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
살다 보면 서운한 일도, 억울한 일도, 크고 작은 원한도 생기기 마련이다.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있다면 반드시 풀어야 한다. 용서보단 응징과 보상이 더 중요하지만, 그게 꼭 본인이 잘못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특정인에게 향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사과하지 않는다
일본은 전쟁 중 식민지 국가들에게 했던 반인도적인 행위를 배상은커녕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수많은 젊은 영혼을 진도 앞바다에 묻어 놓고도 정권 지키기에만 연연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이 나라를 구하겠다며 정권을 달라고 외친다. 전직 대통령 일인은 국민에게 발포한 책임을 부정한 채 그들을 폭도라 매도하고 있고, 전 재산이 수십만 원에 불과하다며 저택 속에서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공부하는 심리학자이지만 이런 사건들을 마주하면 머리가 혼란스럽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그들은 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 걸까?
정치 외교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심리학적 방법으로 그들에게 단죄를 할 수도, 양심을 일깨울 수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어차피 그들은 힘이 있는 자들이고 세상은 비정한 것이라고. 억울하면 너도 권력을 잡으라고 말이다. 불행히도 상대방이 사과를 하지 않는 한 우리가 사과를 받을 방법은 없다.
슬픈 추억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내 지나간 과거에 수많은 슬픔을 안겼던 사람들에게 나는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오랜 방황 끝에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했을 때, 나는 문화적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막상 대학원은 창의적 연구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세상을 놀라게 할 재미있는 성과물들을 만들어내는 젊은 천재들의 놀이터가 아니었다. 상명하복의 수직적이고 관료적인 연구실 시스템에서 유능한 대학원생이란 선배님들과 더 나아가 학계 큰 어른들의 의중을 잘 읽고 그분들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이십 년은 족히 반복되고 있는 것 같은 교육 과정과 온통 암기해야 할 규칙만이 가득한 고전적(?) 임상심리학 교과과정도 숨 막히는 것이었다. 대체 토론식 수업과 기존의 가치를 허무는 과학의 도전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무언가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난(?) 돌인지라 끊임없이 시스템과 충돌했고 그러는 사이 자연스럽게 임상심리학에 부적합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시절엔 열정이 있었다. 데이콤(지금은 LG유플러스 일 것이다)에 최초의 정신건강 콘텐츠 제공을 하기 위해 제안서를 들고 뛰어다녔고, 정신과 의사가 아닌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관계자들의 우려를 반복된 설득으로 돌파하며 그들의 투자를 이끌어냈다. 최초의 사이버 정신건강 서비스가 임상심리학의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다. 비록 현실은 너무나 답답했지만 인터넷이란 새 공간에서만은 심리학이 선두주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 하나로 석사과정을 불태웠다.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
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비스가 인기를 더해 갈수록 서버에 가해지는 부담은 커지고 그만큼 접속 오류가 증가했다. 돈과 인력 투자가 절실했지만 아이디어 말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심리학 석사과정생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점에 거대 신문사 계열의 인터넷 사업팀에서 투자 제안을 한 것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열심히 우리 웹사이트의 콘텐츠들을 소개하고 새로운 사업기획안을 제시하며 한 달을 미팅으로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날아온 메일 한 통은 본사의 투자계획이 바뀌어 당분간은 추진이 어려울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무척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진짜 절망의 정체는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뒤에나 확인할 수 있었다.
서서히 하던 일을 정리하고 앞으로 공부에 복귀할 계획을 세우다가 나는 그 거대 신문사가 정신건강 포털사이트를 오픈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도메인을 찾아 들어가니 그곳에는 내 석사과정 전체의 노력이 집약된 우리 웹사이트의 핵심 콘텐츠들이 아름다운 기술력과 디자인의 옷을 입고 박제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 자랑스러워했던 심리진단 기반 클리닉 검색시스템과 각종 정신건강 콘텐츠가 단어 몇 개만 바뀐 채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곳 제작진 명단 어디에도 나의 존재는 찾을 수 없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 정신과 교수님들의 사진이 자문 위원단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내 젊은 날의 호기롭던 도전은 종말을 맞았다.
