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숨│나로 다시 발아하는 순간
오늘 우리는
삶의 모델하우스를 철거하는
첫 순간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깊은 관계가 무너지고,
상실이 드러나는 장면을요.
이는 아픔과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직면할 때,
마음은 비로소 공간을 얻고 길은 열리지요.
지금, 그 길을 여는 첫 빛의 조각을 찾아봅니다.
마음의 깊은 벽이 무너질 때, 혼란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 자리에 빛이 들어오면, 우리는 진짜 마음을 본다
무너짐의 순간
"막내야, 이번 주말에 올 수 있어?"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대답한다.
"네, 어머니.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어, 의논할 일이 있는데 너희는 좀 일찍 와야겠다."
전화를 끊고 남편에게 말한다.
"이번 주말에 본가 가야 할 것 같아."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늘 그랬다.
주말, 나는 새벽부터 움직인다.
시 부모님을 위해 오랜만에 반찬을 준비한다.
직장 생활도, 살림도 완벽하고자 했던 나는
두 시간 남짓 하여 뚝딱 만들어 낸다.
흐뭇하다.
“어머님이 좋아하시겠지.”
기대도 생긴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가볍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도 편안해 보인다.
시부모님은 거실에 앉아 계셨다.
“일찍 오라니까.”
“아.. 네.. 그게”
할 말도 못 하고 머리 안은 자책 모드로 바뀐다.
이유를 말할 새도 없이 본론을 말씀하신다.
“이 집 전세 기간이 끝나가니, 너희가 좀 해결해 줄 수 있니?”
내 손은 꼭 잡으셨지만 부탁은 아니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말
“다른 애들은 사는 것도 힘드니 모르게 하고.”
이전까지 평온하던 마음이 요동 친다.
때마침 다른 형제들이 들어선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들을 웃으며 맞이한다.
잠시 뒤, 불편한 마음을 감추려 혼자 조용히 주방으로 나온다.
이미 정리된 곳이지만 괜히 다시 만지작거린다.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거 막내가 해온 건데, 너희 나눠서 가져가라."
내 정성이 주인을 잃은 장면에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역시 막내 제수씨."
아주버님들의 속없는 칭찬 위로,
형님들의 차가운 시선이 얹힌다.
나는 수세미를 쥔 손을 멈춘다.
뜨거운 물에 젖은 손이 차갑게 식어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나는 창 밖만 바라본다.
남편이 묻는다.
"괜찮아?"
"응."
"고생했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늘 반복되는 상황.
기대하고, 실망하고 서운해도
말하지 못했던 시간들.
그래서 화가 났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그리고 다투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침묵 속에서,
이 관계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낀다.
할 만큼 했다
남편의 원가족은 IMF직전 부유하던 삶을 잃었다.
그 어려운 시절을 버텨내던 부모님의 모습을
막내아들은 어린 마음에 깊이 새겼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왔고,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도리라 불리는 일들을, 그와 함께 짊어질 몫으로 받아들였다.
장녀로 살아온 내 삶이 보태져
시가족을 향한 도리를 더욱 묵직하게 품게 했다.
그 일은 우리가 본가를 구입하며 마무리되었다.
이후 우리는
윗대 어른들도 한 곳에 모셨다.
그렇게 부모님과 선대의 터를
단단히 세웠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들이 나온다.
“그까짓 것”, “유세한다”는 말들,
그리고 은근한 따돌림…
고마움의 표현 대신
자존심과 질투가 앞선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의 한계를 넘는다.
이제, 알아차린다.
이 관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경계의 탄생
어느 날 밤,
남편이 말한다.
"나 본가에 다녀왔어.
네가 많이 힘들다고 말씀드렸어. 형들도 불러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참을 망설이던 남편이 다시 말한다.
"이해 못 하시더라. 예민한 거 아니냐고..."
역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남편이 조용히, 묵직하게 말한다.
“그동안 넌 할 만큼 했어.
그건 예민함으로 치부될 일이 아니야.”
그때,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십여 년 동안 쌓아 올린 구조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숨이 길게 새어 나온다
막혀 있던 마음이 비로소 트이는 숨이다.
