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경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임상심리전문가
예술가들은 정신장애가 많다고 하는데 사실일까요? 고흐가 그랬듯이 정신장애가 위대한 예술품을 탄생시키는데 어떤 역할을 했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정신질환을 치료하면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상담치료 받아보라니깐!
약 십 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작가 지망생이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예술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종종 그러하듯 그도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나중에는 양극성장애로 진단받았습니다). 당시 마침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저는 심리학 전공자라면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정신과나 상담치료를 받아보라고 여러 번 권했습니다만, 그는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혼자서 버텨보겠다고 얼버무렸지요.
나중에는 결국 답답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약간 화를 내며 다그치자 그가 한 말은 이랬습니다. 지금 자신은 자기가 느끼는 우울한 기분을 기반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자신의 예민함과 우울한 감정이 다 사라지면 작업을 못하게 될까 봐 두렵다고요. 그러니까 우울증이 없어지면 자신의 예술 원천이 사라질까 봐 선뜻 상담치료를 받기 어렵다는 거였습니다.
음, 뭐랄까… “그게 말이 되냐?” 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좀 맥 빠지는 대답이었고, 당장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요. 하지만 어쨌든 예술 분야라고 하니 함부로 말을 얹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반대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는 솔직히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거기에다가 잘못 말했다가는 어쩐지 예술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까지 더해져, 저는 그 날 ‘그렇구나’ 하고 그 순간을 넘겼습니다.
이후로도 저는 다양한 예술 분야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바는 이랬습니다. "예술대에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정신장애가 있는 (속어로는 '정병러'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많이 온다, 게다가 예대에서는 자기가 겪었던 트라우마나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작업 주제를 삼는 일이 많고, 그렇게 가르치는 교수도 많기 때문에, 여기 있다 보면 없던 ‘정병’도 생길 지경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작업의 원천인 우울함, 정서적 예민함, 정서 기복... 등등을 치료해버리면 정말로 예술적 창의성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껍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당시 저는 작가 지망생 친구 A에게 뭐라고 답하는 것이 좋았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가지기는 쉽지만, 경험적 근거를 가지고 답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도 다행히 이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서 미리 탐구해 본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미친 예술가’라는 오래된 환상
예술가들이 정신질환에 취약하다는 생각은 사실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생각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가 기원인가 거꾸로 쫓아가다 보면,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가들은 맬랑콜리하다’고 말했던 바 있지요. 이러한 생각은 그다지 도전받지 않고 현대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소위 예술가의 ‘광기’가 낭만적으로 해석되면서 은밀하게 권고되고, 강화될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제 친구 A가 생각했던 것처럼 우울증, 혹은 정신장애와 예술적 창의성이 과연 상관관계를 갖고 있었던 걸까요? 현재까지 이루어진 연구들을 살펴보면, 답은 ‘예’인 것 같습니다. 작가를 중심으로 예술가의 정신장애에 대해 연구했던 안드레아슨의 연구에 따르면, 작가 군은 일반인에 비해서 정서장애, 즉 우울장애나 흔히 조울증이라고 불리는 양극성 장애(bipolar disorder) I, II형을 갖고 있을 확률이 월등하게 높았다고 합니다(Andreasen, 1997).
무려 작가 군의 80%가 이에 해당됐다고 하는데, 주요 우울장애는 37%, 양극성 장애 I형과 II형이 각각 13%와 30%였다고 합니다. 2001년에 헝가리의 시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도 이와 비슷한데요, 연구 결과 시인 중 67.5%가 양극성장애의 진단기준을 충족하였다고 합니다. 일반인 집단에서 우울증 유병률이 7~10% 정도, 조울증 유병률이 각각 0.6~3%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높은 수준입니다(Czeizel, 2001).
예술적 창의성과 정신장애라는 까다로운 분야에 대해 아예 책을 한 권 써버린 아놀드 루드비히(Arnold Ludwig)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그는 『천재인가, 광인인가』(The Price of Greatness, 2018)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술계를 비롯하여 과학계, 공직(공무원), 군대 등의 여러 분야에서 창의적 업적이 큰 저명인사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이들의 창의성과 정신이상(광기) 사이의 관련성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지요.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저명인사 가운데 특히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반인에 비해 조현병, 양극성 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을 나타낼 가능성이 유의하게 높았습니다.
