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1∙08 낡은 설계도∙기둥과 서큘레이션 점검

미래를 위해 버티는 집

by 마음건축소

낡은 설계도의 기둥은

미래를 향해 서 있다.


“언젠가” 편안해지기 위해,

오늘을 조금씩 저당 잡히는 기둥이다.


돈과 안정, 안전한 선택들이

이 기둥에 매달려 있다.


“나중에”라는 말이

이 집의 공기를 채우는 동안,


오늘의 숨은

미래의 무게 앞에서 한숨이 된다.


불안이 재료가 되어 세운 미래의 기둥,

미뤄둔 행복으로 멀리 향하는 창문,

머물지 않은 채 항상 대비된 방.


그 주인 없는 방 앞에서

조용히 묻는다.


"나는, 지금 행복해도 될까?"


지난 시간,
닫힌 방 안. 낡은 설계도 위에서 나와 ‘나’는 보았다.
타인에게만 열려있던 밝은 공간,
조금 더 들어서면 자동으로 닫히던 문들,
그렇게 계산되던 거리,
그 사이로 고요히 흐르던 외로움의 동선을.
나는 자동문을 수동문으로 바꾸고,
닿지 않던 방 안에 앉아
‘지금’의 나를 살핀다.
피어오르는 햇살과 함께.

BUILD1 ∙ 8화의 시선은 기둥으로 옮겨진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미루게 하는 하는 기둥.
지금은 늘 대비하는 집.
그 긴장된 흐름을 따라가 본다.


나와 ‘나’는 축측도(Axonometric Drawing)를 펼친다.

이상하다.

전체 구도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다시 아이소메트릭(Isometric View)으로 확인한다.

역시나

‘언젠가’라는 ‘미래’를 향해있다.


미래의 안정, 미래의 성공,

미래의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위해,

지금의 많은 공간들이 축소, 연기, 포기되어 있다.


‘중심에는 굵고 단단한, 다른 기둥 하나가 서 있다.

안정, 안전, 성공
그래서 늘
“준비하는 삶”의 기둥


‘나’는 서른이 되던 해,
설계팀 리더가 되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나 실장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자리 잡았네.”
하지만, ‘나’에게 회사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다리 같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다.
아침 8시 30분, 휴대폰 알림이 울린다.
급여 입금. 점시시간, 자동이체 내역을 확인한다.
시본가주택자금 대출 이자, 연금저축, 보험료 등.
그리고 엑셀 파일을 연다.
투자 수익률과 연금 계좌 현황. 공식이 있다.
‘나’ 월급의
60%는 저축, 20%는 투자, 10%는 보험과 대출,
나머지는 경조사 등의 예비비.

문화, 여가, 품위유지 항목은 없다.

퇴근길.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삼청동을 지난다.
공연, 전시 현수막과 배너가 매일같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들러 볼까 하다가도 시간과 비용 앞에서 멈춘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전시가 있다.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Matisse: 1917-1941.
결혼 10주년, 실장 승진 기념으로
‘그’가 ‘나’ 모르게 준비한 여행이다.
비행기 표를 보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도 모르게
전시 일정에 맞춰 휴가를 옮기고,
미술관 근처 호텔, 전시장 동선 사진까지 보여준다.
‘그’가 말한다.
“마티스야.”
“이 시기 작품만 모아서 하는 전시래.”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며칠은 설렜다.
‘나’와‘그’는 오랜만에
‘미래’가 아니라 ‘그날’을 이야기한다.

그러던 어느 저녁,
식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본다.
세부 비용과 총금액.
‘나’는 그 숫자 앞에서 심장이 철렁했다.
‘나’가 말한다.
“이거… 지금 아니어도 되지 않아?”
‘그’: “왜?”
‘나’: “10주년이야, 20주년도 있고.”
“지금은 좀 과한 것 같아.”
‘그’는 화면을 보며 말한다.
“이 전시, 다시 안 와.”
“마티스 1917년부터 1941년까지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알아. 근데... 피곤하기도 하고...
이 돈이면, 다른 데 쓸 수 있잖아.”
‘그’가 누르며 묻는다.
“어디?”
‘나’: “집” “아이들” “노후” “이건 사치야.”
그 말이 방 안에 남아 공기가 차가워진다.
'그'가 말한다.
“나 이 정도 할 수 있는 능력 돼.” “아니 넘쳐.”
'알지.'
‘나’는 속으로만 대답하고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노트북을 들고 서재로 들어간다.
'그'가 노트북을 연다.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다.
얼마 후 ‘그’가 안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나’는 서재로 들어간다.
정성껏 준비해 두었던
항공권 검색 기록이 지워져 있고,
전시 링크는 즐겨찾기에서 사라져 있다.
화면을 바라보다
안방에 누워 있는 ‘그’의 등을 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미안함을 삼킨다.
‘고마워 자기. 나도 너무 가고 싶어.
근데 그런 큰돈을 쓰는 게 겁이 나.’

