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기 질렌할이 되살린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고딕 호러를 넘어 ..
1935년 제임스 웨일의 고전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신부’라는 존재가 제목에 비해 얼마나 짧고도 제한적으로 소비되었는지 먼저 떠올리게 된다. 제목은 분명 신부를 가리키지만, 정작 그 인물은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라 거의 장식에 불과했다면, 매기 질렌할의 「브라이드!」는 바로 그 불균형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영화는 매기 질렌할이 각본과 연출을 맡고, 제시 버클리, 크리스천 베일, 아네트 베닝, 피터 사스가드, 제이크 질렌할, 페넬로페 크루즈 등이 출연했고 장르는 드라마, 호러, 로맨스, 판타지의 결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고전을 리메이크했기 때문이 아니다. 「브라이드!」는 ‘괴물의 신부’라는 오래된 관념을 다시 꺼내는 대신, 그 신부가 과연 누구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누구의 언어로 규정되어 왔는지를 정면으로 묻는다. 이 작품의 문제의식은 ‘침묵해 온 캐릭터에게 목소리와 주체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로 정리돼 있는데, 실제로 공개된 감독 인터뷰에서도 매기 질렌할은 프랑켄슈타인이 누군가를 되살린다면 중요한 질문은 “그녀는 어떤 욕망과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는가”라고 말하며, 이야기의 중심을 남성 괴물의 필요가 아니라 되살아난 여성의 존재 그 자체로 옮기고자 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 「브라이드!」는 제목부터가 선언이다. 이 작품의 원제 뒤에 붙은 느낌표는 장식이 아니라 태도다. 고딕의 우아한 음울함 위에 펑크의 거칠고 즉흥적인 기운을 덧씌우고, 오래된 장르의 먼지를 털어낸 뒤 그 속에 갇혀 있던 여성의 분노와 욕망과 자의식을 전면으로 꺼내 보인다. 감독은 이 영화를 고전 고딕의 뿌리 위에 세우되 전체 정서는 ‘펑크 록’에 가깝게 끌고 갔고, 이는 완결된 우아함보다 깨지고 얼룩지고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의 자아를 긍정하려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원작의 빈자리를 메우는 데 그치지 않고, 애초에 누락되어 있었던 감정의 밀도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작품에 가깝다.
영화의 줄거리는 1930년대 시카고로 옮겨온다. 괴물 프랭크는 자신과 함께할 존재를 만들기 위해 과학자 유프로니우스를 찾고, 두 사람은 살해된 여성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어 ‘브라이드’를 탄생시킨다. 이 설정은 겉으로는 프랑켄슈타인 신화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질렌할의 영화는 그 순간부터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괴물이 동반자를 얻었는가가 아니라, 되살아난 여성이 창조자의 서사에 순순히 편입되는가이다. 영화는 바로 그 편입의 실패, 혹은 거부를 중심 동력으로 삼는다.
제시 버클리가 연기한 아이다, 브라이드는 이 영화의 심장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완성된 인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 조립되어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그런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그녀를 ‘피해자’나 ‘상징’만으로 가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타인이 부여한 방식으로 소비되지 않으려 하고, 자기 몸에 새겨진 흔적을 지우지 않으며, 자신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점을 서서히, 때로는 과격하게 확인해 간다. 이 과정은 다름아닌 ‘이름의 쟁취’다. 영화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통제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붙여준 이름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을 호명할 것인가. 「브라이드!」의 서사는 그 싸움의 기록이다.
