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대홍수」(The Great Flood)

모성을 실험한 영화 – 아이를 만들었으니, 이제 엄마를 만들어야 했다

by 민초매니아

왜 「대홍수」는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는가


넷플릭스 영화 「대홍수」는 공개 직후부터 묘한 반응을 불러왔다. 같은 영화를 두고도 어떤 리뷰는 ‘야심찬 SF 재난물’이라 평했고, 어떤 평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기 어렵다’고 혹평했다. 줄거리를 요약한 기사들조차 서로 다른 내용을 전했고, 관객 사이에서는 “결국 무슨 영화였느냐”는 질문이 반복됐다. 이 혼란은 단순히 서사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정보의 방식 자체가 통상적인 영화 문법과 어긋나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대홍수」는 친절한 설명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세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인물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지금 벌어지는 사건이 ‘현실’인지 ‘가정’인지조차 영화는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은 주인공 구안나의 시점에 밀착한 채, 재난 한복판에 던져진다. 이때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 영화를 ‘재난 상황 속에서 엄마와 아이가 살아남는 이야기’로 이해하게 된다. 문제는 영화가 이 오해를 바로잡지 않은 채 상당 부분을 진행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대홍수」는 장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관객을 불안정한 상태에 놓는다. 재난 영화의 긴장감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설명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SF적 전환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서사의 방향이 지나치게 늦게 드러난다. 이 영화가 불친절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관객이 이해를 시도하는 모든 지점에서 영화가 한 박자씩 비켜 서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 재난 영화로 위장된 서사


영화의 시작은 극도로 현실적이다. 기록적인 폭우, 관리사무소의 침수 안내 방송, 엘리베이터 정지, 계단으로 몰려드는 주민들, 아이를 업고 대피하는 부모들의 얼굴까지, 「대홍수」의 초반부는 한국형 재난 영화가 구축해온 익숙한 풍경을 충실히 따른다. 배경을 서울의 아파트로 한정한 선택 역시 현실감을 강화한다. 관객은 이 공간이 낯설지 않기 때문에, 설명이 부족해도 상황을 빠르게 이해한다고 느낀다. 이 구간에서 영화의 중심은 분명하다. 인공지능 연구원 구안나는 여섯 살 아들 지안을 데리고 침수되는 아파트를 빠져나가야 한다. 구조 인력보안팀 소속 손희조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구조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확보한다. 손희조는 단순한 구조요원이 아니라, 구안나를 특정해 찾아온 인물로 제시된다. 이 설정은 관객에게 이 영화가 단순한 우연의 재난이 아니라, 어떤 ‘배경 사정’을 가진 이야기일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준다. 그러나 이 기대는 설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손희조의 임무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다시 재난의 현장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이를 놓칠 위기, 물에 잠긴 복도, 숨을 참고 이동해야 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며, 관객의 관심은 다시 생존 여부에 묶인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 영화를 ‘극한 상황에서 모성을 시험하는 재난 서사’로 받아들이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해석이 틀렸다는 사실을 영화가 즉시 수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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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의 신호들: 이미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재난 서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영화는 반복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장면과 대사를 삽입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아이 지안의 말이다. 지안은 자신이 “왜 계속 여섯 살이냐”고 묻고, 어제도 여섯 살이었고, 그 전날도 여섯 살이었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현실적인 설정으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영화는 이를 이상 현상으로 규정하거나 해명하지 않는다. 아이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지안은 엄마가 자신을 놓칠 상황을 미리 예측하듯 행동하고, 반복적으로 숨어든다. 그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존재처럼 움직인다. 관객은 이 장면들을 ‘아이의 불안’이나 ‘트라우마적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영화는 그 해석을 확정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대홍수」는 이미 재난 영화의 외피를 벗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관객에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영화는 세계관의 진실을 드러내는 대신, 관객이 주인공과 동일한 혼란 상태에 머물도록 유도한다. 구안나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선택을 강요받듯, 관객 역시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이 구조는 이후 드러나는 SF적 설정과 결합되며, 이 영화가 왜 끝까지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