재테크 책을 펼친다.
이미 여러 번 접어둔 페이지.
“지금의 작은 소비가 미래의 큰 손실을 만든다.”
두껍게 밑줄 친 문장.
“그래, 잘했어.
그 돈이면 주식 몇십 주 더 살 수 있잖아.”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나’를 위로한다.
사실은 진짜 마음과 미래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한숨을 쉰 결과였는데.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 싸움은 여행을 두고 한 게 아니라,

언제를 살 것인가를 두고 한 거였다는 걸.


“조금만 더 모은 후에”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준비하면”


이라는 글귀들이 덧칠되며,

‘지금’ 만족과 안도는

늘 다음 순서로 밀려난다.


‘지금’은 항상 준비 중인 시간으로 남는다.


미래를 향해 서 있던 기둥이
그날,
조금 더 두꺼워졌다.


행복은 기둥 위쪽 어딘가,

아직 닿지 못한 높이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마음의 ‘나’:

“기둥에 적힌 말들을 보면,

음… 안심되면서도 굳는 느낌이야.”

“이걸 지켜야 안전할 것 같은데,

이걸 지키느라 늘 긴장해.”


이 집은 ‘살아가기 위한 기준’이 아니라

‘살기 전'에 견뎌야 하는

캔틸레버(Cantilever)처럼 작동한다.


한쪽 벽에만 고정되어 공중부양하고 있는

발코니 같다.


┃미래를 절대화할수록 현재는 주변화된다




집의 평면도를 다시 그릴 때마다,

현재의 방은 작고 미래를 위한 방은 커진다.


“은퇴 후의 삶”
“언젠가 누릴 여유”


미래가 적힌 방들은

거실 혹은 그보다 더 넓게 설계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크게 둔 미래 방들 대부분이

아직 비어 있다는 점이다.


가구도, 온기도, 주인도 없이.




‘나’의 캘린더에는

회의, 프로젝트 마감, 리포트 작성 일정이 빼곡하다.

또 하나의 캘린더에는


‘5년 후 이직, 10년 후 파트너십으로 독립, 15년 후 해외 거주’
그리고 난 후
‘버킷리스트-나중에 하고 싶은 거 다한다’


계획들이 미래 날짜에 붙어 있다.

마치 포스트잇처럼.


‘나’의 평면도에는

현재를 위한 방은 늘어날 틈이 없다.


대신

‘미래를 위한 방’들이 거실만큼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여유 있는 프리랜서 삶”
“해외에서 여유롭게 커피 마시는 나”
“이 정도 연봉” “이 정도 포지션”


구체적인 모습은 없이

숫자만 떠다니고 있다.


반대로,

오늘 페이지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요가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 지 3년이 지났고,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 지는 5년이 넘었다.
요가 복은 아직도 택배 상자 그대로이고,
중고로 산 기타는 방구석에 기대어 있었다.


어쩌다 야근 없이 퇴근하고 오면,

잠깐 TV를 틀었다가도

불안함과 어색함에

노트북을 다시 연다.


자기 계발 강의를 또 결제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공허함이 남는다.


“이렇게 준비하면 나중엔 좋겠지?”


스스로에게 묻지만,

그 ‘나중’이

어떤 그림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 밤,

‘나’는 문득 묻는다.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 방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던가?”


결국 떠오르는 그림이라곤

여전히 노트북 앞에서,


또 다른 미래 계획을 세우는

지금의 모습뿐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만들어야 해’만 있어.

그것으로 무엇을 느낄지는 비어 있어.”


지금의 방은 점점 더 협소해지고,

지금 행복할 공간은

우선순위를 잃어 간다.


지금을 살아가는 공간대신

‘준비하는 데’ 대부분의 면적을 양보한다.