질렌할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메리 셸리라는 원작자를 서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제시 버클리는 브라이드와 메리 셸리를 1인 2역으로 연기한다. 이 장치는 단순한 메타 유희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대담한 설계 중 하나다. 원작을 쓴 여성 작가의 유령 같은 의식이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의 신부에게 스며드는 구조는, 오랫동안 남성 중심 장르 영화 속에서 주변화돼 온 여성 창작자의 목소리가 이제야 자기 피조물의 몸을 통해 다시 발언하기 시작했다는 은유처럼 읽힌다. 이 때문에 「브라이드!」는 고딕 로맨스 호러이면서 동시에 창작과 왜곡, 원작과 전유, 여성 서사의 소거와 복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만 이 메타 장치는 동시에 영화의 장점이자 약점이 된다. 영화를 두고 평단 반응이 갈린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장르적 대담함과 시각적 야심을 높게 평가했지만, 다른 일부는 여성 분노를 깊이 있게 탐구하기보다 과잉된 표면으로 제시했다고 비판했다. 즉, 이 영화는 쉽게 좋아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호불호가 선명하게 갈리는 영화다.
그러나 바로 그 불균질함이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든다. 「브라이드!」는 정돈된 이야기보다 불안정한 에너지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영화다. 억눌린 것이 오래 쌓일수록 분출은 더 거칠고 통제 불가능해진다. 질렌할이 그리고자 한 여성의 분노는 논리적으로 정리된 교양 있는 분노가 아니라, 너무 오래 눌려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형태를 매끈하게 유지할 수 없는 종류의 분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장면들은 종종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감정은 설명보다는 폭발로 나타나며, 어떤 대사는 의도적으로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노골적이다. 그런 선택은 당연히 호불호를 낳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점잖은 비유의 수준에서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배경을 1930년대 시카고로 옮긴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영화는 프랑켄슈타인 신화를 유럽 고딕의 성채가 아니라 산업 도시와 범죄, 대공황의 그늘 속으로 데려온다. 영화에서 시카고는 단지 시대적 분위기를 내기 위한 복고적 장식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부품처럼 다루고, 버려진 존재들이 거리와 지하와 뒷골목에 밀려나는 세계를 시각화하는 장소다. 그래서 프랭크의 외로움은 단순한 괴물의 고독이 아니라,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존재의 사회적 고독이 되고, 브라이드의 부활은 개인의 환생을 넘어 버려진 몸이 다시 역사의 한복판으로 돌아오는 사건이 된다. 이 배경 위에서 크리스천 베일의 프랭크는 꽤나 인상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단순히 흉측하고 폭력적인 괴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 하며,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를 갈망하고, 영화 속 영화와 대중문화의 이미지에 매혹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브라이드!」는 괴물을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이미지의 세계를 통해 자기 결핍을 달래려는 현대적 인물로 바꿔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비극은 괴물의 추악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동반에 대한 절실한 욕망이 결국 타인을 소유하고 규정하려는 오래된 습관과 충돌한다는 데서 발생한다.
