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페이크 : The Big Fake」

제3의 선택지가 허락되지 않는 세계에서, 한 위조 화가가 살아남는 법

by 민초매니아

197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위조·정치·신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중립’이라는 태도가 어떻게 폭력으로 작동하는지를 묻는 넷플릭스 이탈리아 드라마 영화


「빅 페이크 : The Big Fake」라는 제목은 관객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오해로 이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중심 문제가 ‘가짜 그림’이거나 ‘위조 범죄’일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나면, 위조는 오히려 가장 표면적인 소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 작품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인식론적 질문이 아니라, 어떤 태도가 세계 속에서 작동하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에 가깝다. 그림은 위조될 수 있지만, 선택 또한 위조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선택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정말로 중립일 수 있는가.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바로 그 지점에 놓여 있다. 영화 속에서 ‘페이크’는 기술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손의 문제도, 재현의 정확성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위험한 가짜는 그림이 아니라 태도다.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스스로를 무고하다고 믿는 태도,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말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태도,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폭력으로 귀결되는지를 끝까지 보지 않으려는 태도. 「빅 페이크 : The Big Fake」는 위조범의 범죄담이 아니라, 중립이라는 말이 어떻게 가장 효율적인 협력으로 기능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가 197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시대 재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 시기는 정치적 이념 대립, 극단적 폭력, 국가 권력과 비국가 폭력 조직이 뒤엉켜 있던 시기였고, 동시에 ‘국가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시간대다. 붉은여단의 활동, 알도 모로 납치 사건, 비밀 정보기관의 개입 의혹은 이 영화의 배경 설명이 아니라, 서사의 윤리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중요한 점은 영화가 이 시기를 흑백 대결 구도로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좌와 우, 혁명과 반혁명, 국가와 범죄 조직이라는 구분은 존재하지만, 영화는 그 어느 쪽에도 도덕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이에서 기능하는 인물, 즉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에 필요했던 존재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는 선택하지 않는 자가 안전했던 사회가 아니라, 선택하지 않는 자가 가장 유용했던 사회였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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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가는 세 친구 ― 같은 출발, 다른 결핍


영화는 토니, 파비오, 비토리오가 함께 로마로 향하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이 장면은 우정의 기원이라기보다, 이후 세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예고하는 출발점에 가깝다. 세 사람은 모두 주변부에서 로마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을 밀어 올리는 동력은 같지 않다. 토니에게 결여된 것은 자기만의 창작 언어이고, 파비오에게 결여된 것은 자신이 속한 계층을 대변할 수 있는 통로이며, 비토리오에게 결여된 것은 제도 안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확실한 발판이다. 이 결핍은 곧 각자의 삶을 움직이는 방향성을 규정한다. 파비오는 노동자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이념에 몸을 싣고, 자신의 분노와 정의감을 정치적 언어로 전환하려 한다. 비토리오는 신앙을 통해 질서를 받아들이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교회라는 제도가 제공하는 상승 경로에 더 강하게 끌린다. 반면 토니는 어느 쪽에도 자신을 고정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는 정치도, 신앙도, 조직도 자신을 규정하지 않기를 원하며, 그 거리를 일종의 자유로 받아들인다. 이 세 인물의 차이는 이후 전개에서 극명해진다. 누구는 빠르게 소모되고, 누구는 제도 속으로 흡수되며, 누구는 끝내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명확히 말하지 못한 채 남겨진다.


토니 ― 창작에 실패한 화가, 위조에 적응한 인간


토니는 화가를 꿈꿨지만, 영화는 그가 왜 화가로 실패했는지를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결과만을 제시한다. 그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서툴렀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현하는 데에는 비범할 정도로 능숙했다. 화풍의 질감, 시대의 공기, 작가의 손놀림을 정확하게 따라 그리는 그의 능력은 재능이라기보다 기능에 가깝다. 이 점에서 토니는 예술가라기보다, 예술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는 기술자에 더 가까운 인물로 설정된다. 중요한 것은 토니가 이 능력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이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범죄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생존을 위한 기술, 혹은 재능의 또 다른 형태로 받아들인다. 그의 위조는 탐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대신 인정받지 못한 창작 욕망이 다른 형태로 굴절된 결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지점을 끝까지 비판적으로 유지한다. 토니의 기술은 그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점점 더 늘릴 뿐이다.


