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남긴 학살, 영화가 선택한 거리
전쟁을 다룬 영화는 대체로 관객에게 묻는다.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보았는가, 그 참혹함을 끝까지 견딜 수 있는가. 그러나 영화 ‘난징사진관’은 이 익숙한 질문을 비껴간다. 이 작품은 난징학살이라는 이미 충분히 알려진 비극을 다시 재현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사진처럼, 그 사건을 증언하는 방식을 택한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오래 남게 하는 거리, 이 영화가 선택한 태도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시선의 유지다. 살육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충격을 극대화하는 대신, 사진과 사진관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건이 어떻게 기록되고 남겨졌는지를 응시하게 만든다. 관객은 피해자의 자리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가해자의 시선에 머물지도 않는다. 대신 끝까지 외면할 수 없는 목격자의 위치에 놓인다. 이 절제된 거리감이야말로 ‘난징사진관’을 단순한 역사 재현 영화가 아니라, 기록의 윤리를 묻는 작품으로 만든다.
사진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남겨진 이미지는 쉽게 부정되지 않는다. 영화는 이 사진의 속성을 그대로 차용한다. 난징에서 벌어진 참극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남겨진 것처럼 제시하는 방식’. 이 선택은 관객으로 하여금 고통을 소비하는 대신, 기억 앞에 서도록 만든다. 영화가 선택한 이 거리는 무심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강한 잔상을 남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난징학살은 1937년 12월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이후 약 6주간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당시 일본군은 무장 해제된 중국군 포로뿐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살해, 성폭력,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희생자 수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수십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는 국제적으로 부정되지 않는다.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기록이었다. 외국인 선교사와 외교관, 기자들이 남긴 사진과 문서들은 전쟁 중에도, 그리고 전후 전범 재판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했다. 난징학살은 단지 ‘소문’이나 ‘증언’으로만 남지 않았다. 사진이라는 물리적 기록을 통해, 부정하기 어려운 형태로 세계에 전달됐다.
‘난징사진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가 사진과 사진관을 중심 장치로 삼는 이유는 단순한 상징 때문이 아니다. 난징학살은 기록을 통해 기억된 사건이었고, 사진은 그 기억을 지탱한 핵심 매체였다. 영화는 학살의 규모를 설명하는 대신, 그 기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좇는다. 총과 칼이 아니라, 필름과 현상액이 놓인 자리에서 역사가 어떻게 남겨졌는지를 묻는 것이다.
‘난징사진관’에서 사진관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영화 속 사진관은 살육이 벌어지는 거리와 분리된 공간이면서도, 그 폭력이 가장 밀도 높게 응축되는 장소다. 총성과 비명이 직접 들리지 않는 대신, 필름과 인화지 위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감독은 이 밀실을 통해 난징학살을 ‘밖에서 안으로’ 끌어들인다. 전쟁의 광기는 문을 닫은 사진관 안에서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침투하며,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씩 잠식한다. 이 사진관에 모인 인물들은 특정한 계층이나 지역을 대표하지 않는다. 각기 다른 방언을 쓰고, 다른 사연을 지닌 이들은 전쟁 이전이라면 결코 한 공간에 모이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영화는 이 차이를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통일되지 않은 언어, 엇갈리는 억양은 이 공간이 특정 집단의 은신처가 아니라, 중국 사회 전체를 압축한 축소판임을 암시한다. 사진관은 영웅의 본거지도, 저항 조직의 거점도 아니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 몸을 숨긴 평범한 사람들의 임시 거처일 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사진관은 영화의 윤리를 규정한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선택들은 대의나 이념의 결과가 아니다. 누구도 처음부터 ‘기록자가 되겠다’고 결심하지 않는다. 다만 눈앞에 드러난 이미지를 외면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태도가, 이들을 점점 기록의 편으로 이동시킨다. 영화는 이 과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사진관이라는 제한된 공간은 인물들의 선택을 영웅적으로 부풀리지 않으면서도, 그 선택이 갖는 무게를 또렷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중심 인물인 아창은 처음부터 정의로운 선택을 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난징이 함락된 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진 현상 기술자인 척 연기한다. 일본군 종군 기자의 필름을 인화해주며 목숨을 부지하는 그의 모습은 불편하다. 피해자의 자리에서 가해자의 기록을 돕는 이중적 위치, 그것은 영웅적 결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영화는 이 선택을 도덕적으로 단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상황 자체가 전쟁이 평범한 개인에게 강요하는 조건임을 담담히 보여준다. 아창의 전환점은 어떤 신념의 선언이나 대의의 자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가 마주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이미지다. 현상액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학살의 흔적들, 피사체가 된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그를 압도한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설명을 최소화한다. 공포와 분노는 대사로 전달되지 않고, 이미지를 바라보는 인물의 정지된 시선 속에서 관객에게 전이된다. 윤리는 여기서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목격이 강제로 만들어낸 반응으로 등장한다.