흥미롭게도 과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루드비히는 여성 작가를 대상으로 정신장애 발생 비율을 연구하기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작가 군이 비작가 군보다 우울증, 조증, 공황발작 등의 증상을 훨씬 많이 보고했습니다.
우울증이나 양극성장애와는 다른 성격이긴 합니다만, 정신장애-창의성의 연구 계보 중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어 온 정신질환인 조현병도 빼놓을 수가 없겠습니다. 특히 21세기 들어서는 유전학과 뇌과학에서도 조현병과 예술적 창의성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있습니다. 짧게 하나만 살펴보자면, 2015년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조현병과 조울증에 대한 유전적 위험성이 창의성과도 연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Power et al., 2015).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An Atlas of Depression,2001)의 저자인 앤드류 솔로몬(Andrew Solomon)은 마음의 고통과 예술적 창의성에 대한 강연을 하던 중 다음과 같은 일화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조현병이 있는 동생을 가진 작가 A와 앤드류 솔로몬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대화 중 A가 "뭐, 걔(조현병 있는 남동생)랑 나랑 정신세계가 똑같잖아!"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자, "음, 걔도 나도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나름의 방법으로 무진 애를 쓰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속에서 살고 있고. 차이점이라면 나는 그걸 진짜로 믿지는 않는 대신 글로 쓴다는 거고, 내 남동생은 진짜 믿는다는 거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신장애와 창의성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화라 하겠습니다.
자, 이처럼 정신질환과 높은 수준의 창의성이 서로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대중적으로 흔히 받아들여지는 통념인 동시에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지면에서 예술성과 창의성을 연구했던, 고마운 선행 연구자들을 모두 거론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종합해 보자면 현재까지 연구를 통해 창의성과 관계가 있다고 입증된 정신질환은 경조증, (과거의) 우울증, 조현병 스펙트럼(연구에서는 schizotypy로 기술) 등이 있다고 합니다(Flaherty, 2011).
정신질환 치료가 창의성을 줄일까?
그런데 제 친구 A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에 대해서는 아직 답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연 정신질환을 치료받으면 창의성도 줄어드는 걸까요? 더 위험하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져보자면, 정신질환이 창의성의 원천이니, 예술가들은 치료를 받지 말고 내버려 두는 편이 좋은 걸까요?
A의 말을 들은 뒤 10년이나 지나 버린 늦은 대답입니다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아니오’가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앞서 언급된 연구들에서 증명된 것은 정신장애와 창의성이 맺는 어떤 ‘관계’ 일 뿐, 인과관계는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과 예술적 창의성이 높은 사람의 교집합이 크기는 하지만, 정신장애가 창의성을 높인다든가, 창의성이 높으면 정신장애가 발병하게 된다든가 하는 인과론적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사실 창의성과 정신질환 간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무엇 하나가 증가하면 다른 하나가 감소한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설명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증상을 방치하였다가 심한 수준의 정신질환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주요 우울장애의 대표적 증상 중에 사고력, 집중력의 저하, 무기력이 있다는 것은 아주 잘 알려져 있지요. 이러한 증상이 창의적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겠지요. 조현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손상되어 있는(전문용어로는 현실 검증력이 손상되어 있다고 하는데) 급성 삽화기(actue episode)의 경우, 치료가 우선되어야 생활이든 예술활동이든 할 수 있다는 점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러면 활기와 높은 에너지 수준, 높은 자존감으로 대표되는 조증(mania)은 어떨까요? 조증 증상은 확실히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빈센트 반 고흐도 조증 기간에 그린 그림이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예술 애호가로서 이런 낭만적 해석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1979년의 한 연구에서는 양극성 장애(조울증) 진단을 받은 24명의 예술인을 대상으로 리튬을 복용하고 증상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그들의 예술적 생산성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관찰하였습니다. 치료가 종료된 뒤 결과를 살펴보았더니, 24명 중 절반인 12명에게서는 통념과 다르게 증상이 치료된 후 생산성이 매우 높아지는 결과가 관찰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입원이 필요할 만큼’ 극심한 증상인 조증 상태인 것과 그 자체로는 입원이 필요할 만큼 심하지 않지만 평소보다는 확실히 에너지 수준이나 목표지향적 활동, 자존감이 증대되어 있는 상태인 경조증 상태인 것은 다르지 않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즉 ‘아주 심하지만 않으면’ 되지 않느냐는 논리인데요. 안타깝지만 이 역시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대부분의 정신장애가 그렇듯 경조증~조증 증상이 발생할 경우 (일시적인) 인지기능 저하가 발생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극성장애의 조증 혹은 경조증 – 우울 – 유쾌(Euthymic) 상태에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인지기능과 관련된 검사를 실시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신장애가 없는 집단과 비교했을 때 세 집단 모두 유의하게 낮은 수행을 보였다고 합니다(Martínez-Arán et al., 2004).