토니는 반복해서 자신이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판단을 유보하고,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의 향방에 대해 묻지 않는다. 이 태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색무취의 실용성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그것이 얼마나 쉽게 타인의 목적에 흡수되는지를 보여준다. 토니는 끝내 누군가의 이념을 대변하지도, 제도의 얼굴이 되지도 않는다. 대신 그가 만들어낸 정교한 결과물만이 남고, 그 결과물이 사용되는 맥락에서 그는 점점 지워진다. 이 지점에서 토니는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시스템에 기여하는 인물이 된다.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잘 활용될 수 있는 존재로 남는 것이다.


발보 ― 가짜를 가치로 환산하는 시장의 얼굴


토니의 위작이 범죄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상품’이 되는 데에는 발보의 존재가 결정적이다. 발보는 단순한 마피아 두목이라기보다, 위조가 어떻게 시장의 언어로 번역되는지를 체현하는 인물에 가깝다. 그는 그림의 진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유통될 수 있는지, 누가 그 그림을 원하고 있으며, 어떤 가격이 형성될 수 있는지를 정확히 계산한다. 발보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아니라, 믿음이 만들어지는 조건이다. 발보는 토니를 예술가로 대하지 않는다. 그는 토니를 보호하지도, 착취하지도 않는다. 다만 토니의 능력을 하나의 기능으로 정확히 배치할 뿐이다. 이 관계에서 흥미로운 점은, 토니 역시 발보에게서 명시적인 폭력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위협은 은근하고, 계약은 암묵적이며, 보상은 즉각적이다. 이 구조 속에서 위조는 범죄라기보다 하나의 산업처럼 작동한다. 발보는 가짜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는 가짜가 자연스럽게 ‘가치’로 받아들여지도록 환경을 조성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중요한 전환을 보여준다. 문제는 누가 가짜를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가짜가 어떻게 아무 저항 없이 소비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한다. 발보는 도덕적 악당이 아니다. 그는 수요에 반응하고, 위험을 분산시키며, 시장을 안정화하는 관리자에 가깝다. 그렇기에 그의 존재는 더 불편하다. 발보는 위조를 범죄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위조를 합리적인 거래로 만든다.


사르토 ― 손을 더럽히지 않는 국가의 기술


발보가 불법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시장의 얼굴이라면, 사르토는 합법의 언어로 폭력을 재단하는 국가의 얼굴이다. ‘재단사’라는 별명에서 드러나듯, 사르토는 직접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는 상황을 정리하고, 필요 없는 가능성을 잘라내며, 사건이 흘러가야 할 방향을 조용히 설정한다. 그의 권력은 가시적이지 않다. 대신 행정적이고, 기술적이며, 무엇보다 합리적으로 보인다. 사르토가 토니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발보와 다르다. 그는 돈이나 협박 대신 필요와 국가를 말한다. 위조된 문서와 이미지가 개인의 탐욕을 넘어 공공의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동원되는 순간, 토니의 기술은 새로운 지위에 놓인다. 더 이상 범죄 조직의 도구가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 과정을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보여준다. 국가가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노골적이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합리성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진행된다는 점을.


사르토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책임의 분산이다. 누구도 직접적인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구조를 짜고, 결과만이 남도록 조율한다. 이 구조 속에서 토니는 더욱 안전해진다. 동시에 더욱 지워진다. 그의 손은 필요하지만, 그의 이름은 불필요하다. 발보의 세계에서 토니가 기술자였다면, 사르토의 세계에서 그는 하나의 부품에 가깝다. 영화는 이 대비를 통해 불법과 합법의 차이를 묻지 않는다. 대신 두 영역이 얼마나 유사한 방식으로 개인을 소모하는지를 보여준다.


파비오와 비토리오 ― 이념과 제도에 몸을 실은 두 경로


파비오와 비토리오는 토니와 달리, 자신이 기대고 설 수 있는 외부의 언어를 분명히 갖고 있는 인물들이다. 파비오는 노동자 계급의 분노와 좌절을 정치적 언어로 전환하며, 자신의 삶을 더 큰 서사에 접속시키려 한다. 그는 붉은여단 활동에 참여하면서, 개인의 삶을 이념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길을 택한다. 영화는 이 선택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파비오의 행동에는 분명한 동기가 있지만, 그 동기는 곧 조직의 논리 속으로 흡수된다. 그의 죽음은 숭고한 희생으로 기념되지도, 어떤 변화의 기점으로 제시되지도 않는다. 다만 소모의 결과로서 처리된다. 비토리오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는 신앙을 통해 질서와 의미를 찾으려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가 신뢰하는 것은 신앙 자체라기보다 교회라는 제도가 제공하는 안정성과 상승 가능성이다. 그는 제도 내부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며, 그 과정에서 점차 도덕적 기준을 유연하게 조정한다. 교회 재산을 유용하고, 토니를 속이며, 결국 사르토와 거래하는 그의 행보는 급격한 타락이라기보다 점진적인 적응에 가깝다. 비토리오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언어를 충분히 갖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파비오와 달리 살아남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 생존을 결코 긍정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의 승리가 아니라, 구조에 대한 순응의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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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타 ― 삶을 묻는 유일한 목소리


