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 리포트』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반응은 단순하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된다.” 이 문장은 이 작품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을 정확히 포착한다. 이 영화는 살인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동시에 살인을 저지른 인물을 손쉽게 악으로 밀어내는 선택도 거부한다. 그 대신 관객을 불편한 자리로 끌어낸다. “살인은 안 된다”는 명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문장 하나로 모든 질문이 종결되는지 되묻게 한다. 이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추상적인 윤리 토론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외면해온 현실을 정확히 건드리기 때문이다.
『살인자 리포트』가 공감을 얻는 이유는 연쇄살인이라는 극단적 설정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다루는 범죄의 유형과 그 이후의 세계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아동 학대, 학교폭력, 디지털 성범죄처럼 피해자의 삶을 장기간 훼손하는 범죄에서, 사회는 오랫동안 “처벌이 끝났으니 사건은 끝났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피해자의 시간은 그 시점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처벌은 끝났지만,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공포를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 이 작품은 이 불균형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살인자 리포트』의 가장 중요한 형식적 선택은 ‘수사’가 아니라 ‘인터뷰’다. 이 영화는 범인을 추적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범인도, 단서를 따라가는 형사도 없다. 대신 한 공간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질문하는 기자와 대답하는 살인범의 대화가 서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형식은 관객을 안전한 관람자의 위치에 머물게 두지 않는다. 인터뷰는 본질적으로 기록과 동의를 전제로 하는 행위다. 질문이 오가는 동안, 관객은 어느새 이 대화가 공개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존재가 된다. 영화는 이 지점을 통해 관객을 윤리적 방관자이자 공범의 경계에 세운다.
이 인터뷰는 정보를 얻기 위한 절차라기보다, 일종의 압박 장치에 가깝다. 이영훈은 숨지 않는다.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가 기록되기를 원한다. 이 태도는 그를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설명을 요구하는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설명을 허용하는 순간, 관객은 평가자가 된다. 문제는 이 평가가 쉬운 판단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영훈은 끝까지 ‘정의’나 ‘응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는 ‘치료’다. 이 선택은 의도적이며 계산되어 있다. 정의는 사회적 판단을 요구하지만, 치료는 결과를 묻는다. 실제로 상태가 나아졌는가, 통증이 줄어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불편한 전환을 요구한다. “그가 옳은가”가 아니라 “그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법은 처벌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도덕은 살인의 금기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삶이 여전히 무너진 상태라면, 그 근거는 충분한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영화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 질문을 반복적으로 되돌려준다. 질문은 화면 속 인물에게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관객에게 돌아온다.
이영훈이 자신을 정의의 집행자가 아니라 치료자로 규정하는 순간, 이 영화는 단순한 범죄 서사를 벗어난다. ‘치료’라는 언어는 본래 선한 의미를 내포한다. 고통을 줄이고, 상태를 호전시키는 행위. 이 단어가 살인과 결합될 때, 관객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정말로 그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는가. 정말로 그 이후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는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피해자들의 상태 변화가 암시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이 언어가 위험한 이유는 분명하다. 치료는 결과를 기준으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언어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 역시 분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피해자의 회복을 실질적으로 다루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살인자 리포트』는 이 공백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가시화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살인을 옹호하지 않으면서도, 살인을 전적으로 비현실적인 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 대신, 왜 이런 언어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이영훈이라는 인물은 계속해서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영훈의 논리는 자주 이렇게 요약된다. “복수는 회복이 아니다.” 이 문장 자체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살인자 리포트』는 이 문장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드러낸다. 왜냐하면 회복이 아닌 것을 금지한다고 해서, 고통이 자동으로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상태에 놓여 있다. 사건은 끝났지만, 삶은 계속해서 사건에 묶여 있다. 이 상태는 우울이나 트라우마라는 임상적 언어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 전체가 위협으로 재구성된 상태에 가깝다. 영화는 이 지점을 설명 대신 체험으로 보여준다. 피해자들의 대사는 많지 않다. 대신 반복되는 불안, 특정 상황에서의 몸의 반응,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암묵적인 감각이 화면에 남는다. 