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철학 ⑪] 페르소나

철갑 뒤에 숨은 소년

by 자아

거대한 LNG 선박의 철갑은 -163°C의 극저온 화물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외부의 열기를 완벽히 차단하지 못하면 화물은 기화되어 사라지고 만다. 나의 삶 또한 그와 같았다. 기초수급자/가난이라는 결핍과 ‘남자 어른’의 부재라는 거친 파도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누구보다 차갑고 단단한 선체를 구축해야만 했다. 고연봉과 엔지니어라는 직함은 내가 세상에 내보이는 완벽한 페르소나였다. 이 가면은 나를 유능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나의 본질을 그 안에 가두는 감옥이기도 했다.


1. 스스로 조각한 '아버지'라는 형상

내게는 삶의 기준을 잡아줄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무의식 속에 가장 엄격하고 강인한 ‘가상의 아버지’를 조각해 넣었다. 그는 나에게 나태함을 경멸하고, 오직 생산성으로만 나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며 엔진룸의 소음 속에서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 타인의 약함이나 의존성을 볼 때마다 느꼈던 지독한 경멸은, 사실 내 안의 ‘약한 소년’이 밖으로 새어 나올까 봐 두려워 세웠던 최후의 방어기제였다.


2. 지하실 문을 열다 : 취약점의 인정

최근 나는 내 안의 심연을 직면했다. 내가 그토록 부정했던 그림자들 의존, 나태, 순수, 무능 이 사실은 내가 생존을 위해 지하실에 가두어버린 나의 본질임을 깨달았다.

“나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인간이다.”

“나는 때로 누군가에게 비겁하게 의존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역시 존엄하다.”

이 문장들을 이성적으로 수용하는 순간, 놀랍게도 나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통합’되는 감각을 느꼈다. 강함이라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멈추고, 비로소 단단한 땅을 밟은 기분이었다.


해방감 : 상처 입은 치유자의 탄생

가면의 균열 사이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페르소나를 유지하기 위해 쓰던 막대한 심리적 에너지가 해방되면서, 나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평온함을 얻었다. 이제 나는 타인의 고통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들의 나태함 뒤에 숨은 공포를 보고, 그들의 의존성 뒤에 숨은 외로움을 읽는다.


자신의 상처를 대면한 자만이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다는 ‘상처 입은 치유자’의 길을, 나는 이제 바다 위에서 시작하려 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hmsvjmhmsvjmhmsv.png 페르소나를 벗고 진정한 나를 바라보기

작가의 이전글[바다 위의 철학 ⑩] 해기전승(海技傳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