그다지 눈물이 나지도, 그다지 화가 나지도 않았다. 애초에 누구나 일단 구경만 하면 따라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무슨 나만의 큰 재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 게 어리석었다. 오직 나만이 제공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어야, 그리고 그 콘텐츠를 대중에게 설득시킬 정도의 사회적 공신력이 있었어야 가능한 도전이었다. 그냥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왜 나는 분노하지 않았을까? 사실 그 분노라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중소기업 사장님들이 평생 노력해 개발한 지적 재산들을 대기업에게 부당한 대가로 빼앗기고 있겠는가? 큰돈을 투자하지 않은 사업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절망 속에서 찾은 '오기'
너무나 압도적인 대상에게 반복적으로 억압을 당하다 보면 강한 자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스스로에게만 가혹해지는 ‘착한 아이 증후군’에 빠진다고 허지원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한 바 있다허지원, 2018.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나는 거대 신문사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자금력을 가졌다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항의할 아무런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부당함을 지적하지 못한 대가는 너무도 컸다. 모든 분노는 스스로에게 향하고 나는 심한 무기력의 터널에 빠지고 말았다. 허 교수는 ‘착한 아이 증후군’의 가장 큰 부작용으로 스스로를 좋은 성취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현상을 지적하였다.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강자들에게 하지 못하는 모든 비난을 '당해도 쌀 정도로 모자란'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야 할 스스로가 자신을 가장 무시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모두가 가기 희망하는 수련기관들은 감히 내가 도전할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모두가 선망하는 병원들의 선발시험을 지레 포기하였다. 자신은 없었지만 워낙 수련 경쟁률이 높지 않던 시기이기에 선발 시험도 없고 경쟁도 높지 않았던 기관들에 원서를 내 보았지만 다른 길에 정신이 팔려 살아온 궤도 이탈자에게 손을 내미는 곳은 없었다. "선발하지 못해 유감이다"라는 선배님의 말이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수련 재수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평상시 친분이 있던 선배 형님을 찾았다. 누구보다도 우리 학계에서 적응을 잘하고 촉망받고 있던 분이었기에 무언가 조그만 희망의 메시지라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형님의 조언은 차갑고도 단호했다.
“아쉽지만 넌 이 경쟁에서 밀린 거야. 이 곳에서 뭘 더 기대하는 게 우습지 않니? 차라리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나서 네 능력을 발휘해 봐. 네가 우리 학교에 들어올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다른 곳에 가서 새 출발을 해도 무언가 이를 가능성이 있을 거야”
그냥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내년에 마음 추스르면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는 그 정도의 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 수치스러웠다. 적당히 포장된 말이었지만 결국 넌 가망이 없다는 표현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선배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 주먹으로 솟아난 것이다. 한순간 다른 길을 갔지만 난 내 인생에 최선을 다해왔다. 여기서 내가 발을 돌린다면 조금 다른 길을 걸으려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과 좌절을 학습시키는 사례로 남을 것이었다. “그래, 내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겠다. 여기서 조용히 퇴장하는 모습은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라고 말이다. 더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도주냐 투쟁이냐
외로운 재수생활과 어렵게 시작한 수련. 그 뒤의 학위과정과 수련 감독자 생활에서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의 상식으로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불합리함은 계속되었다. 학문의 전당에 다니면서 연구업적이 전혀 중요하게 평가되지 않는 대학원의 분위기는 병원에 가서 체험한 다른 학문분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선배에게 좋은 인상을 보이는 게 유일한 성공의 길이라는 숨 막힐듯한 문화야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이라 치더라도 과학자를 주장하는 우리 분야 학술지가 애송이 석사과정 학생들이 아마추어리즘 충만한 멘탈로 만들어간 졸업논문을 주축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었다.