이때 이영훈의 치료 논리는 단순한 폭력의 합리화가 아니라, 이 상태를 끝내려는 시도로 등장한다. 그는 회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통증이 지속되는 구조를 제거하겠다고 말한다. 이 말은 위험하지만, 동시에 많은 피해자들이 실제로 체감하는 욕망과 겹친다. “괜찮아지고 싶다”가 아니라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불편한 선택지 앞에 놓인다. 이영훈의 살인을 거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 거부가 피해자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한다. 영화는 바로 이 침묵을 문제 삼는다. “복수는 회복이 아니다”라는 말은 윤리적 선언일 수는 있지만, 피해자의 현재를 변화시키는 언어는 아니다. 『살인자 리포트』는 이 간극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극단적인 해법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관객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객이 그 해법을 왜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는지를 스스로 묻게 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가 특히 날카로운 지점을 건드리는 것은 성폭력 범죄를 다루는 방식이다. 『살인자 리포트』에서 성폭력은 단순한 범죄 유형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건으로 제시된다. 성폭력 이후의 피해자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야 할 자리가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신체의 안전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신뢰, 공간에 대한 감각, 자기 결정에 대한 믿음이 동시에 훼손된다. 이런 훼손은 시간만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문제는 사법제도가 이 지점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형벌은 범죄 행위에 대한 응답이지, 범죄 이후의 삶에 대한 응답이 아니다. 그래서 성폭력 사건에서 판결은 종종 ‘사건의 종료’를 선언하지만, 피해자의 공포는 종료되지 않는다. 영화는 이 불균형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가해자는 형을 살고 나온다. 사회는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피해자는 여전히 가해자의 존재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조직해야 한다. 이 상태에서 “법이 해결했다”는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 디지털 성범죄는 이 구조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가해자가 살아 있는 한, 파일이 존재하는 한, 피해자는 언제든 다시 협박당할 수 있다. 이 경우 처벌은 억제력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출소 이후의 시간이 피해자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온다. 영화가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어떤 범죄는 형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지속이 피해를 계속 발생시킨다. 이 인식이 공유되는 순간, 사회는 더 이상 “적절한 형벌”이라는 말로 안심할 수 없게 된다.
『살인자 리포트』가 강력한 이유는, 이 논의를 정책이나 제도 개혁의 언어로 풀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인물의 선택으로 압축한다. 이영훈의 선택은 분명히 범죄다. 그러나 그 범죄가 발생하게 된 조건은 관객의 현실과 너무 닮아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살인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살인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무능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살인자 리포트』는 단순한 범죄 영화가 아니라, 실패의 기록에 가깝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회, 처벌 이후의 세계를 방치해온 제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다른 언어를 준비하지 못한 공동체. 이 영화는 이 실패를 한 인물의 일탈로 축소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그 실패의 일부임을 조용히 드러낸다.
『살인자 리포트』에서 한상우는 종종 ‘제도의 어두운 단면’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된다. 그는 경찰이었고, 협박을 받았으며, 약점을 쥔 권력에 의해 통제당한다. 이 설정만 놓고 보면, 한상우는 구조의 피해자처럼 보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영화가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이 인물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책임이 사라지는 순간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한상우는 이 영화에서 이영훈의 논리를 강화하는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수록 이영훈의 선택은 더 설득력을 얻는다. 관객은 묻게 된다. 이런 가해자가 다시 사회로 돌아오는 세계를, 정말로 피해자에게 감당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안전에 대한 질문이다. 그래서 한상우의 죽음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불편한 안도감을 남긴다.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실제로 위험의 종료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지점에서 영화가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상우의 제거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가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기능한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사회라면, 이미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응징의 순간이 아니라, 사회가 어디까지 무너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에 가깝다. 이로써 『살인자 리포트』는 중요한 균형을 확보한다. 이영훈의 논리가 제도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가해를 구조의 산물로 정당화하지 않는다. 한상우는 그 경계를 표시하는 인물이다. 이해될 수 있는 출발점과 용납될 수 없는 도착점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있으며, 그는 그 선을 넘었다. 이 명확한 규정이 있기에, 이 영화의 윤리적 질문은 상대화로 무너지지 않는다.