예술을 위해 삶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현재까지 보고된 연구 결과를 모두 살펴보아도 아마 A의 질문에 어떠한 의문의 여지없이 완벽하게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들은 정신질환의 고통이 창의성을 높여준다는 것이 일종의 낭만적 환상일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의성의 원천에는 ‘정병’만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창의성을 연구한 스콧 베리 카우프만과 캐롤린 그레고어(Scott Barry Kaufman, Carolyn Gregoire)의 책 『창의성을 타고나다』(Wired to Create,2016)는 고도의 창의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열 가지 특징을 다루고 있는데 각각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상 놀이, 열정, 공상, 고독, 직관, 경험에 대한 개방성, 마음 챙김, 민감성, 역경을 기회로 바꾸기, 다르게 생각하기.” 정신장애와 예술적 창의성의 관계를 1대 1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예가 될 것 같네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은 독특한 집안 내력을 가지고 있는데요. 가족 내에 예술 관련 직업에 종사한 사람이 많았고, 또한 상당수가 자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토마스 만의 누이 두 명과(한 명은 연극배우였습니다) 자식 중 두 명(각각 작가와 바이올리니스트였습니다)이 자살로 세상을 떠났거니와, 이 외에도 각종 약물 중독이나 정신장애의 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토마스 만 본인도 죽음과 자살, 각종 신경증적 증상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서 자기 사고(思考)의 지배권을 죽음에게 내맡겨서는 안 된다”라고 적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자신의 작품을 쓸 수 있었던 사람은 그 집안에서 오로지 토마스 만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자, 10년 정도 늦기는 했습니다만, 이제 A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어느 정도 간략하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 정신질환과 창의력이 관련이 있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그 두 가지가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며,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히려 고통을 떠안고 있는 것은 예술적 자질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요. 게다가 예술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정병’을 원천 삼는 것 말고도 많습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예술과의 어떤 연관성을 잃을까 봐 고민하는 분이 계시다면, 걱정 말고 가까운 상담센터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으시기를. 물론 우울증이나 불안증 하나 없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강박적으로 추구해야 할 필요는 없고, 무조건적으로 삶을 사랑하기만 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술을 위해 삶을 희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심지어 그것은 예술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mind
<참고문헌>
Andreasen, N. C. (1997). “Creativity and mental illness: Prevalence rates in writers and their first-degree relatives. Eminent creativity”, everyday creativity, and health, 7-18.
Czeizel, E. (2001). “Aki költő akar lenni, pokolra kell annak menni?: magyar költő-géniuszok testi és lelki betegségei”, Táncos Grafika.
Flaherty, A. W. (2011). “Brain illness and creativity: mechanisms and treatment risks.” The Canadian Journal of Psychiatry, 56(3), 132-143.
Martínez-Arán, A., Vieta, E., Reinares, M., Colom, F., Torrent, C., Sánchez-Moreno, J., Salamero, M. (2004). “Cognitive function across manic or hypomanic, depressed, and euthymic states in bipolar disorder.”,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61(2), 262-270.
Power, R. A., Steinberg, S., Bjornsdottir, G., Rietveld, C. A., Abdellaoui, A., Nivard, M. M., Willemsen, G. (2015). “Polygenic risk scores for schizophrenia and bipolar disorder predict creativity.” Nature neuroscience, 18(7), 953.
임민경 범죄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관 | 임상심리전문가
독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현재는 임상심리전문가로서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언제나 누군가의 애독자이자 무언가의 애호가이며, 트위터 그만두어야 한다고 매일 말하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트위터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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