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영화 「96분 :96 minutes」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에 대한 돌직구

by 민초매니아

재난 스릴러라는 장르가 끝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


영화 「96분 :96 minutes」은 표면적으로는 고속전철 위에서 벌어지는 폭탄 테러를 다룬 재난 스릴러다. 제한된 시간, 밀폐된 공간, 멈출 수 없는 열차라는 설정은 익숙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장르적 쾌감에 도달하는 순간마다 스스로 속도를 늦춘다. 폭발을 피하는 데 성공했을 때조차 안도감을 허락하지 않고, 사건이 해결된 이후에도 감정의 정리를 유보한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것은 스릴이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쉽게 지워지지 않는 질문이다. 「96분 :96 minutes」이 불편한 이유는 폭탄의 위력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가 끝내 묻는 것은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선택할 것인가”이며, 더 정확히는 “그 선택의 대가는 누가 감당하는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재난 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윤리극에 가깝다. 그리고 그 윤리적 질문은 관객에게 어떤 안전한 거리도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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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서사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세 개의 선택 위에 놓여 있다. 첫 번째는 과거의 기차 터널 사고다. 구조대는 터널 밖에서 전복된 객차의 승객들을 구조하느라, 터널 안쪽 세 량의 객차에 남아 있던 승객들을 구하지 못한다. 구조대장은 현장의 한계와 추가 붕괴 위험을 이유로 더 이상의 진입을 중단한다. 결과적으로 일부는 살아남았고, 일부는 터널 안에서 사망한다. 이 선택은 이후 “불가피한 판단”으로 정리된다. 두 번째는 극장과 백화점에 동시에 설치된 이중 폭탄 사건이다. 폭발물 제거 전문가였던 아런은 극장의 폭탄을 해체하는 데 성공하지만, 인접한 백화점에 설치된 두 번째 폭탄은 곧바로 폭발한다. 테러범은 극장의 폭탄을 해체하면 백화점이 폭발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현장의 지휘관은 그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동시에 현장에 투입된 동료들의 안전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해체를 종용한다. 결과는 수많은 민간인 사망이었다. 이 사건 이후 아런은 영웅이 되었지만, 동시에 극심한 죄책감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며 조직을 떠난다. 세 번째는 영화의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는 고속전철 폭탄 테러다. 열차는 멈출 수 없고, 속도나 승객 이동과 연동된 조건부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이번에도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이번에도 선택은 필요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 이상 조직이나 절차 뒤로 물러설 수 없다. 영화는 이 세 사건을 통해 같은 질문을 점점 더 잔인한 방식으로 반복한다. 모두를 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떤 말을 선택이라고 부를 것인가.


이 세 사건은 모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터널 사고에서는 구조의 물리적 한계가 있었고, 극장 사건에서는 테러범의 조건이 신뢰할 수 없었으며, 열차 사건에서는 기술적으로 열차를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 설명들을 동일한 무게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그 차이를 느끼도록 유도한다. 터널 사고에서 구조대장의 판단은 ‘포기’라기보다 ‘도달할 수 없음’에 가까웠다. 위험은 구조대 자신에게도 현실적이었고, 더 많은 인명을 잃을 가능성 또한 분명했다. 반면 극장과 백화점 사건에서는 다른 질문이 남는다. 백화점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폭발이 발생할 경우 그 피해가 훨씬 클 것이라는 점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현장에 있는 우리’를 우선 보호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것은 정말 다수를 위한 선택이었는가? 아니면 다수라는 언어로 포장된 자기보존이었는가? 그 선택은 잘못된 것인가? 누가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한가?


숫자로 환원된 죽음, 영웅 서사가 작동하는 방식


극장 폭탄 해체 이후, 사건은 빠르게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된다. 극장의 폭탄을 해체한 폭발물 제거 전문가는 언론에 의해 ‘영웅’으로 호명되고, 그 결정은 결과적으로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설명된다. 반면, 인접한 백화점에서 발생한 대규모 사망은 사건의 맥락 속으로 흡수된다. 희생자들은 ‘어쩔 수 없었던 피해’가 되고, 그들의 죽음은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사고의 부산물처럼 다뤄진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명확한 비난이나 고발을 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서사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언론의 보도 방식, 조직 내부의 보고 체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굳어지는 기억의 형태는 모두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누군가는 얼굴을 가진 이름으로 남고, 누군가는 숫자로 환원된다. 영화가 집요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 ‘기억의 비대칭’이다. 같은 사건 안에서도 어떤 죽음은 설명되고, 어떤 죽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 비대칭은 개인의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위기를 정리하는 방식에 가깝다. 사건을 이해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책임을 단순화하고, 서사를 명료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균열이다. 그러나 영화는 묻는다. 이 균열 속에서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설명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불가피했다”는 말은 과연 어떤 위로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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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전철 폭탄 테러의 범인 양펑후이는 단순한 복수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폭발 자체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과거를 되짚고, 당시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이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요구는 일관되게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그 선택이 정말 다수를 위한 것이었는가.” 양펑후이는 3년 전 백화점 폭발 사건의 희생자 가족이다. 그의 분노는 상실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상실이 ‘설명 가능한 죽음’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더 깊어진다. 그는 구조대가, 조직이, 그리고 국가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유지되었다고 느낀다. 폭탄 테러는 그 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극단적인 방식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 속 폭탄은 처벌의 도구가 아니라 질문의 장치로 작동한다. 폭탄은 “왜 그때는 그렇게 선택했는가”를 반복해서 묻게 만드는 조건이다. 열차를 멈추지 못하게 설계된 장치는, 과거에 멈추지 않았던 판단을 그대로 재현한다. 이번에는 피해자가 숫자가 아니라, 구조대 자신과 그 가족이 된다. 이때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이 질문이 폭력적인가, 아니면 이미 폭력적인 구조가 질문을 밀어낸 결과인가.