한상우가 이 영화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인 이유는, 이영훈을 무조건적인 가해자로 환원하는 해석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한상우는 협박을 이유로 타인의 신뢰를 배신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성폭력을 선택했다. 반면 이영훈은 끝까지 자신의 행위를 피해자 보호나 자기 보존의 언어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는 살인을 한다. 그러나 그 살인을 통해 자신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쾌락도, 권력도, 안전도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행위가 결국 자신을 파괴할 것임을 알고 있다.
이영훈이 끝내 넘지 않은 첫 번째 선은 ‘판단’이다. 그는 한 번도 “이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의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도덕적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피해자의 상태만을 말한다. “이 사람은 누군가의 삶을 끝나지 않게 만들고 있다.” 이 문장은 심판이 아니라 관찰에 가깝다. 그는 가해자의 죄를 평가하지 않고, 피해자의 삶이 계속해서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만을 반복한다. 이 선택은 그를 위험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단순한 자경단과 구분 짓는 핵심이 된다.
두 번째로 이영훈이 넘지 않은 선은 ‘전가’다. 그는 자신의 살인을 피해자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피해자에게 선택을 묻지 않고, 동의를 문서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살인을 철저히 자신의 몫으로 끌어안는다. 이 선택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는 않지만,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도망치지 않고 기록되기를 선택한다. 이 태도는 무죄 선언이 아니라, 처벌을 포함한 귀결을 감수하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영훈은 한상우와 완전히 갈라진다. 한상우의 폭력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폭력이었고, 타인의 침묵을 확보하기 위한 폭력이었다. 반면 이영훈의 폭력은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제거한 대상이 사회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그 책임과 기억을 혼자 떠안는다. 이것이 이영훈을 옹호하게 만드는 이유는 아니다. 다만 이 인물을 단순히 동일선상의 가해자로 분류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다. 그래서 『살인자 리포트』에서 이영훈은 영웅도 악마도 아니다. 그는 사회가 끝내 감당하지 않은 고통을, 가장 잘못된 방식으로 대신 짊어진 인물에 가깝다. 그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가 등장하게 된 조건은 외면될 수도 없다. 영화는 이 불편한 병치를 끝까지 유지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변화는 백선주에게서 일어난다. 그녀는 처음부터 피해자가 아니다. 기자로서 사건을 취재하고, 질문을 던지며,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위치는 서서히 이동한다. 질문하는 사람에서 질문받는 사람으로, 관찰자에서 연루된 존재로, 기록자에서 기억의 보관자로 옮겨간다. 중요한 점은, 이 변화가 극적인 각성이나 결단의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선주는 영웅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영훈을 막아내지도,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그녀가 떠안게 되는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이영훈의 논리를 이해해버렸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어떤 말도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감각이 그녀에게 남는다.
그래서 백선주는 회복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회복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백선주를 또 하나의 생존자로 남겨둔다.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 그 폭력이 만들어낸 윤리적 균열을 온몸으로 통과한 생존자다. 그녀는 이제 이전처럼 사건을 소비할 수 없다. 동시에 그 사건을 잊을 수도 없다. 이것은 치유가 아니라 윤리적 불면에 가깝다. 이 선택은 영화의 태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살인자 리포트』는 관객에게 안심을 제공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제거함으로써 세계가 정리되었다는 환상을 거부한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이 모든 것을 보고도, 우리는 다시 이전처럼 살 수 있는가.” 백선주의 얼굴에 남는 것은 확신이 아니라 망설임이고, 이 망설임이야말로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고자 하는 상태다.