┃살 자리를 양보할수록 살아 있음은 옅어진다




아이소메트릭 뷰로 내려다본다.

윈도 스케줄(Window & Door Schedule)도

함께 살핀다.


3차원으로 펼쳐진 집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안을 순환하는 공기의 흐름까지.


이 집의 창문 역시

미래를 향해 올려다보고 있다.


지금의 계절, 곁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가능성과

몇 년 뒤의

상상도에 시야가 맞추어져 있다.


“언젠가 같이 갈게”
“저 정도는 만들어 두고 함께 할게”


라는 문장이 창문을 덮고 있다.


그 문장이 목소리가 되어

빛과 바람의 온도를 식혀 버리고,

오늘의 기쁨은 창턱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창문은,

내일을 향한 기대와

불안만 골라 통과시킨다.


오늘을 걸러내는 필터 같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다.
아침 5시 50분.
알람 소리에 “아.. 더 자고 싶다” 하다가도
오늘을 통과해야 얻는 내일에 몸이 벌떡 일으킨다.

아이들이 들뜬 목소리로 외친다.
“엄마, 드디어 유치원 발표회야!”
그 순간 떠오른 건 발표회가 아니라
같은 시간에 잡힌 회의였다.
왜 하필 오늘일까.
그 사실을
아직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회의도 발표회도
기대가 아닌 먹구름처럼 겹쳐진다.
설렘은 사라지고
남는 건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
죄책감뿐이다.
‘나’는 들킬세라 웃으며 외친다.
아이들 톤으로.
“우리 챈, 우리 츄~엄청 신나겠네!”

사무실.
회의 중인데
창밖을 멍하니 내다본다.
마음과는 다르게 햇살이 좋다.
아이들은 지금 무대에 서 있을 것이다.
그리움, 죄책감 뒤에 익숙한 문장이 따라온다.
“지금 버텨야 아이들 미래가 안전해.”
아이들의 현재는 입시, 교육비, 숫자로 번역된다.
창으로 들어오는 오늘의 햇살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로 향한다.

집에 돌아온 밤,
“엄마, 오늘 발표회 사진 볼래?”
아이들이 사진을 보여준다.
밝은 얼굴, 당당한 자세.
늘 그렇듯
서운함은 그 사이 잊은 듯하다.
다행이다.
기특하다.
‘나’는 고마움에 미소가 지어진다.
“와, 우리 아기들 진짜 많이 컸네. 너무 이쁘고 멋있어.”
아이들이 쏙 안긴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한 삶이라는데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생각이 들어온다.
이 죄책감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빨리, 달성하자.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하자."
사랑하는 순간조차 책임으로 변환된다.

나: "따스한 모습인데,

왜 이렇게 시리게 느껴지는 걸까?"

마음의 '나':

"아이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내일을 짓고 있는 것 같아."

"아이들은 그걸 아는 것 같고."

"체온은 따뜻한데 마음이 다르게 해석해."


┃가장 가까운 것을 지키려다,

가장 가까운 것을 밀어낸다




아이소메트릭 뷰로 집을 다시 내려다본다.

그 안을 순환하는 동선.


하루는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길처럼 느껴진다.


그 길 위에 서서,

내일을 위해 오늘을 연습하는

들러리 같다.


아침에 문을 나설 때,

발걸음을 움직이는 것은

설렘보다 긴장이 먼저다.


현재의 성취도

“아직 모자라”로 번역되어

다시 불안의 연료가 된다.


불안 --> 더 열심히 --> 아직 부족함 긴장 --> 더 불안


마음은 항상 내일의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다.

┃내일을 확대할수록 오늘은 연습 무대가 된다


열심히 움직이지만

그것이

‘나’의 선택인지 모르겠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지만

그 미래가

원하는 미래인지 확신이 없다.


버티고 있지만

무엇을 위해 버티는지 흐릿해진다.


‘나’는 디렉터로서,
늘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통한다.
야근과 철야는 기본이라고 생각했고,
“이 정도는 해야 살아남지”라는 말을
농담처럼 달고 살았다.
30대 초반에는 그 말이
꽤 설득력이 있었다.
밤을 새워 만든 디자인이
1년을 책임지는 프로젝트가 되고,
덕분에 회사는 정기 도급을 유치하고,
그 안정이 곧 자존감이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패가 하나 늘어날 때마다
‘나’의 마음 안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함께 쌓여 간다.