이 두 인물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자신을 넘어서는 서사에 자신을 맡긴다는 점이다. 파비오는 이념에, 비토리오는 제도에 자신을 결합시킨다. 그 결과 한 사람은 빠르게 제거되고, 다른 한 사람은 체제 안으로 편입된다. 이 대비는 토니의 위치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그는 이념에도, 제도에도 자신을 내주지 않지만, 그 대가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남겨진다.


도나타는 이 영화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는 정치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예술적 판단도 내리지 않으며, 권력의 논리와도 거리를 둔다. 도나타가 토니에게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이 그림이 누구의 것인지, 이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보다는, 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녀의 관심은 진위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에 있다. 도나타의 임신은 영화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기능하지만, 그것이 희망의 약속으로 소비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토니에게 도피처를 제공하지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는다. 다만 지금의 삶이 계속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삶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를 차분히 드러낼 뿐이다. 이 점에서 도나타는 판단자가 아니라 기준점에 가깝다. 그녀의 존재는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이 얼마나 추상적인 언어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나 영화는 도나타가 제시하는 가능성을 끝내 실현시키지 않는다. 그녀가 상징하는 것은 다른 삶의 가능성이라기보다, 가능성이 차단된 세계에서 끝내 도달하지 못한 질문에 가깝다. 토니는 도나타가 있는 자리로 완전히 이동하지 못하고, 그녀 역시 그를 대신 선택해주지 않는다. 이 간극은 영화 전반에 흐르는 냉정함을 강화한다. 삶을 묻는 목소리는 존재하지만, 그 질문에 응답할 구조는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숨기지 않는다.


“테르티움 논 다투르:Tertium non datur” ― 제3의 선택지가 지워진 세계의 규칙


영화의 초반, 비토리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라틴어 문장 “테르티움 논 다투르: Tertium non datur”는 처음에는 다소 과잉된 장식처럼 들린다. 신학적·논리학적 격언이 서사의 초입에 놓일 때 관객은 그것을 인물의 성향을 드러내는 수사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무렵, 이 문장은 단순한 성격 묘사가 아니라 이 세계의 작동 원리를 요약한 선언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제3의 선택지는 없다는 이 문장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규칙에 가깝다. 이 규칙은 폭력적으로 강요되지 않는다. 오히려 합리적이고 자연스럽게 내면화된다. 이념에 몸을 싣는 길, 제도에 편입되는 길, 그리고 그 어느 쪽에도 자신을 고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모두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이 세 가지 경로가 동일한 조건 아래 놓여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념은 빠르게 개인을 소모하고, 제도는 윤리를 유연하게 만드는 대가로 생존을 보장하며, 중립은 책임을 회피하는 대가로 점점 더 많은 요구에 노출된다. ‘제3의 길’처럼 보였던 태도는 실제로는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 가능한 위치였고, 그 효율성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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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티움 논 다투르: Tertium non datur”는 결국 토니에게 가장 가혹하게 작동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고 믿지만, 영화는 그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어느 쪽에서든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선택을 강요하는 세계의 잔혹함을 말하는 동시에, 선택하지 않겠다는 자기 인식이 얼마나 쉽게 구조 속으로 흡수되는지를 드러내는 문장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토니가 수행하는 위조는 이전과 성격이 다르다. 그는 더 이상 특정 화가의 작품이나 특정 집단의 문서를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흔적을 지운다. 이 장면은 토니가 마침내 자유를 획득하는 순간처럼 보일 수도 있다.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위치로 이동하고, 더 이상 요구받지 않는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상태를 해방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탈출이 아니라 소거에 가깝다.


토니는 살아남지만, 그 생존은 관계와 이름, 기억이 제거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그는 더 이상 위조를 강요받지 않지만, 동시에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장 냉정한 판단을 내린다. 토니가 끝내 성공한 유일한 작업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가장 정교한 위조는 타인의 이름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워내는 데 있었다.


「빅 페이크 : The Big Fake」는 이 결말을 통해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중립은 때로 가장 안전해 보이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 중립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매끄럽게 통과시키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Tertium non datur.” 제3의 선택지는 없다는 이 문장은, 단순한 논리 명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도달한 윤리적 결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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