임상현장에서 조우하는 대학병원의 의사들은 수시로 나에게 묻곤 했다. 너의 연구분야는 무엇인가? 네 분야는 요즘 어떤 업적을 내고 있는가? 해외 학술지 Impact Factor가 높은 저널에 연구업적을 쏟아내는 것이 과학의 가치는 아니겠지만 그걸 못하는 사람이 더 우수한 학자라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근거보단 임상가 개인의 경험과 권위에 의해 유지되고 전승되는 우리의 임상 실무들은 내가 의심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병원에서 진행형이었다. 아무것도 표준화되어 있지 않은 이 행위들로 환자의 인생에 결정적인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고전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문명에 도전받으며 끊임없이 경쟁하며 생존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MMPI와 로르샤하는 무엇의 도전과 경쟁하고 있는 것인가?
미국 임상심리학의 모습을 마치 우리의 모습인양 교과서에서 보고 진로를 선택한 모지란 학생에게 장학금은커녕 논문 진행을 위한 연구비 조차 알바나 용돈으로 조달해야 하는 연구실의 가난함은 악몽과 같았다. 논문을 쓸 때도, 학회를 갈 때도 언제나 부모님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더구나 멀쩡히 병원에 오는 환자들을 보는 석사 졸업생들에게 당당(?)하게 무급을 제공하는 이 수련 시스템은 또 뭐란 말인가? 왜 나는 차비조차 받지 못하고 이곳에서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의 선택지는 모든 유기체가 도전에 직면했을 때 하는 그 반응, 도주냐 투쟁이냐 둘 중 하나였다. 도주를 한다면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쌓아온 회원 및 유저들을 기반으로 임상심리학의 재야에서 게릴라적 활동으로 나만의 세계를 키워가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 이런 선택으로 성장하고 있는 후배님들도 제법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보란 듯이 돈도 벌고 지명도도 키워서 내가 실패하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재야에서 사사건건 학계의 무기력함을 조롱하며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내가 원한 길이 아니었다. 재수를 하는 1년여 동안 지나간 삶에 대해 되돌아보고 되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을 반복했다. 내가 진정으로 바랬던 것은 내가 공부하고 연구한 것들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얕은 지식을 남에게 전달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심리학 콘텐츠 사업에서 얻은 나의 실패는 나만이 얻을 수 있는 나만의 지식과 경험만이 세상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심리학계를 너무 사랑했다. 불합리한 게 있다면 피하기보다는 그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서 조금씩 내 소신을 펼치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이게 내 1년간 진행된 의도적 반추(deliberate rumination)의 결론이었다. 흔히 반추가 기분장애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부정적인 인지적 대처로 알고 있지만, 자신의 경험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스스로 노력하는 의도적 반추는 오히려 외상 후의 성장을 이끌어낸다고 한다(김지애, 이동귀, 2012; Calhoun & Tedeschi, 2006).
나는 '내부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비판만 하기보다는 뭐가 문제인지를 중심부에서 살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 손으로 그것들을 바꿔보고 싶었다.
나는 저 내부에 들어가야 한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한번 잘못 끼워진 단추를 바르게 되돌리는 것은 보통의 노력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적당한 취업자리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어쩌다 얻게 되는 일자리의 조건은 정말 열악하기 그지없는 경우들이 허다했다. 하지만 배우고, 체험하고, 성장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 조건만 충족한다면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지만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아무도 초청하지 않는 학회였지만 스스로 발표를 신청해 존재를 알렸다. 이미 누군가라 불러주길 기대하긴 틀린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떠한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하는 모든 경험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Linley와 Joseph에 따르면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는 부정적인 변화를 초래하지만 현실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태도는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했다. 내 삶의 실패와 좌절이 바로 공부였다(Linley & Joseph, 2011).
