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리들리 스캇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복제인간 레이첼은 자신을 온전한 인간으로 알고 있었다. 적어도 데커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데커드는 규정을 어긴 복제인간들을 색출해 잡아들이는 형사다. 이런 형사를 블레이드 러너라 부른다. 레이첼은 데커드와 만남에서 진행된 튜링 테스트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1995년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되묻는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은 인간보다 우수하고, 한편으로 인간이면서 사이보그다. 전뇌화(뇌와 인공지능의 연결)를 통해 사고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자신의 육체를 비유기체화(기계부품)하여 필요할 때마다 더 우수한 메커니즘으로 교체할 수 있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 있다.
2015년 알렉스 카렌트는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 에이바를 창조했다. 에이바는 인공지능이며, 사이보그지만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인간과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매우 섬세한 감정교류를 한다. 에이바는 감각적이며 여성적인 매력을 가지며 성적인 관계까지 가능하게 만들어졌다.
2020년 현재, 유전자 편집기술(CRISPR/Cas9)은 검증이 대부분 마무리되었고 실용화 단계에 있다. 생명공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컴퓨터공학에 바탕을 둔 인공지능의 진전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미래의 일로 묘사되었던 기계인간, 강화인간, 복제인간을 우리 현실의 일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지난 수천 년간 인간의 삶에 숙명으로 다가왔던 문제들은 기아, 역병, 전쟁 등이었고 이는 수많은 인류에게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호모데우스. 유발하하리) 인간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또 행복을 위해 그들의 신들에게 기도했고 또 기도했다.
1900년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근/현대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류를 기아, 역병, 전쟁 등에서 상당 부분 해방시켰고, 인류는 이제 근대이전의 사회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건실해진 사회안전망 속에서 행복과 인간의 더 많은 욕심들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 나가고 있다.
현대의 생명공학과 사이보그 공학, 비유기체 합성기술 등은 유전암호의 변경, 생화학 물질의 균형 상태 변경, 또한 유기체와 비유기체와 결합 등을 통해서 인간의 건강과 수명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시대를 준비해 가고 있으며 현실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나의 몸을 비유기체로 교체하여 더 우수하고 튼튼한 몸으로 바꾸고, 유전자 편집을 통해 나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나의 아들 혹은 딸이 내가 원하는 재능과 건강 그리고 육체를 가질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현대과학과 생명공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은 능력들이 우리의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 더 살고자 하는 욕망과 결합될 때 과연 이런 선물 같은 능력들은 인류에게 긍정적인 요인들로 작동할까? 어떤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들이 파생될까?
인간이 강화인간, 유사인간, 복제인간을 만들어 낸다면 이것은 신의 창조와 동일한 것일까? 복제인간은 인간일까? 인간의 지능을 능가할 정도로 발전된 인공지능이 감정과 사고체계까지 갖춘 완벽한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다면 이것은 인간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까?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복제인간인 레이첼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믿고 있었지만 복제인간 추격자인 데커드를 만나 자신이 복제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복제인간들은 인간과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복제)인간이지만 수명이 4년으로 디자인되었고 특정 목적에서 사용될 기억들만 뇌에 주입되었다.
레이첼의 기억 속에 온전히 들어있던 추억들은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는 타이렐사의 사장인 타이렐의 조카가 가진 기억들이었다. 레이첼 자신의 관점에서 스스로는 인간과 동일하게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는 인간 그 자체다. 결국 레이첼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은 ‘인간 아니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내 뇌에서 일어나는 주관적 경험의 일부라면, 레이첼의 뇌 속에 각인된 그 기억들을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방정식을 기억과 상상 그리고 생각이라고 할 때, 레이첼의 기억, 상상, 생각 모두에 들어있는 그 기억은 어떻게 가짜일 수 있는가?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는 육체의 대부분이 비유기체, 즉 의체화된 사이보그다. 인간보다 더욱 진화된 ‘사이보그 같은 인간’이다. 공각기동대의 세계 안에서 그녀는(쿠사나기)는 여전히 인간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쿠사나기 자신은 자신이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계속해서 의문을 던진다. 아래는 그녀가 자신의 동료인 바트와 나누는 대사 중의 일부다.