프랭크가 브라이드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필요로 하는가. 이 질문은 영화의 정서적 핵심을 이룬다. 표면적으로 그는 외로운 존재이고, 브라이드는 그 외로움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반복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사랑과 소유 사이의 미끄러운 경계다. 누군가를 원한다는 감정이 그 사람의 욕망과 자율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포함하지 않을 때,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필요의 다른 이름이 된다. 「브라이드!」가 보여 주는 날카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는 여성을 ‘구해진 존재’로 놓지 않는다. 오히려 되살아난 여성은 자신을 되살린 남성적 욕망의 구조를 가장 먼저 거부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때 괴물은 더 이상 얼굴에 꿰맨 자국이 있는 프랭크만이 아니다.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상대를 자기 이야기의 부속품으로 쓰려는 태도 자체가 새로운 괴물성으로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특히 강렬한 상징은 브라이드의 얼굴에 남은 검은 얼룩, 이른바 블랙 스머지다. 이 표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결점을 감추지 않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여성은 오랫동안 흠 없는 얼굴, 정리된 몸, 소비 가능한 이미지로 제시되어 왔다. 그런데 브라이드는 가장 먼저 자신의 흠집을 지우지 않는다. 상처의 흔적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는 완성품으로 승인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 여성들이 브라이드의 외형을 따라 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단순한 팬덤의 흉내가 아니라 사회적 표식의 공유로 보인다. 업로드한 초안이 이 장면을 「조커」의 군중 장면과 비교한 것은 매우 유효하다. 하지만 둘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정서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조커」의 가면이 익명성과 허무, 무질서를 향한 파괴적 에너지를 전면화한다면, 「브라이드!」의 표식은 각자의 얼굴을 지운 채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얼굴 위에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가면이 개인을 익명의 군중으로 녹여 버린다면, 브라이드의 검은 얼룩은 각자의 얼굴을 지운다기보다 상처 입은 얼굴들 사이의 연대를 만든다. 혼돈의 폭동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신호다. 이 지점에서 「브라이드!」는 오늘의 페미니즘 담론과 맞닿는다. 실제로 이 영화의 급진성은 시대 재현의 정밀함보다 감정의 직진성에 있다. 질렌할은 1930년대라는 배경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박물관식 영화보다, 그 시대와 지금의 감정 구조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훨씬 더 강조한다. 그래서 영화 안의 여성 폭력, 거부의 권리, 몸을 둘러싼 통제의 문제는 역사극의 소품이 아니라 현재형의 문제로 돌아온다. 영화가 때때로 너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은유를 정교하게 숨기는 대신, 누군가에게는 과하다 싶을 만큼 노골적으로 지금의 언어를 과거의 이미지 위에 포개 놓는다.
물론 바로 그 노골성 때문에 영화는 자주 삐걱거린다. 어떤 장면은 관념이 인물을 앞질러 가고, 어떤 대사는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발화라기보다 감독의 메시지처럼 들린다. 메리 셸리의 개입 역시 어떤 관객에게는 대담한 메타 서사로 읽히겠지만, 다른 관객에게는 영화의 호흡을 깨는 과잉 장치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실제로 여러 리뷰와 해설이 이 작품을 두고 ‘혼란스럽다’, ‘과장됐다’, ‘절반쯤 완성된 급진적 선언 같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런 비판이 대체로 영화의 실패를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 야심의 크기를 부정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브라이드!」는 무난하게 잘 만든 영화가 되기를 포기하는 대신, 차라리 과감하게 비정상적이고 논쟁적인 영화가 되기를 선택한 작품이다.
시각적으로도 이 영화는 상당히 공격적이다. 로런스 셔의 촬영, 힐두르 그뷔드나도티르의 음악, 아트데코와 지하 실험실, 네온과 어둠의 대비는 이 작품을 고전 호러의 리바이벌이 아니라 일종의 펑크 고딕 뮤지컬처럼 보이게 만든다. 워너브러더스의 공식 장르 분류에 음악/뮤지컬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흰 머리와 타버린 듯한 눈썹, 검은 얼룩, 조명 아래 번지는 피부 톤은 모두 브라이드를 예쁘게 포장하기보다 불안하고 강렬한 존재로 각인시키는 요소들이다. 이는 여성 캐릭터를 대상화된 아름다움으로 다루는 대신, 위협적일 만큼 살아 있는 이미지로 바꾸려는 영화의 태도와 연결된다.
