 무엇을 하고 살고 싶은 가를 깊이 생각하던 그 시기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짙은 보라색을 띠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을 준비하던 짧은 1-2년은 따뜻한 크림색처럼 가장 안정적이고 따뜻했던 시간이었다. 불안정한 시기를 지나며 ‘안정적인 가정’을 간절히 바랐던 만큼,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남편과 있으니 내 마음의 불안도 많이 줄어들었다. 혼자라고 느끼던 세상에서, 이 사람과 함께라면 든든하고 편안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임신, 출산, 육아가 시작되면서 또 다른 깊은 남색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예상은 번번이 빗나갔으며, 원하는 만큼 해내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당연히 모든 것이 부족해 보였고, 마음에 차지 않았고, 몸도 마음도 지쳐 여유가 부족했던 시기였다. 나에게도 여유가 없었지만, 특히 남편과 아이에게는 더욱 여유가 없었던 시간이었다.
지금은 그런 시기를 지나 우리 가족의 삶에도 조금씩 밝고 따뜻한 노란빛이 스며들고 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며 서로 조율 가능한 부분이 생겼고, 시간적 여유도 조금씩 생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들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결혼 10년 차를 지나며 남편과도 서로 이해하는 지점이 조금씩 넓어지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고마움을 느끼는 날도 있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우리 가족의 ‘합’을 맞추는 시간이 시작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했고 사회적으로는 커리어 20년 차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완전한 ‘어른’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어린것 같다. 생각할 때도 배려보다 내가 먼저일 때가 있고, 욕심이 앞서서 조급 해지는 순간도 있다. 마흔이 넘으면 자연스레 지혜롭고 단단한 어른이 될 줄 알았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이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요즘은 기대 수명이 길어져서 인지 사람들이 예전보다 천천히 나이를 먹는 느낌이 든다는 것. 앞으로 조금씩 더 차분하고 성숙하게 나만의 빛을 다듬어 가는 어른으로 자라고 싶다.
지금 살아온 만큼의 시간을 또 살아낸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색을 띠고 있을까? 삶의 여러 경험들을 통과하며 조금 더 원숙 해지고, 조바심보다는 여유가, 두려움보다는 단단함이 더 많아지고, 세상의 흐름을 조금 더 이해하며,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할 줄 알고, 마음의 중심이 잘 잡힌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게 나는 지금보다 더 깊고 넓어지며 따뜻한 황금빛을 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삶이 건네는 색들을 하나씩 겹겹이 쌓아가며, 나는 계속 변화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