철야가 이어지던 금요일 새벽 5시,
팀원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사무실에 '나'만 남는다.
멍하니 책상 위를 둘러본다.
예전에 찍은
해외 답사 사진, 팀 회식 사진, 상패 몇 개
그리고 공모전에서 받은 기념품들.
그런데 어느 사진에서도 ‘나’는
편안하게 웃고 있지 않다.
늘 카메라를 의식한 미소,
혹은 안도감의 미소가 전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받았는지도 모르는
건강검진 결과서가 보인다.
나이 40인데
신체 나이가 57세라고 적혀있다.
“우리 일이 그렇다더니” 하며 넘기지만,
“이게 내가 원하던 미래였나?”
“이미 나는 17년 후의 몸이라는데?”라는
생각이 찾아온다.
‘나’는 잠시 의자에서 몸을 뒤로 젖히고
천정을 바라본다.
“열심히는 했는데…
누구를 위해서였지?”라는 질문이
낯설게 들린다.

집에 돌아온 아침,
몸이 완전히 비어 버린 느낌이다.
집 거실 벽 한가운데 보드.
그 위에 ‘준비하는 삶’이라는 글이
처연하게 느껴진다.
할 일은 산더미인데,
동시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일도, 모레도, 이대로 반복되겠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작업장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다이닝을 보니 펜던트가 켜져 있다.
테이즐 위에 '나'를 위한
아침밥이 차려져 있다.
‘그’ 일 것이다.
하지만 감동보다는 가슴 저림이 밀려온다.
“회사에서 당신이 더 중요한 위치인데.”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친다.

해가 뜨는 오늘이,
분명 아름다운데,
‘나’의 오늘은 그저
내일이라는 공연을 위한
리허설처럼만 느껴진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
지금 느껴지는 감정,
지금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들이
모두 “나중에”라는 조건 안에서
흐릿한 배경처럼 밀려나 버린다.


┃기둥 위의 성공의 높이는 재지만,

기둥 아래 내팽개쳐진

자신은 재본 적이 없다


마음의 ’나’:

“이 집 안에서 주인의 자리가 비어 있는 느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거리를 두고 보면,

이 설계도는 전혀 새롭지 않다.


“착한 사람, 문제없는 사람, 유능해 보이는 사람”
감정을 미루고, 요구를 미루고, 진짜 마음을 미루던
패턴


그대로 확대되어,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는 설계로

옮겨온 것뿐이다.


┃행복을 미루는 삶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나중을 위한 관리자의 삶이다



5월이 가까워진 4월의 평일.
오전 회의 하나를 겨우 넘긴
커피가 식어갈 즈음의 시간,
휴대폰이 울린다.

전업주부인 친구이다.
“지금 잠깐 나올 수 있어? 네 회사 앞이야.”
잠시 후 덧붙인다.
“하늘이 진짜 예쁘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반가움과 함께
자동 반응이 올라온다.

‘참 여유 있다.
평일 낮에 산책이라니,
나는 늘 ‘아직’이라는 말 뒤에 서 있는데.…’

그때 문득 모니터 너머로 보이던 장면이 겹친다.
점심시간도 아닌데
천천히 걷던 사람들,
벤치에 앉아 햇빛을 받던 얼굴들.
‘나’는 늘 그들을
창밖의 사람들로만 분류해 왔다.

1시 17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다.
‘점심을 패스하면 되지 뭐.’
캘린더를 닫고,
팀 채팅에 남긴다.
“잠깐 식사”

회사 앞 작은 공원.
은행잎이 막 연두로 올라오고 있다.
정말 하늘이 유난히 맑다.
친구는 나를 발견하고 해맑게 웃으며 달려온다.

그 따뜻한 친구와 함께임에도
나란히 걷는 동안
마음이 계속 나뉜다.

‘이 시간에 이러고 있어도 되나?
메일 쌓이고 있을 텐데.’

그런데 동시에,

‘아, 너무 좋다.
숨이 이렇게 깊게도 쉬어지는구나.’

걱정과 안도가 교차한다.

30분 남짓 걷고 다시 회사로 돌아온다.
14시 10분. 놀랍게도 작업이 훨씬 수월하다.
머리는 맑고,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은
덜 공격적으로 읽힌다.
프리 스케치(Free sketch)는
부드럽게 이어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날 밤,
노트북을 덮으며
포스트잇 하나를 붙인다.