나는 정신과 내부에서 우리 심리실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체험하며 화를 내기 보다는 어떤 부분을 채워야 하는지 찾는데 애썼다. 국내 초일류대학 의대 출신들로 이루어진 병원에서 지내다 보니 그분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거만함이 느껴졌지만, 내 기분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과 자원을 끌어모으는 저들의 정치력과 기획능력을 배우는데 집중했다. 언젠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힘들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순간이었다. 대학을 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첫 번째 교편을 잡기까지 무려 열두 번의 원서작성과 낙방을 경험했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지원자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는 교수님들도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특정 지역을 지나갈 때는 울컥한 마음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조건화되어 솟구쳐 오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을 오래 간직할수록 나는 다음을 준비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의 경험을 오늘에 묻고 망각의 내일을 맞이하며 작은 진전을 위한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작은 변화라도 이끌어낼 수 있는 자리에 가는 그 순간까지 좌절은 그저 감정의 사치일 뿐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우여곡절 끝에 학계의 작은 한자리에 비집고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미약한 힘이나마 학회의 발전을 위해 보탤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다. 아직 너무나 가진 것이 없고 힘이 미약하지만 과거의 기억들은 하나도 잊지 않고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강의실, 지도교수도 어쩔 수 없는 약속과 규칙에 의해 통제되는 연구실, 학생의 취미가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검증된 연구사업을 통해 논문을 진행하는 전통들 그리고 그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는 대학원생들을 키우기 위해 노력 중이다. 장기적으로는 우리 임상심리전문가들의 역량을 높이고 어디에서나 존경받고 대우받는 귀한 인력으로 커나갈 수 있도록 학회의 시스템을 정비하고 있다.
문득 글을 쓰다 보니 무슨 긍정심리학을 옹호하는 글처럼 진행이 되었지만 나는 어떠한 좋은 생각이나 태도를 가졌기에 이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 믿음을 가질 만큼 낙관적인 사람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의 위기상황에서 생존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살아남았기에 그때의 오기와 열정이 의미가 있을 뿐이다. 수많은 계획과 의지로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다가 뜻을 꺾은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영역 속에 존재할 것이다. 그분들께 존경을 표한다. 내 의지는 생존에 필요조건이었겠지만 그걸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시련은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 준다. 지금도 열악한 연구환경은 심각하게 열악하다. 교수가 취미로 연구를 한다는 말이 사실일 줄은... 그래도 이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동안 지나온 삶에 비하면 학교가 주는 스트레스와 도전은 정말 귀여운 수준이다.
배운 게 있다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부족한 지도교수를 믿고 도와주는 우리 학생들 덕분에 과분한 일들을 무리 없이 해내고 있다. 사교성 없는 듣보잡 박사를 동료로 뽑아주신 데다가 수많은 실수와 사회성 부족으로 불편하실 만도 하건만 모든 걸 참고 도와주시는 학과의 선배 교수님들께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시련이 약이 될 수는 없지만 시련 속에서의 생존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Tedeschi & Calhoun, 1996, 2004). 나는 이걸 긍정의 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이건 생존의 미학이다. 그리고 긍정의 힘이라기보다는 오기의 힘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살아남은 것의 아름다움
요즘 부쩍 빈티지 시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시계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던 시절에 세상에 나와 무려 2020년을 맞이한 물건들을 보면 경이감마저 들 정도이다. 특히 지금 내 손목에 있는 우리 아버지 예물시계 롤렉스 데이저스트는 나보다 1년이 위인 내 형님이다. 대략 20여 년 전에 아버지가 장롱 구석진 곳에 넣으시면서 네가 차고 싶으면 언제든 가져도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스타일도 이상하고 왠지 노티 나는 저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이 싫어서 기억 속에 지우고 살아왔었다. 그러다 2019년 시계에 호기심이 생기던 그 시점에 온갖 고물 덩어리 사이에서 저놈을 찾아냈다. 아무리 봐도 작동될 것 같지 않은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런데 약간 흔들자마자 바로 작동이 시작된다. 20년을 침묵하고 있던 그 고물이 죽지 않고 살아있던 것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20년을 버려두었는데 너는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이겨내고 있었구나. 찡한 감동이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롤렉스 AS센터를 찾았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혹시 뭐 대체 부품이라도 있을까 하여.