배우들의 연기도 이 영화의 결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제시 버클리는 단순히 ‘신부’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몸의 어색함과 폭발성, 부드러움과 위협성을 함께 보여 준다. 크리스천 베일은 프랭크를 괴물의 육체와 아이 같은 고독이 공존하는 인물로 만들어 내며, 이 둘의 조합은 때로 로맨스처럼, 때로 동맹처럼, 때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극처럼 흔들린다. 이 덕분에 영화의 과장된 설정 안에서도 인물은 완전히 추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아네트 베닝이 연기한 유프로니우스 역시 흥미로운 존재다. 대개의 프랑켄슈타인 계열 서사에서 과학자는 신의 자리를 넘보는 남성적 오만의 상징으로 읽히곤 했다. 그러나 「브라이드!」는 이 역할을 여성 과학자로 바꾸며 의미를 뒤틀어 놓는다. 그 결과 창조 행위는 단순한 지배의 은유에 그치지 않고, 보살핌과 야심, 연민과 개입이 뒤섞인 복합적 행위로 바뀐다. 특히 결말부에서 영화는 여성들이 서로를 다시 살려내는 연합과 협업의 이미지를 강하게 남긴다. 남성이 혼자 세상을 창조하는 신화가 아니라, 여성들이 함께 죽은 것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이야기. 「브라이드!」가 겨누는 방향은 바로 그 지점인듯 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성공했는가. 상업적으로 보면 답은 냉정하다. 박스오피스 모조와 AP, 버라이어티 보도를 종합하면 「브라이드!」는 약 8천만~8천5백만 달러 규모의 제작비를 들였음에도 개봉 첫 주말 북미 730만 달러 안팎, 전 세계 약 1천360만 달러 수준의 저조한 출발을 보였다. 이후로도 영화는 대중적 인기를 끌기는 어려워 보이고, 최근 초기 흥행을 못한 경우 OTT로 조기 유입되는 현상이 반복되는 영화계 상황을 보면 흥행은 쉽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이 수치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브라이드!」는 애초에 폭넓은 대중적 합의를 끌어내는 안전한 상품이라기보다, 작가주의적 욕망이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얼마나 멀리 밀어붙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가 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대형 스튜디오 영화가 어디까지 낯설고 불온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실험에 더 가깝다. 흥행 참패는 그 실험의 실패를 뜻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실험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브라이드!」는 시간이 더 필요할 가능성이 큰 영화다. 극장 흥행에서는 패배할 수 있지만, 장르 팬덤과 비평 담론, 스트리밍 이후의 재평가 국면에서는 전혀 다른 생명을 얻을 여지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처음 볼 때보다 두 번째, 세 번째에 더 선명해지는 종류의 영화일 수 있다. 메리 셸리의 개입, 브라이드의 얼굴 표식, 프랭크의 영화 사랑, 여성 군중의 등장, 결말의 애매한 부활 가능성은 모두 한 번의 관람으로 매끈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미완성과 과잉이 컬트적 생명력을 만든다. 정답처럼 소비되는 영화보다, 계속 해석하게 만드는 영화가 오래 살아남는 법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남기는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괴물인가. 죽은 여성을 다시 살려 자신이 원하는 관계를 얻고자 하는 욕망인가, 그 욕망에 저항하는 폭력적 여성인가, 아니면 여전히 여성을 말 없는 이미지로만 소비하고 싶어 하는 오래된 문화 전체인가. 「브라이드!」는 이 질문에 손쉬운 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괴물의 자리를 계속 옮긴다. 처음에는 프랭크가 괴물처럼 보이고, 곧 브라이드가 위협적으로 떠오르며, 마침내는 사회의 규범과 시선, 소유의 논리가 더 근본적인 괴물처럼 드러난다. 이때 영화는 프랑켄슈타인 서사의 고전적 공포를 계승하는 대신, 누가 누구를 인간으로 승인하고 누가 누구를 쓸모 있는 몸으로만 규정하는가라는 훨씬 현대적인 공포로 옮겨 간다.
결국 「브라이드!」는 잘 만든 영화인가보다, 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매기 질렌할은 고전 속에서 말도 하지 못했던 신부를 무덤에서 꺼내 왔고, 그 손에 꽃다발 대신 자기 얼굴을, 자기 목소리를, 자기 분노를 쥐여 주었다. 그 결과 탄생한 영화는 정돈되어 있지 않고, 친절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때로는 과도하게 추상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영화는 늘 조금 불편하고, 조금 과하고, 조금 위험하다. 「브라이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다루는 인물과 닮아 있다. 예쁘게 완성된 신부가 아니라, 찢기고 얼룩지고 되살아난 뒤 비로소 자기 이름을 말하기 시작하는 존재. 그러므로 이 영화의 가장 정확한 평가는 어쩌면 이것일지 모른다.
「브라이드!」는 괴물의 신부 이야기라기보다, 누군가의 신부로만 남기를 거부한 여자의 탄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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