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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rvis Sep 29. 2019

인간은 왜 답을 찾는가. 그전에, 답이 존재하는가?

SF영화 <애드 아스트라>를 보고

필자는 <애드 아스트라>를 너무나 재미있고 인상 깊게 관람한 사람 중 한 명이다. 필자의 의견이 정답은 아니지만 이 영화를 재밌게 본 사람으로서 영화를 아직 보지 않고 이 글에 들어온 분들이 있다면 팁을 드리고 싶다. 스토리에 중점을 두고 보면 안 된다. 스토리는 엄청나게 간단하다. 예고편과 여러 사이트에 간단하게 나와 있는 줄거리가 진짜 전부이다. 그 줄거리를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통해 풀어내기 때문에 스토리에만 집중하면 매우 지루해질 수 있다. 중간중간 우주에 대한 시각적인 표현들이 황홀하긴 하지만 지루함을 날릴 만큼 역동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인 로이의 내면에 최대한 깊게 들어가야 한다. 여타 영화들처럼 관객의 시점에서 스토리의 전개나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 오는 짜릿함을 즐기기보다 최대한 로이의 시점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그의 감정에 공감해야 한다. 상황이 전환될 때마다 나오는 그의 독백과 심리상태에 대한 자세한 묘사들로 짐작컨데 영화는 그걸 바라고 있다.


---------------------------------------------------스포일러 방지선-----------------------------------------------------


"Why go on?(왜 계속 나아가지?)"  "Why keep trying?(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후반부에 한바탕 긴박한 상황이 휘몰아친 후 엄습한 정적 속에서 흘러나온 주인공 로이(브레드 피트)의 독백이다. 온갖 고생을 하며 지구에서 해왕성까지 자신을 찾으러 온 아들의 질문에 클리포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떠나간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인 로이는 물론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로이가 무엇을 위해 여행을 한 것인지, 애초에 그 '무엇'이란 게 있기는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이것이 영화의 주제이다.                                                                                              

영화를 보면, 로이가 임무를 수행하는 중간에 심리검사를 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이 심리검사는 단순히 우주비행사들의 복지를 위한 게 아니라 그들이 임무를 지속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인공지능이 검사자의 검사 결과를 승인하지 않으면 정상 상태로 돌아올 때까지 임무에서 배제된다. 극한 상황의 연속인 우주 비행 임무에서 심리검사를 매번 통과하는 건 쉽지 않을 듯하다. 외로움, 소중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불안감 등의 다양한 감정들이 당사자를 언제나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로이는 심리검사를 매번 통과한 걸로도 모자라 모든 검사에서 심박수 80 이하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우수한 비행사이다. 그의 그런 비정상적인 평온함은 어디서 온 걸까.


영화 초반부에 "나는 늘 남의 시선에서 나를 본다."라는 로이의 독백이 나온다. 어떻게 해석할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필자는 로이 자신의 삶이 본인의 마음속에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로이의 아버지 클리포드는 우주 탐사 관련 프로젝트 중 최초로 해왕성에 전초 기지를 세워 태양계 전역을 탐사하고 지적 생명체를 찾는다는 취지의 거대 프로젝트인 '리마 프로젝트'의 주역이었다. 로이는 평생 그런 아버지를 영웅이라 믿으며 최고의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해 살아왔다. 타인과의 정상적인 감정적 교류는 있을 수 없었다. 우주비행사라는 위험한 삶에 누군가를 끌어들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고, 남편의 그런 점을 견디지 못하여 이브는 그를 떠나갔다. 그녀와의 기억이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지기는 했으나 그다지 신경 쓰이는 문제는 아니었다. 우주비행 협회에서 신임받는 자신의 지위, 최고의 우주 비행사로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지적 생명체를 찾아낸다는 그의 확고한 목표 등이 더 중요했다. 그가 믿는 모든 것, 삶의 모든 것이 외부에 있었다. 즉, 내부에 아무것도 없으니 흔들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변한다. 리마 프로젝트 도중 사망했다고 알고 있었던 클리포드가 살아있었다. 그리고 써지 현상의 원인이 클리포드가 주도한 리마 프로젝트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분명 나의 아버지는 영웅이었는데 뭔가 잘못됐다. 게다가 프루이트 대령이 로이와 헤어지기 전 그에게 건넨 파일의 내용과 화성 기지에서 란토스 소장이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더 충격적이었다. 클리포드와 함께 해왕성으로 갔던 대원들이 임무 도중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고통을 호소하자 클리포드는 임무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그들을 다 죽였다. 클리포드는 리마 프로젝트로 인해 써지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임무에 대한 병적인 책임감 때문에 프로젝트를 지속하고 있다. 즉, 그의 존재 자체가 제거해야만 하는 인류의 위협이다.

로이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이 아버지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임무에 집중한다. 하지만 협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로이는 더 이상 신임하는 대원이 아니라 클리포드의 아들이라는 명목 하에 리마 프로젝트와 그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들은 로이가 감정에 휩쓸려 아버지를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애초에 임무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부터 협회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클리포드가 살아있고 정신적으로 이상해졌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사람들이 협회가 실패했음을 알게 될까 두려워 그 사실을 은폐했다. 로이의 삶을 지탱하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 그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졌다.     