인류는 이미 끝났다: 이사벨라 랩과 재건 프로젝트의 실체


영화의 중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비로소 자신이 보고 있던 재난이 어떤 세계의 일부였는지를 알게 된다. 「대홍수」에서 대홍수는 아직 닥쳐올 재난이 아니라, 이미 인류를 사실상 멸종시킨 사건이다. 폭우와 침수로 묘사되던 상황은 국지적 재난이 아니라, 소행성 충돌과 남극 빙하 붕괴로 촉발된 전 지구적 멸망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지상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생명체는 이미 사라졌고, 관객이 따라가던 인물들 역시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가 아니라, 선별된 자원에 가까운 존재였다. 이 설정은 이사벨라 랩이라는 공간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사벨라 랩은 대기권 밖에 위치한 연구 시설로, 인류 재건을 위해 극소수의 인력만이 대피한 장소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인류의 생존을 집단적 서사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 사회, 공동체의 재건 같은 서사는 철저히 배제되고, 이야기는 오직 ‘최소 단위의 인류’를 만드는 문제로 수렴된다. 그것은 한 쌍의 인간, 더 정확히는 엄마와 아이다.


이 지점에서 「대홍수」는 일반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와 결을 달리한다. 대부분의 종말 영화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묻는다면, 이 영화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를 먼저 묻는다. 이사벨라 랩은 기술의 집약체이지만, 동시에 기술이 한계에 봉착한 장소다. 신체, 지능, 번식 능력까지는 이미 복제 기술로 구현할 수 있지만,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마지막 요소, 즉 감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설정하는 인류 멸종 이후의 세계는 차갑다. 생존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로 다뤄진다.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재현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그리고 그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영화가 선택한 것은 이성이나 윤리가 아니라, 감정, 그중에서도 특정한 감정이다.


아이는 완성됐고, 이제 엄마를 만들어야 했다


「대홍수」의 SF적 핵심은 복제 인간이라는 설정 그 자체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복제 인간은 이미 완성 단계에 있다. 아이 지안, 코드명 뉴맨-77은 사람과 구분되지 않는 신체와 지능을 갖추었고, 학습과 성장 또한 가능하다. 문제는 이 아이가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조건을 아이 내부가 아니라, 아이를 둘러싼 관계에서 찾는다. 다윈센터가 실패했다고 판단한 지점은 분명하다. 복제 인간에게 감정을 심는 기술, 이모션 엔진은 단순히 프로그램을 삽입하는 방식으로는 작동하지 않았다. 감정은 학습될 수 있지만, 특정 감정은 관계 속에서만 형성된다. 이때 영화가 주목하는 감정이 바로 모성이다. 아이를 보호하고,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아이를 잃어도 포기하지 않는 감정. 영화는 이 감정을 인간성을 구성하는 최종 조건으로 설정한다. 그래서 다윈센터의 결론은 역설적이다. 아이는 이미 완성되었으니, 이제 만들어야 할 것은 엄마다. 이 엄마는 반드시 생물학적 엄마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역할과 선택이다. 아이를 지켜내는 존재로서의 엄마, 그리고 아이를 잃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찾으려는 존재로서의 엄마가 필요하다. 이 실험의 실험체로 선택된 인물이 바로 구안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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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나가 자발적으로 실험체가 되기로 결정하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잔인한 선택의 순간이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유지한 채, 반복되는 시뮬레이션 속으로 들어간다. 그 시뮬레이션이 바로 관객이 처음부터 따라가던 홍수와 대피, 이별과 탐색의 이야기다. 관객은 이 지점에서 비로소 자신이 본 영화의 대부분이 현실이 아니라, 모성을 검증하기 위한 반복 실험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설정은 영화의 모든 불친절함을 설명한다. 반복되는 장면, 설명되지 않는 대사, 아이의 예측적인 행동, 엄마와 아이의 잦은 이별은 모두 우연이 아니라 실험 설계의 일부다. 실험은 하나의 질문을 향해 설계된다. 이 엄마는 아이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찾을 것인가. 실패하면 처음으로 돌아가고, 성공하면 인류는 존속한다. 이 단순하면서도 잔혹한 구조 속에서, 구안나는 수천 번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아이는 왜 매번 사라졌는가: 반복 서사가 말하는 모성의 조건


「대홍수」의 가장 잔혹한 설정은 반복 그 자체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 변하는 주체가 엄마와 아이 모두라는 점이다. 구안나는 매번 같은 홍수, 같은 아파트,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만, 아이 지안은 그렇지 않다. 자막 속 대사에서 드러나듯, 지안은 자신이 “왜 계속 여섯 살인지”를 묻고, 어제도 여섯 살이었고 그 전날도 여섯 살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는 아이가 단순한 실험 대상이 아니라, 반복을 기억하거나 최소한 체감하고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아이의 반복된 실종은 우연이 아니다. 지안은 처음에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사라지지만, 실험이 거듭될수록 의도적으로 숨는다. 그는 옷장 안에 들어가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며, 엄마가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장소와 찾지 못하는 장소를 구분한다. 이는 아이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선택하는 행동에 가깝다. 아이는 매번 엄마가 자신을 떠날 가능성을 감지하고, 그 선택을 시험하듯 사라진다.