중요한 점은 아창이 끝까지 ‘완성된 인물’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흔들린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분명히 이동한다. 더 이상 그는 가해자의 기록을 무심히 재현하는 기술자가 아니다. 어떤 이미지가 남아야 하고, 어떤 기록이 사라지지 말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매개자로 변한다. 영화는 이 변화를 영웅화하지 않음으로써, 기록의 윤리가 특별한 소수의 신념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에게도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셔터 소리와 총성을 교차시킨다. 사진을 찍는 행위와 총을 쏘는 행위가 동일한 단어로 겹쳐지는 순간, 영화는 카메라가 결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님을 드러낸다. 난징에서 사진은 처음부터 기록의 수단이 아니었다. 일본군에게 카메라는 전공을 과시하고 승리를 증명하는 도구였고, 살육의 현장을 장식하는 또 하나의 무기였다. 찍는 행위는 바라봄이 아니라 지배의 연장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진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같은 필름이라도 누가 소유하고, 누가 남기며, 어떤 맥락에서 유통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가해자의 손에 있을 때 사진은 폭력의 연장이지만, 아창의 손을 거치면서 그것은 지워질 수 없는 증거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사진 그 자체의 윤리 때문이 아니라, 기록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사진이 선하거나 정의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사진이 권력과 결합할 때 얼마나 쉽게 폭력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그 결합을 끊어내는 순간 어떤 가능성이 열리는지를 제시한다.
이 지점에서 ‘난징사진관’은 카메라를 이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사진이 가진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한 상태에서, 그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에 주목한다. 셔터는 총과 닮아 있지만, 결과는 다르다. 총은 즉각적인 죽음을 남기고, 사진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영화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시간성이다. 사진은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지만, 훗날 부정할 수 없는 증언으로 작동한다. 이 지연된 힘이야말로 영화가 사진을 ‘무기’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난징사진관’에서 저항은 어떤 선언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명령도 없고, 지도자도 없다. 사진관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을 위해 몸을 숨긴 소시민들일 뿐이며, 처음부터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 느슨한 집합이 어떻게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해 가는지를 조용히 따라간다. 그 중심에는 “이것을 지우지 말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 총을 들지 않아도, 조직을 만들지 않아도, 기록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만으로도 연대가 형성될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이 연대의 특징은 감정적 고양이나 영웅적 희생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끝까지 두려워하고, 서로를 의심하며, 때로는 물러서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록을 지키려 하는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는 자신이 본 것이 거짓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죽음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는 이러한 동기를 고결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도 현실적인 동기로 제시함으로써, 기록의 윤리가 일상의 감정과 얼마나 가까운지 드러낸다.