아런의 죄책감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다


아런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영화에서 병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술에 의존하거나, 폭력적으로 변하지도 않는다. 대신 조용히 무너진다. 직업을 떠나고, 결혼을 미루고, 매년 피해자의 추모식에 참석한다. 영화는 그의 고통을 개인의 심리 문제로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질문으로 남긴다. 왜 규칙을 지켰고, 명령을 따랐으며, 공식적으로는 ‘옳은 선택’을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너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영화의 대답은 분명하다. 아런의 고통은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선택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행동한 적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죽음 위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망각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그의 트라우마는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정당화된 선택’이 개인에게 남기는 잔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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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영화는 조용히 책임의 방향을 뒤집는다. 만약 이 선택이 정말로 온전히 옳았다면, 그 선택을 수행한 사람은 이렇게 무너질 필요가 없다. 아런이 무너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 선택이 결코 완결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의 고통은 실패의 징후가 아니라, 설명되지 않은 죽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영화의 마지막 「96분 :96 minutes」은 이전의 모든 사건을 한 지점으로 수렴시킨다. 이번에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이번에도 열차를 멈추면 더 큰 폭발이 발생한다. 조건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선택의 방식은 달라진다. 이번에는 더 이상 누군가를 계산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물 수 없다. 조직도, 절차도, 명령도 뒤로 물러난다. 남는 것은 한 개인의 결정뿐이다. 아런이 택한 선택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선택이 아니다. 그는 누군가를 지목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그 자리에 선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더 숭고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완전히 다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죽음을 전제한 계산은 언제나 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반면, 자신을 그 자리에 놓는 선택은 계산이 아니라 책임이 된다.


이 영화가 이 선택을 감동적으로 연출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런의 선택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서 내려진 결정이다. 그는 처음으로 선택의 결과를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장면은 비장하지만, 영웅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나치게 조용하다. 그 조용함 속에서 관객은 깨닫게 된다. 이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런이 더 용감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가 끝내 ‘승리’를 거부하는 이유


「96분 :96 minutes」은 사건을 해결하지만, 승리를 선언하지 않는다. 폭탄은 제거되고 열차는 멈추지만, 그 순간을 환호로 채우지 않는다. 영화는 끝까지 명확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책임의 문제 역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으로 이동한다. 사건 이후의 세계는 이전과 다르지 않게 흘러가고, 상실은 조용히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이 선택은 의도적이다. 만약 이 영화가 정의의 회복이나 악의 처벌을 강조했다면, 관객은 안도감 속에서 극장을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96분 :96 minutes」은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올바른 결말’이 아니라, 선택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시간이다. 재난은 특정한 순간에 발생하지만, 그 여파는 그 순간에 머물지 않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살아가야 하고, 설명되지 않은 죽음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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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그렇다. 그는 울부짖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대신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장면은 치유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견뎌야 하는 삶의 시간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 조용한 결말을 통해 묻는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정의의 완성인가, 아니면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인가.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남기는 질문은 명확하다. “그 소수가 내가 되거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소수에 포함되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다수를 구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말은, 그 선택이 추상적일 때만 유지된다. 그 자리에 구체적인 얼굴이 놓이는 순간, 윤리는 더 이상 계산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96분 :96 minutes」은 이 질문에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 질문을 끝까지 회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질문을 구조대나 테러범에게만 맡기지 않는다. 관객은 어느 순간 이 질문의 바깥에 설 수 없게 된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차마 끝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다수를 구하는 선택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선택이 어떤 대가 위에 서 있는지를 끝까지 보게 한다. 그리고 그 대가를 누가 감당했는지, 누가 감당하지 않았는지를 조용히 묻는다. 96분은 재난의 스펙터클보다 선택의 무게를 오래 남기는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끝난 뒤에도 쉽게 떠나보낼 수 없다. 질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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