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이라는 감옥, 제도가 외면한 폭력
「하우스메이드 ( The Housemaid)」의 초반은 익숙하다. 영화는 관객을 새로운 질문 앞에 세우기보다, 이미 수없이 소비된 장르적 구도를 먼저 제시한다. 부유한 주택가, 정돈된 거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남편과 그 곁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아내, 그리고 이 집에 새로 들어온 입주 가정부. 이 배치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관객은 이미 이 이야기의 문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니나는 조울증과 결벽증을 가진 히스테릭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사소한 집안일에도 과도하게 반응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며, 주변 사람들을 피로하게 만든다. 반면 남편 앤드류는 차분하고 합리적이며, 사회적으로도 신뢰받는 엘리트 남성이다. 그는 아내의 불안정함을 묵묵히 견디는 사람처럼 보이고, 집 안의 갈등을 최소화하려 애쓰는 ‘정상적인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밀리 역시 이 시선에 자연스럽게 동조한다. 갈 곳 없는 가정부의 눈에 이 집은 위태롭지만, 동시에 붙잡아야 할 마지막 기회다. 이 단계에서 영화는 폭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누구의 편에 설지를 조용히 결정하게 만든다. 니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이고, 앤드류는 이해하기 쉬운 사람이다. 이 차이는 곧 신뢰의 차이로 이어진다. 영화는 이 판단이 얼마나 쉽게 내려지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낯설지 않은 서사 위에서 관객은 스스로 ‘상식적인 선택’을 했다고 느끼게 된다. 이 영화의 첫 번째 공범은 앤드류가 아니라 관객이다.
영화 중반, 시점이 니나로 이동하면서 이 익숙한 서사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그동안 ‘과민 반응’으로 보였던 행동들은 맥락을 얻고, 설명되지 않던 불안은 구체적인 원인을 드러낸다. 이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다. 대신 통제와 관리, 기준 설정과 평가라는 일상적인 언어들이다. 앤드류의 폭력은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는 니나를 때리지 않고 다락방에 숨기고 가둔다. 그리고 어떤 모습이 ‘정상적인 아내’인지, 어떤 선택이 ‘가정에 도움이 되는지’를 강요한다. 니나가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문제는 행동이 아니라 니나의 비정적인 상태로 환원시켜버린다. 감정적인 반응은 히스테리가 되고, 저항은 비이성으로 치환된다. 가정폭력이 외부에서 포착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설명될수록 오히려 가해자의 말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엘리트 남성의 언어는 언제나 정제되어 있고, 그 언어를 반박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피해자의 몫이 된다. 영화 속 정신병원 입원 장면은 이 구조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번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니나의 말은 더 이상 사실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증상을 설명하는 자료가 된다. 가정은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가장 완벽한 은폐 공간이라는 문장은 이 영화에서 과장이 아니라 현실에 가깝다.
니나가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의 선택이나 용기의 문제로 돌리기는 어렵다. 영화는 이 침묵을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설명한다. 니나는 미혼모였고, 앤드류와의 결혼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계급 이동의 통로이기도 했다. 이 결혼을 통해 얻은 안정은 동시에 벗어나기 어려운 의존이 된다. 앤드류의 사회적 지위와 평판은 니나의 말보다 훨씬 강력한 증거로 작동한다.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법과 제도에 기대기 어려운 이유는 명확하다. 이 폭력은 대부분 증거를 남기지 않으며, 남길수록 피해자의 신뢰를 깎아먹는다. 설명은 반복될수록 감정적 호소로 보이고, 기록은 병력으로 해석된다. 주변 사람들조차 악의 없이 실패한다. 그들은 상황을 중재하려 하지만, 중재는 곧 현상 유지를 의미한다. 이 구조 안에서 법은 중립적이지 않다. 질문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 이 상황에서 법은 실제로 누구를 보호하는가.