아창이 필름을 숨기고 옮기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선택을 반복할 뿐이다. 이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서, 사진관은 단순한 은신처를 넘어 증언의 공동체로 변한다.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역사는 소수의 결단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있을 때, 기록은 살아남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난징사진관’은 마침내 가장 직접적인 감정의 층위에 닿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도 영화는 학살 장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화면 위에 놓이는 것은 난징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다. 웃고, 걷고, 아이를 안고 있던 얼굴들. 그 이미지들은 곧바로 일본군의 만행을 암시하는 장면들과 교차되며 배치된다. 이 교차는 잔혹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파괴된 삶의 무게를 역으로 증명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 연출의 효과는 명확하다. 관객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를 계산하기보다, ‘어떤 삶이 사라졌는가’를 보게 된다. 숫자로 환원된 희생자가 아니라, 고유한 일상을 살았던 개인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미지로 복원된다. 영화는 고통을 확대하지 않으면서도, 상실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이것은 폭력의 재현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예우에 가깝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사진은 죽음을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죽음 이전의 삶을 통해 파괴의 규모를 드러낼 수 있다. ‘난징사진관’은 바로 이 방식으로 관객의 감각을 건드린다. 학살의 현장을 보았다는 충격보다, 그 이전의 평온함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오래 남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잔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화 후반부에서 사진관 주인이 아이를 먼저 피신시키는 과정에서, 사진관 배경지를 펼쳐 보이는 장면은 ‘난징사진관’이 도달한 가장 명확한 윤리적 선언에 가깝다. 사진관에서 늘 사용되던 그 배경지는 본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풍경이었다. 중국의 명소를 그려 넣은 종이 배경은 사진 속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으며, 실제의 자연이나 땅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가 무너지는 순간, 그 가짜 풍경은 실재하는 조국을 대신하는 이미지로 전환된다. 이 장면이 강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주인이 선택한 언어가 거창한 구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외치지 않는다. 대신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는 말로, 너무도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애착을 드러낸다. 이 표현은 정치적 선언이기보다, 상실 직전에 튀어나오는 가장 솔직한 감정에 가깝다. 영화는 이 순간을 통해 조국이란 개념이 영토나 제도가 아니라, 기억과 이미지로 남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한국 관객에게 특히 강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나라를 잃었던 경험은 중국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 속 배경지가 조국을 대신하는 장면은, 교과서 속 역사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일제강점기의 감각을 환기한다.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끝내 지키려 했던 것은 눈에 보이는 영토가 아니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삶의 이미지였다. ‘난징사진관’은 이 공통의 역사적 감각을 자극하면서도, 비교를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도록 허용할 뿐이다.
‘난징사진관’을 둘러싼 평가에서 빠지지 않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비극을 다룬 성찰적 작품인가, 아니면 국가 서사를 강화하는 애국주의 영화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이 영화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분명한 사실은 이 작품이 난징학살을 중국의 집단 기억 속에 위치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해와 피해의 구도는 명확하며, 그 윤리적 판단 역시 흐릿하지 않다. 그러나 ‘난징사진관’이 상대적으로 다른 지점에 서는 이유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는 분노를 직접 호소하거나 집단 감정을 선동하는 대신, 기록의 과정을 따라간다. 학살의 전모를 재현하기보다, 그것이 어떻게 사진으로 남겨지고, 어떻게 지켜졌는지를 보여준다. 이 선택은 국가 서사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지는 않지만,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는다. 영화의 중심에는 끝까지 ‘누가 기억을 남겼는가’라는 질문이 놓인다.
이 지점에서 ‘난징사진관’은 선전영화라는 단순한 규정에서 벗어난다. 영화가 요구하는 것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기록과 증언 앞에서의 태도다. 물론 이 작품이 완전히 중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폭력을 소비하지 않으려는 거리 두기, 그리고 영웅이 아닌 소시민을 증언의 주체로 세우는 선택은 이 영화를 단순한 애국주의 서사로 환원하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의 설득력은 바로 이 절제된 태도에서 나온다.
‘난징사진관’이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분명하다. 이 영화는 학살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했는가로 평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방식으로 기억을 남길 것인가를 묻는다. 사진처럼 남긴다는 선택은 관객에게 즉각적인 충격을 주는 대신, 쉽게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긴다. 영화가 선택한 거리는 차갑게 느껴질 수 있지만, 바로 그 거리 덕분에 기억은 감정의 소모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로 전환된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기록의 윤리는 거창하지 않다. 영웅적 희생도, 거대한 선언도 없다. 살아남기 위해 연기했던 인물들이, 자신이 본 것을 지우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태도에 도달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사진관에 모인 평범한 사람들, 끝까지 두려워하면서도 기록을 포기하지 않았던 소시민들의 선택은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조용히 증명한다. 기억은 특별한 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남기기를 포기하지 않은 다수의 손을 거쳐 살아남는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사진과 영상이 즉각적으로 소비되고, 빠르게 잊힌다. 이런 시대에 ‘난징사진관’이 던지는 질문은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남긴다는 선택 앞에서 우리는 어떤 거리를 취할 것인가. 이 영화는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한 장의 사진처럼, 외면할 수 없는 질문을 남겨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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