『살인자 리포트』가 가장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은 ‘해결책’이다. 이 영화는 끝까지 어떤 대안도 말하지 않는다. 회복적 사법, 가중 처벌, 영구 격리, 피해자 중심 정의 같은 담론은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영화는 일부러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침묵 자체를 질문으로 만든다. 만약 이 영화가 특정 해법을 제시했다면, 관객은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인자 리포트』는 그 안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서사를 돌아보면, 이 침묵은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다. 영화는 이영훈의 살인을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동시에 이영훈을 부정하는 언어 역시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를 멈추고 싶다면, 무엇을 대신 내놓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도덕적 수사가 아니다. 실제로 사회가 대답하지 못해온 질문이다. 처벌은 필요하다. 그러나 처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왔는가. 이 질문 앞에서 영화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다. 특히 성폭력과 디지털 성범죄의 맥락에서 이 침묵은 더욱 날카롭게 작동한다. 피해자의 공포가 가해자의 존재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경우, ‘형량’은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때 사회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인다. 하나는 이 공포를 개인의 감내로 전가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공포를 제도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어느 쪽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영훈이라는 극단적 인물을 통해, 우리가 첫 번째 선택을 너무 오래 반복해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살인자 리포트』는 관객을 도덕적 평가자의 자리에서 밀어낸다. 이영훈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비난이 아무것도 대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만약 이영훈이 틀렸다면, 그가 해결하려 했던 문제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그의 논리는 계속해서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살인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도, 살인을 “완전히 비현실적인 일탈”로 밀어내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 회피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까지 제시하지 않는 또 하나는 ‘면죄’다. 이영훈은 끝내 용서받지 않는다. 그는 이해될 수는 있어도, 용납되지는 않는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이해는 조건에 대한 인식이고, 용납은 결과에 대한 승인이다. 영화는 이 둘을 철저히 분리한다. 관객이 이영훈의 논리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에도, 영화는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기록되고, 드러나고, 결국 사라질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는 이 인물을 영웅화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자, 동시에 관객에게 남겨진 질문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 장치다.
이 침묵의 전략은 백선주의 서사와 맞물리며 완성된다. 백선주는 끝내 답을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해법도 제시하지 않고, 어떤 선언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떠안는 것은 기억과 책임이다. 이영훈의 말을 들었고, 피해자들의 얼굴을 보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준비된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으로 남는다. 이 상태는 고통스럽지만, 영화가 의도한 도착점이다. 『살인자 리포트』는 관객 모두를 이 위치에 세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침묵은 무책임이 아니라 요구에 가깝다. “이영훈을 필요 없게 만들 사회를 상상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 질문은 극단적 인물을 제거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인물이 왜 등장했는지를 끝까지 따라가야만 답할 수 있다. 영화는 이 작업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 책임을 관객에게 돌려준다. 이것이 『살인자 리포트』가 끝내 해법을 말하지 않는 이유이며, 동시에 이 영화가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서는 지점이다.
『살인자 리포트』는 끝까지 관객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정의의 승리도, 완결된 처벌도, 회복의 약속도 없다. 대신 남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범죄를 처벌해왔지만, 피해자의 삶을 회복시키는 일에는 반복적으로 실패해왔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그 실패를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살인을 옹호하지 않는다. 이영훈의 선택은 끝내 범죄로 남고, 그는 영웅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그를 단순한 괴물로 밀어내는 선택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밀어내는 순간, 우리는 다시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문제의 얼굴만 제거하는 방식의 안심 말이다. 『살인자 리포트』는 이 쉬운 탈출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집요하게 묻는 것은 “이영훈이 옳은가”가 아니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그를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언어와 제도를 우리는 갖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관객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처벌은 필요하다. 그러나 처벌 이후의 공포를 누가 책임지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여전히 준비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성폭력과 디지털 성범죄처럼 존재를 훼손하는 범죄 앞에서, 이 공백은 더욱 선명해진다.
한상우라는 인물은 이 영화가 상대화로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는 기준점이다. 그는 구조의 이름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선을 넘었고, 그 책임은 분명히 그에게 있다. 이 설정 덕분에 영화는 모든 폭력을 사회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동시에 이영훈이라는 인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극단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는다. 이 두 인물의 대비는 이 영화의 윤리적 균형을 지탱하는 핵심 축이다. 백선주가 남겨진 자리 역시 중요하다. 그녀는 답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을 떠안는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빠른 판단 대신 오래 남는 질문, 선언 대신 책임을 요구한다. 『살인자 리포트』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무책임해지는 영화가 아니라, 해결책을 요구함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위험한 주장을 하는 영화라기보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실패해왔다는 사실을 기록한 영화에 가깝다. 이영훈이 설득력을 갖는 사회는 이미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이 영화는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똑바로 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을, 스크린 밖으로 밀어낸다.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이 불편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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