"할 만큼 했다."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나는 정말 할 만큼 했을까?”
아니다.
나는 '할 만큼'을 넘어서했다!
나는 결심한 듯 말한다.
"앞으로는 우리의 삶을 먼저 지키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함께라는 마음을 담은 묵직한 끄덕임이었다.
처음으로 ‘우리’라는 경계가 생겼다.
그 덕분에 나도, 남편도 안전함을 느낀다.
그날 이후,
남편은 말을 대신해 행동으로 시 가족에게 첫 경계를 보여준다.
“아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라면, 그 일은 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누군가 나를 위해 경계를 세웠다.
그것은 나를 다시 세우는 두드림이었다.
멈춘 자리에서 보이는 것
이후 몇 달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추석이 다가왔다.
나는 시본가에 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나는 나쁜 며느리야..."
그 죄책감에 친정에도 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실망하시겠지..."
“그렇게 나를 가르치신 분들이 아닌데….”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멈춰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말하신다.
“막내야, 명절에 못 오는 거 이해한다. 푹 쉬어라.”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제수씨, 맛있는 거 사 드릴 테니 어서 오세요.”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그리고 나의 아빠.
친정에 오지 않은 나에게 전하는
아버지의 한마디.
“우리 딸이, 고생 많았네.”
아셨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 말은
헌신으로 살아온 내 삶을
대신 말해 주는 것 같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엉엉 울었다.
아이처럼.
변화가 생긴다.
시어머니가 이야기하신다.
"막내야, 요즘은 어떻게 지내?”
“엄마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미안해”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집에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
나는 진심으로 답한다.
“저도 아버님, 어머님이 건강하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빈 공간이 생기니 보인다.
나의 원가족이.
장녀라는 책임에 대한 부담과
그것에 대한 인정에 메말라
원망하고 뒤로했던 시간 안에 머물던, 나의 친정이.
“엄마, 왜 말 안 했어...”
“신경 쓸까 봐.”
“엄마, 미안했어.”
“뭐가 미안해.
우리는 너희가 잘 사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맙지.”
해드린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하신다.
그래서 이제는
진짜 내 마음으로 말한다.
“앞으로는 힘들 때, 꼭 말해줘야 해”
내가 시선을 돌리고 있던 그 시간.
나의 원가족은
장손이라는 방향 대신,
장녀와 사위의 노고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씩 대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완전한 변화는 아니다.
하지만 다르다.
나에게 경계선이 생겼기 때문이다.
빛이 들어오는 자리
나는 거실 창가에 앉아 있다.
무너진 자리가 보인다.
오래도록 모형 같은 삶을 만들어 온,
그 이유가 되었던 자리.
지금 그곳은 비어 있다.
그런데,
그 빈자리에서 새싹이 돋는다.
마치, 역할과 의무로 가려져 있던
나 자신인 것 같다.
그곳에 햇살이 스며든다.
나는 빈 터 앞에서야 비로소 안다.
이 비워진 자리가, 새로운 시작임을.
마음건축 현장 일지│비우고 짓고, 비우고 짓는 시간의 기록
오늘 나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관계의 붕괴와 상실을 직면했습니다.
그리고 비움을 시작했지요.
철거하듯 덜어내고, 비워내어
나는 새로운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그 빈 공간에 앉아봅니다.
멈추고 바라보니,
흩어져 있던 내가 다시 세워지네요.
비로소 새로운 삶이 다시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는,
내 삶의 저자가 되기로 합니다
다음 주,
BUILD 2 ∙ 2화 ‘마음 공간에 울타리 짓기│진심이라는 마음에는 도어락이 필요하다’로 이어갑니다.
관계로부터 나를 분리하여, 마음공간을 나의 고유함으로 채우는 설계를 들고 갑니다.
오늘도 마음건축소와 함께,
머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비우고 짓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당신의 마음 공간이 단단해지기를
소망합니다.
SUN드림
당신 삶의 유일한 건축가는 결국,
당신 자신입니다
사진: grok-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