이 반복 서사는 모성에 대한 영화의 냉정한 정의로 이어진다. 모성은 아이를 품에 안고 보호하는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아이를 잃은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는 지속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아이는 단 한 번도 완전히 버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는 ‘언젠가 버려질 것’이라는 가능성을 매번 경험한다. 그래서 그는 사라지고, 기다리고, 다시 발견되기를 요구한다. 아이의 실종은 엄마를 처벌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엄마의 선택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한 구조다. 이 지점에서 「대홍수」는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아이를 지키는 것과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구안나는 매번 아이를 살리려 애쓰지만, 동시에 인류 재건이라는 더 큰 명분 앞에서 흔들린다. 아이는 그 흔들림을 감지한다. 그래서 반복 속에서 아이는 점점 더 멀리 숨고, 더 오래 기다리며, 엄마가 끝까지 자신을 선택하는지를 시험한다. 이 실험은 감정적 보상이나 감동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은 이 과정이 얼마나 잔혹한지, 그리고 그 잔혹함이 의도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손희조라는 인물: 관찰자이자 관객의 대리인


손희조는 「대홍수」에서 가장 오해받기 쉬운 인물이다. 겉으로 그는 인력보안팀 소속의 구조 요원이며, 임무 수행을 위해 냉정하게 행동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손희조의 역할은 단순한 조력자나 방해자가 아니라, 이 실험을 ‘보는 사람’으로 확장된다. 그는 구안나와 지안의 관계를 끝까지 관찰하며, 그 결말을 확인하려는 인물이다. 손희조가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대사는 이 영화의 정서적 핵심을 대변한다. 그는 인간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이기심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끝까지 보고자 한다. 특히 그는 구안나가 결국 아이를 선택할지, 아니면 인류 재건이라는 명분에 굴복할지를 집요하게 지켜본다. 이 태도는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개인적인 기억과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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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에서 드러나듯, 손희조 역시 버려진 아이의 경험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두고 떠난 어머니를 기억하며, “사람이라는 게 원래 저렇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이 끝나는 날, 또 다른 엄마가 같은 선택을 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 확인이야말로 자신이 겪은 상처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때 손희조는 단순한 극중 인물이 아니라, 관객의 시선을 대리한다. 관객 역시 이 영화를 보며 같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과연 저 엄마는 다를 것인가, 아니면 결국 같을 것인가. 손희조가 끝내 구안나의 선택을 막지 않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개입자가 아니라 관찰자다. 그의 존재는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태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판단하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끝까지 보라는 것. 손희조가 지켜보는 것은 아이의 생존이 아니라, 모성이 끝내 증명되는 순간이다.


모성을 실험하는 영화가 남긴 불편함


「대홍수」에서 모성은 존중받는 감정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조건으로 다뤄진다. 영화는 묻지 않는다. “이 엄마는 무엇을 원했는가?” 대신 이렇게 묻는다. “이 엄마는 끝까지 버티는가?” 구안나는 실험체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그녀의 감정, 기억, 고통은 데이터가 된다. 실패하면 리셋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며, 수천 번 같은 고통을 반복한다. 이 구조에서 모성은 관계의 언어가 아니라 성능 지표가 된다. 아이를 끝까지 찾는지, 포기하지 않는지, 감정이 소멸되지 않는지를 측정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모성을 숭고한 감정으로 그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도구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결론은 분명하다. 인류를 우리답게 만든 것은 모성이었다. 하지만 이 명제는 질문을 하나 남긴다. 그렇다면, 모성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닌가? 영화는 이 질문을 직접 던지지 않지만, 서사 구조상 그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인류 재건의 핵심 조건이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감정’이라면, 그 감정을 수행하지 못한 존재는 탈락한다. 이 논리는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모성은 보편적 감정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개인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영화는 이 역할을 거의 전적으로 여성의 몸과 감정에 맡긴다. 구안나는 엄마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고, 손희조는 관찰자일 수 있지만 실험체는 아니다. 이 구조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모성을 여성의 본질처럼 고정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관객이 느끼는 불편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럼 이 영화는 이 불편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폭력적인 서사를 만든 걸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대홍수」는 이 불편함을 해결하지 않고 남겨두는 영화다. 구안나는 결국 실험체가 되기로 선택하지만, 그 선택은 승리도 구원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살리기 위한 결단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을 소진시키는 선택이다. 영화는 그 선택을 미화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고통, 아이의 상처, 엄마의 망각은 끝내 치유되지 않는다. 인류는 살아남지만, 그 대가는 명확히 제시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불편함은 실패의 신호라기보다, 윤리적 질문을 남기기 위한 전략에 가깝다.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이게 옳다.” 대신 관객에게 묻는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는 인류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모성을 실험하는 영화의 한계와 용기