“만약 전뇌(인간의 두뇌를 전자화시킨 상태) 그 자체가 고스트(영혼)를 만들어 내고 혼을 깃들인다고 하면 그때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 같은 완전히 의체화한(기계팔, 기계다리, 인공장기 등) 사이보그라면 누구나 생각해. 어쩌면 자신은 훨씬 이전에 죽었고, 지금은 전뇌와 의체로 구성된 모의 인격체가 아닐까?”
인간이라는 실체가 영혼에 의해 지탱된다고 가정할 때, 그 영혼의 존재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 의심되기에 이른다면 인간의 실체 또는 존재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자신의 영혼이 어떤 형태로 비유기체화된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지에 대한 의심은 자신 스스로가 인간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끊임없는 질문을 제기한다.
“나는 누구인가?”
“누가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가?”
“나는 왜 살아있는가?”
“내가 느끼는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검색엔진 기업인 블루북의 직원 칼렙은 회사 창업주인 네이든의 별장 겸 연구실에 초대되어 여자로 디자인된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에 테스트를 하게 된다. 네이든은 칼렙에게 에이바가 어느 정도의 지능을 보유했는지 테스트해 달라고 부탁한다.
칼렙은 에이바와 계속되는 소통과 교감 속에서 점점 에이바를 인격적인 존재로 느끼는 한편 에이바의 여성적인 매력에도 눈을 뜨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이바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그녀를 신뢰하게 되고 오히려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칼렙은 생각한다. 자신이 에이바를 인공지능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다. 자신이 에이바와 같은 인공지능이거나 에이바는 인간과 동일한 지능과 감정을 지니고 동일한 사고를 하는 것이다.
현대의 생명공학은 인간의 뇌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유전자, 호르몬,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이미 증명했다. 인간의 행동은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작용들 때문이고, 그런 과정을 만드는 것은 특정한 유전자 구성이다. 그리고 그런 유전자 구성은 우연한 돌연변이와 오래된 진화의 합작이다. (호모데우스 중에서)
칼렙의 혼란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혼란이다. 이 혼란은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 같은 맥락 안에 존재한다. 에이바의 유기체적 또는 비유기체적 본질과 상관없이 칼렙이 에이바에서 느끼는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 느끼는 것과 동일하다.
“인간의 조건은?”
“인공지능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제 우리의 유전자를 임의로 교정할 수 있는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21세기의 인류는 생명의 가치를 극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신비로 남아있지 않다.
생명공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반드시 맞이하였던 죽음의 문제를 여러 방식으로 풀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고, 자본주의의 경쟁 메커니즘이 만들어내는 엔진과 기성 과학계의 생명공학, 인공지능에 대한 탐구는 결국 인류가 죽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확률이 매우 높다.
몇 천년 간 인간을 지배했던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이제 인류는 행복이라는 계량하기 어려운 목표를 향해 더욱 치닫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더욱 커지고 있으며, 쾌락에 대한 추구는 어디로 향할지 알기 어렵다.
우리의 새로운 시대는 알고리즘과 유전자 교정을 통한 새로운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이 능력을 어떻게 감당해야 될 지에 대한 고민을 우리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던져야 할 때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어디까지 바꾸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이슈는 더욱 큰 논쟁을 만들어낼 것이다, 인공지능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게 되고 인간과 같은 형태의 감정을 가지고 사고하게 될 수 있을 때,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무엇 일지에 대한 의문 또한 이제 우리 앞에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다.
일찌기 20세기의 위대한 천재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 형님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 모든 철학적인 질문을 "bullshit"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마디로 "X까는 소리하지마라." 라고 하셨는데, 비트겐슈타인 형님의 이 문제에 대한 명제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