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어머니가 저를 부르시더니 장롱에서 꺼낸 통장 두 개를 보여주십니다.
자식들이 매달 조금씩 보내드리는 생활비를 넣어 둔 통장이라고 하시면서요.
비밀번호를 알려주시며 혹시라도 어머니가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시면 장남인 저보고 찾아 쓰라고 하시더군요.
그 때만 해도 어머니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었기에 무심코 듣고 넘겼습니다.
통장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있었는데 아마 비상시를 대비해 아끼고 아끼며 모아두신 것 같았죠.
어머니께 치매 증상이 나타나고 어머니 댁에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서랍을 열어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어머니가 말씀하신 통장이 나오기에 잘 챙겨두었습니다.
어머니가 다니시는 보호센터 이용료는 매달 25일에 납부를 합니다.
25일이 다가오자, 그 통장이 생각나 은행으로 가보았습니다.
ATM기에 통장을 넣고 오래전 어머니가 말씀하신 비밀번호의 기억을 되살려 네 자리 숫자를 입력해 봅니다.
다행히 돈이 출금되었고 다음 은행으로 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ATM기에 통장을 넣고 똑같은 비밀번호를 입력합니다.
그런데 화면에 틀린 비밀번호라는 메시지만 나타나고 돈이 출금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다른 비밀번호를 설정해 주신 모양입니다.
엄청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은행 창구로 가서 상담해 봅니다.
그런데 비밀번호 변경은 본인이 와야 가능하다는군요.
어머니 통장인데 90이 넘으셨고 거동도 불편하시다고 사정을 해 보았지만, 은행 직원은 규정상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께 비밀번호를 여쭤보았지만 역시 걱정하던 대로 전혀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도어락 비밀번호도 잊으셨는데 통장 비밀번호를 기억하실 리 없죠.
다행히 통장 2개 중 하나는 입금과 출금을 할 수 있었기에 서두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어머니의 변화한 모습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마치 아이를 키우는 부모처럼, 저도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기 위한 적응 기간이 필요했으니까요.
하루하루 고민과 좌절, 걱정이 가시지 않는 나날이었습니다.
통장의 비밀번호 같은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죠.
그러다가 어머니 치과 진료를 마친 날, 어머니를 모시고 은행으로 향했습니다.
창구에 가니 직원이 어머니를 보고 친절히 맞아줍니다.
저는 비밀번호를 바꾸려고 왔다고 말했고, 직원은 서류 몇 장을 건네주며 작성하라고 하네요.
다행히 서류는 제가 작성하고 어머니는 서명만 하시면 된다고 합니다.
저는 변경할 비밀번호를 다른 통장과 똑같이 설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비밀번호는 제가 절대로 잊지 않을 만큼 의미 있는 숫자이거든요.
비밀번호 변경 절차는 20여 분 만에 끝났고, 저는 어머니를 보호센터로 모셔다드리고 다시 은행으로 돌아왔습니다.
통장을 조심스럽게 ATM기에 집어넣고 비밀번호를 눌렀습니다.
다행히도 ATM기의 뚜껑이 열리더니 제가 요청한 액수의 돈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통장을 정리해 보면 어머니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셨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죠.
저희를 위해 한푼 한푼 아껴 쓰고, 또 악착같이 돈을 저축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가 피땀 흘려 모아 놓은 돈은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자식이 아닌, 어머니를 위해 사용하고 있죠.
보호센터에 돈을 송금할 때마다 죄송스러운 맘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