밀리는 이 영화에서 가장 오해받기 쉬운 인물이다. 그녀는 전과자이고, 과거에 살인을 저질렀으며,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밀리의 과거를 단절된 사건들의 나열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일관된 맥락 안에 배치한다. 고등학교 시절, 성폭행을 당하던 친구를 구하려다 살인을 저질렀고, 가석방 이후에도 직장에서 여성 직원을 추행하던 사장을 폭력으로 저지한다. 이 두 사건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밀리는 폭력을 선택했지만, 그 폭력은 언제나 이미 실패한 구조의 뒤늦은 대응으로 등장한다. 법과 제도는 밀리의 선택을 보호하지 않았다. 친구를 구한 행위는 살인으로만 기록되었고, 직장 내 성폭력을 멈춘 행동은 폭력 사범의 재범으로 해석되었다. 밀리는 반복해서 ‘문제 인물’로 분류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은 그녀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언제나 방치된 폭력의 현장에 있었다. 영화는 이 점을 집요하게 반복한다. 밀리는 정의의 집행자가 아니라, 정의가 도착하지 않았던 장소를 통과해온 사람이다.
이 설정은 우연이 아니다. 니나가 밀리를 선택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사회적 신뢰가 없고, 평판을 지킬 이유도 없으며, 협박과 가스라이팅이 통하지 않는 사람. 앤드류의 언어가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는 대상. 밀리는 앤드류의 폭력에 맞설 수 있는유형의 인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밀리를 구원자로 떠받들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묻는다. 법과 제도가 반복해서 실패한 자리에서, 폭력을 멈춘 사람이 있다면 그를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다락방은 이 영화에서 은유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이기 이전에 실제로 잠기고, 실제로 격리되며, 실제로 폭력이 행사되는 장소다. 「하우스메이드 ( The Housemaid)」가 다락방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유는 그것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정폭력이 가장 노골적이고 효율적인 형태로 완성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설득도, 합리화도, 설명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통제는 이미 공간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영화 후반, 앤드류가 다락방에 갇히는 장면은 통쾌한 응징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은 구조의 전환이라기보다 통제 권한의 일시적 역전에 가깝다. 다락방이라는 공간 자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도 변하지 않는다. 바뀐 것은 누가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가뿐이다. 이 장면이 불편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만 방향만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우스메이드 (The Housemaid)」는 다락방을 통해 가정폭력의 현실을 미화 없이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폭력의 강도가 아니라, 그 폭력이 얼마나 손쉽게 공간 안에 고정될 수 있는가이다. 다락방은 상징이 아니라 증거다. 그리고 그 증거는, 가정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폭력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지를 증언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밀리는 또 다른 집을 향한다. 입주 가정부 면접이라는 익숙한 장면, 그리고 이전의 집에서 보았던 것과 닮은 불길한 징후들. 이 장면은 사건의 연장이 아니라 질문의 연장이다. 밀리는 더 이상 도망치는 인물이 아니다. 동시에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인물도 아니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어떤 통쾌함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구조의 지속성을 직면하게 만든다. 이 장면을 ‘처단자의 탄생’으로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밀리는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무 익숙해진 폭력의 징후를 인식하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문제는 그 인식이 곧 개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제도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고, 가정이라는 공간은 여전히 외부의 시선을 거부한다. 이 구조 속에서 밀리 같은 인물은 예외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호출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통쾌하지 않다. 니나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는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밀리는 살아남았지만, 안전해지지 않는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멈춘다. 가정폭력의 문제를 개인의 용기나 선택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해서다. 구원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우스메이드 (The Housemaid)」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폭력을 멈추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을 설명하지도 않고, 법과 제도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를 직접 말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왜 그런 해법들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가정이라는 폐쇄된 공간, 사회적 신뢰의 불균형, 피해자의 말이 증거로 전환되지 못하는 구조. 이 모든 조건이 맞물릴 때, 폭력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시스템의 부산물로 등장한다.
밀리의 존재는 그 불편한 진실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그녀는 정의의 대리인이 아니라, 제도의 부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녀가 폭력을 사용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개입하기 전까지 폭력이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미화하지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다만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우스메이드 (The Housemaid)」는 단순한 심리 스릴러로 소비되기 어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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