「대홍수」가 남기는 가장 강한 인상은 감동보다 불편함이다. 그 불편함은 단순히 설명이 부족해서 생기는 혼란이 아니라, 영화가 선택한 질문의 방식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모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모성을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성을 시험하고, 반복하고, 실패시키며, 끝내 통과 여부를 판정한다. 이 방식은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한계는 모성이 지나치게 단일한 조건으로 설정된다는 점이다. 인류를 인류답게 만드는 감정으로 모성을 선택하는 순간, 그 감정을 수행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서사에서 배제된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질문은 발생한다.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감정을 가지지 못한 인간은 인간이 아닌가, 혹은 인류 재건의 자격이 없는가. 이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없고, 영화 역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한계는 이 실험이 거의 전적으로 여성의 몸과 감정 위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구안나는 실험체가 되고, 손희조는 관찰자가 된다. 모성은 여성의 역할로 고정되고, 남성 인물은 그 선택을 지켜보며 평가하는 위치에 놓인다. 이 구조는 의도와 무관하게 모성을 여성의 본질처럼 환원할 위험을 내포한다. 영화가 그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가 이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한 용기이기도 하다. 「대홍수」는 모성을 찬미하지 않는다. 숭고한 이미지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모성을 하나의 조건으로 밀어붙이며, 그 조건이 얼마나 잔혹한지, 얼마나 많은 반복과 상처를 요구하는지를 끝까지 보여준다. 영화는 관객이 이 실험을 불편하게 느끼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 불편함은 감독의 미숙함이 아니라, 질문을 남기기 위한 전략에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모성을 말하면서도 위로하지 않는다. 인류는 살아남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이 소모되고 어떤 기억이 반복적으로 파괴되는지는 끝내 복구되지 않는다. 「대홍수」는 생존을 긍정하지 않고, 생존의 대가를 남긴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안전한 윤리적 결론을 택하지 않는 대신, 불편한 질문을 관객에게 그대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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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살린 것은 기술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모션 엔진은 완성된다. 구안나와 지안의 기억은 이사벨라 랩으로 전송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복제 인간 모자가 만들어진다. 이 장면은 외형적으로는 희망처럼 보인다. 인류는 멸종되지 않았고, 지구로 돌아갈 가능성도 열렸다. 그러나 이 결말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살아남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희생되었는가다. 이 영화에서 살아남은 것은 신체나 기술이 아니라, 특정한 감정의 패턴이다.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감정, 반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선택의 기억. 그 감정은 수천 번의 실패와 고통을 거쳐서야 완성된다. 인류는 그렇게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 인류는 이미 이전의 인류와는 다른 존재다. 이 결말에서 「대홍수」는 명확한 선언을 하지 않는다. 이 선택이 옳았는지, 이 방식의 재건이 정당한지, 영화는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묻는다. 이런 방식으로 이어지는 인류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면 이 또한 또 다른 실패의 시작인가. 영화가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답을 주지 않고, 질문만 남기기 때문이다.


「대홍수」는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장르적 쾌감도, 감정적 해소도, 명확한 설명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관객에게 한 가지를 요구한다. 끝까지 보라는 것, 그리고 끝까지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요구는 부담스럽고, 때로는 불쾌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쉽게 사랑받기 어렵다. 그러나 동시에, 이 불친절함 덕분에 「대홍수」는 오래 남는 영화가 된다. 재난 영화로 시작해 SF로 전환되는 이 이야기는, 결국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그 질문의 방식은 문제적이고, 한계를 안고 있으며, 동시에 회피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준다.


아이를 만들었으니, 이제 엄마를 만들어야 했다는 이 영화의 선언은 찬사가 아니라 경고에 가깝다. 기술로는 대체할 수 없는 감정이 있으며, 그 감정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폭력과 불편함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숨기지 않는다. 「대홍수」는 그 불편함을 견딜 준비가 된 관객에게만 말을 거는 영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실패작이면서 동시에 문제작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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