내 예상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50년을 향해 가고 있는 이 고물의 판매 이력과 수리이력이 본사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고, 호텔을 연상시키는 멋진 서비스센터에는 정복을 입은 직원들이 조심스럽게 시계를 점검해주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모든 부품의 재고가 지금도 넉넉하게 있다는 것. 천문학적(?) 수리비를 지불했지만 오버홀과 폴리싱을 마친 20년 만에 세상에 나온 롤렉스는 광채 찬란한 명품으로 거듭나 있었다. 그날로 나는 롤렉스의 지지자가 되었다.
비싼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롤렉스의 10배도 넘는 시계들이 즐비한 현실이다. 중요한 건 40년이 넘은 제품이 내가 가진 21세기에 나온 여러 시계보다 더 시간이 정확하고, 방수와 항자성까지 갖춘 내구성에 심지어 고급지게 멋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켜주는 회사와 애호가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시계가 그 모진 방치의 시간을 이기고 생존했음에 존경을 표한다. 어딘가 방치되어 있을 인재를 찾아내고 그의 가치를 발견해주는 것이 또한 나의 역할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어느 날 내 쓸모가 다해 은퇴를 앞둔 어느 날 나도 '고물'이 아닌 귀한 '빈티지'의 미를 발산하며 교단을 내려오길 감히 희망해본다.
준비하는 책이 대박 나 여유가 생긴다면 내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하는 롤렉스 하나를 사고 싶다. 비싼 게 아니라도(근데 다 비싸다) 좋고 신제품이 아니라도 좋다. 롤렉스가 아니면 빈티지 오메가라도 하나 마련하고 싶다. 그것에서 새로운 생존의 감동을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을 아내가 이해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책을 많이 파는 게 먼저일 것이다.
누구에겐가 사과를 받고 싶냐고? 글쎄... 누가 나에게 특별한 잘못을 했단 말인가? 그분들은 그분들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았을 뿐인 것 같다. 그때의 경험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소중한 가르침이 되었다. 그리고 만일 불만이 있다면 난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다. 그저 그분들에겐 잘못이 없다. 잘못은 그분들이 열심히 유지하고 지켜내려 애썼던 불합리한 시스템이다. 난 모든 책임을 그 시스템들에게 묻고 싶다. 그 구체제의 막을 내가 내려드림으로 모든 것을 정산하려 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mind
<참고문헌>
김지애, 이동귀 (2012). 외상 후 성장 집단의 판별 요인 연구. 상담학연구, 13(4), 1845-1859.
허지원(2018).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서울: 홍익출판사.
Calhoun, L. G. & Tedeschi, R. G. (2006). Handbook of posttraumatic growth. MahWah, NJ: Lawrence Erlbaum Associates.
Linley, P. A. & Joseph, S. (2011). Meaning in life and posttraumatic growth. Journal of Loss and Trauma, 16(2), 150-159.
Tedeschi, R. G. & Calhoun, L. G. (1996). The posttraumatic growth inventory; measuring the positive legacy of trauma. Journal of Traumatic Stress, 9, 455-471.
Tedeschi, R. G. & Calhoun, L. G. (2004). Posttraumatic growth: Conceptual foundations and empirical evidence. Psychological Inquiry, 15, 1-18.
최승원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 | 임상심리 Ph.D.
덕성여대 심리학과 부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임상심리학은 반드시 생물-심리-사회적 접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기에 언젠가는 심리학이란 이름보다 더 발전적인 개명이 필요하다고 믿는 심리학자. 상담센터와 정신과병원을 거쳐 대학에 와있는 이분야 진로탐험의 교과서적인 인물이나 진로상담보다는 괴팍한 연구자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람. 기분장애와 B군 성격장애가 주요연구관심분야이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떤 곳에서든 최선을 다할 멀티 플레이어.
>> 한국인을 위한 심리학 잡지, <내 삶의 심리학 mind> 온라인 사이트가 2019년 7월 8일 오픈하였습니다. 내 삶의 비밀을 밝혀줄 '심리학의 세계'가 열립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100명의 심리학자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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