‘평일 낮 산책, 한 달에 두 번은 무조건’

큰 결심도,
인생을 바꾸는 선언도 아니다.
그저 일상의
작은 수정과 새로운 질문이 이루어진 날.

처음으로
‘미래를 위해 참는 현재’가 아니라
‘현재를 사니 미래가 조금 가벼워진’ 날이다.

서재에서 나와 거실 벽 한가운데,
굵은 글씨를 바라본다.

‘준비하는 삶’

그 기둥 덕분에
여기까지 버텨 왔다 믿는다.
동시에,
그 기둥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놀고 싶어.”

그래서 그 옆에 조그마하게 적어본다.

“카르페디엠(Carpe Diem)”


낡은 설계도에

수정이 일어났다.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그 불안이 더 이상

집 안의 흐름을

전부 설계하지는 못한다.


아주 사소한,

하지만 중요하게 느껴지는

변화이다.


아직 거대한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안정되면 그때 가서 쉴 거야”라는 말 대신,

“오늘도 조금은 괜찮게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루에 한 번 적어 넣기 시작한다.


그 질문 덕분에,

집은 처음으로 ‘머무를 가능성’을 허락한다.


‘삶이 멈춰 설 수 있는 여백’을 만든다.


여백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질문을 던진다.


“이 집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집이었나?”
“이 미래가 내가 진짜로 원하는 미래인가?”
“지금을 계속 미루는 것이 정말 옳은 선택인가?”
“이렇게까지 해야만 행복해질까?”


크지 않지만 고요하게 울린다.


아직 집은 바뀌지 않았다.

현재를 위한 방도 여전히 작고,

미래 방도 여전히 텅 비어 있다.


다만 설계도 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있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라는 감각.


그래서 ‘나’는


“남처럼 이뤄야 한다”
“안정이 최우선이다”
“망하면 안 된다”라는 문장들에


기대 그려 왔던

낡은 도면 위에

첫 손을 얹는다.


그리고 화이트로

몇몇 선을 조심스레 지운다.

다시, 고쳐 그린다.


너무 커졌던 미래의 방을 줄이고,

현재 방의 벽을 조금 밀어

여백의 공간을 새로 만든다.


지금,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여백 하나.


음악이 흐르거나,
그림이 놓이거나,
글이 쌓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


그 작은 고침이

설계도 전체의 균형을 새로 잡기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고정되어 있던 기둥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집의 모든 것들이

기울어짐을 멈추고


조금씩

지금, 여기에

세워 일으킨다.


지금과 나중을

함께 품는 시작이다.


미래의 해가
지금의 ‘나’를 비춘다.


그제야 궁금해진다.


“진짜 내가 원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미래의 ‘행복’은 지금의 ‘행복’이 아닐까”


지금을 다시 살기 시작할 때,

삶은 비로소 균형을 되찾는다

행복은 나중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포함할 때 지속된다


건축 일기

미래를 준비하는 삶에 익숙해진 ‘나’는
지금의 기쁨과 휴식을

늘 “나중”으로 미뤄 온 자신을 바라본다.

작은 일상,

평일 낮의 산책, 취소된 전시, 미뤄진 휴식 속에서
미래를 위한 준비가

철저한 버팀이 아닌

지금을 위한 비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설계도 위의 선 몇 개를 지우고,
현재를 위한 아주 작은 여백을 만든다.

삶의 중심이

미래에서 지금으로 아주 조금 옮겨졌다.
행복을 미루는 삶에서,
지금을 포함하는 삶으로의 첫 수정이다.




기둥 아래 눌려 있던 오늘을 마주하는 그때,
우리는 비로소 기둥을 다시 세우기 시작한다



회복과 성장을 돕는 심리적 사유와 통찰을, '마음건축소 · 인사이트룸'에 담아두었습니다.
함께 읽으면 이해가 깊어집니다.




다음 주 BUILD 1〈내 마음의 도면을 펼치다〉의 9화
‘낡은 설계도 · 진단 보고서’에서는
낡은 설계도의 종합 진단 시간으로 이어갑니다.


오늘도 마음건축소와 함께, 머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 당신 삶'이라는 공간이,
지금의 행복으로,
다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SUN드림


사진: Unsplash의 ot de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