영화가 전반에 걸친 로이의 많은 독백들의 주된 맥락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것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개인적인 느낌들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일단 해왕성으로 가긴 가고 있다. 다른 문제들은 다 차치하더라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기 위해 써지를 막아야 하니 누군가 해왕성으로 가기는 가야 한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까지 돼야 할 일인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을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이 희생되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개인적인 삶은 물론이요, 클리포드와 함께 떠났던 대원들부터 시작해서 프루이트 대령과 세피우스의 유능한 대원들까지. 이렇게 많은 것들의 희생되어야 할 만큼 나의 존재와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는 것이었나?'

결국 세피우스의 대원들까지 모두 죽이고 해왕성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그가 느끼는 감정은 극도의 허무(無)함이고 그것은 일종의 허무주의(nihilism)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그 목표를 위한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 목표란 수능과 같은 시험이 될 수도 있고 취업, 결혼이나 특정한 직업이 될 수도 있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나 부자가 되는 것과 같은 보다 형이상학적인 형태가 될 수도 있다. 목표를 이뤘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가치나 의미가 확실할수록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마음은 단단해진다. 하지만 그 가치나 의미가 불확실하거나 과정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수록 인간은 불안정해진다. 인간관계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취미생활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양심과 같은 도덕적인 마음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 정도가 심해질수록 인간은 허무해지고 고독해진다. 쉽게 말해, 다 부질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로이는 화성에서 해왕성으로 향하는 70일이 넘는 기간 동안 철저하게 혼자서 이런 감정들을 느꼈을 듯하다. 그리고 해왕성에 도착한 그는 이전의 그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전의 로이와 클리포드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왕성에 도착한 로이와 몇십 년 동안 거기 머물고 있던 클리포드는 서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로이는 해왕성까지의 여정을 통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어쩌면 자신도 정확히 몰랐을 무언가로 인해 자신의 감정, 자아, 삶을 버리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장 자신의 옆에 있어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행복한 경험 그리고 거기서 오는 감정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써지를 막기 위해 리마 프로젝트에 폭탄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그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한다.

개인적으로 여기서 클리포드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로이가 뭐라고 하든지 자신은 지적 생명체를 찾는 여정을 계속할 것이라는 주장을 피력한다. 그는 진심으로 그것이 우주가 인간에게 준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런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흥미롭게도 필자는 클리포드의 주장에 일부 공감을 했다. 영화에서는 지적 생명체라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진리에 대한 갈망, 더 넓은 세계에 대한 호기심,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 등은 인류가 만들어낸 찬란한 문명의 원동력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해, 인류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클리포드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로이가 아버지를 만나기 전 선체 내부를 돌아보는 장면으로 짐작컨데 클리포드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다. 위에서 언급한 욕구가 너무 컸던 탓에 그것이 살인, 분노, 정신병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듯하다. 하지만 또 하나 확실한 사실은 어떠한 답, 진리에 대한 클리포드의 욕구 또한 로이가 깨달은 현실의 행복, 감정에 대한 욕구처럼 인간에게 본능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행동은 나쁨, 악함 등의 이분법적인 논리로 정의할 수 없는 것 같다.


로이는 클리포드에게 계속 함께 집에 가자고 설득하기는 하지만 그의 주장에 뚜렷하게 반박하지 못한다. 그 후 순순히 로이를 따라 세피우스로 가는 것처럼 보이던 클리포드는 결국 다시 탈출을 시도한다. 로이는 그런 아버지를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한참 몸싸움을 하던 도중 클리포드는 아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보내 달라고.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은 결국 그의 손을 놓는다. 클리포드는 그렇게 아들과 인류를 버리고 저 먼 우주를 향해 떠나갔다. 로이가 아버지의 손을 놓는 행위는 그를 죽이려는 것보다는 정말로 보내주는 것처럼 보였다. 한 때 로이도 클리포드의 생각과 행동에 동의하며 그의 가치관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 가치관을 바꾸지 않는 아버지가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로이는 아버지의 생각을 존중하고 계속 당신이 믿고 있는 길을 가라는 의미에서 그를 놓아준 것처럼 보인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어떠한 답이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답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본인이 어느 쪽을 믿는지와 그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가 아닐까.    

지구에서 해왕성까지의 거리는 약 40억 km이다. 숫자만 봐서는 와 닿지 않을 만큼 엄청 멀다. 제목 그 자체가 '별을 향해서'라는 뜻을 가진 영화 <애드 아스트라>가 보여주는 것주인공이 이토록 머나먼 거리를 여행하는 모습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고독한, 어찌 보면 비합리적이고 허무하기까지 한 내면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최소 한 번은 하게 될 고민들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클리포드가 틀리고 로이가 옳다는 단순한 결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 더 맞다고 판단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인간이 살면서 하게 될 필연적인 고민을 단순히 일시적인 고민으로 치부하지 말고 좀 더 깊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게 아닐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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