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사라지는 마음에 대하여
첫 아이를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에서 만난 친구가 있었다.
여럿인 조리원 동기 중에서도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고향이 같았고, 말이 잘 통했고, 낯선 어려움과 소중한 시간의 같은 시기를 살고 있었다는 점들이 여럿 중에도특별히 우리를 묶어 준 것 같다.
서툰 육아, 밤잠 설친 눈,
아이 정보를 나누며 밤 새 나눈 카톡들
달달한 커피 한 잔으로 버티던 하루하루
공동육아 후 나누던 맥주 한잔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그대로 나누었다.
함께 아이를 키우며 나눈 수많은 대화들은
그냥 ‘조동 친구’라기엔 훨씬 더 정서적으로 깊은 연결이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좀 자라고 이사를 해도 우리는 연락을 이어갔다. 가끔은 가족끼리 여행도 가고, 육아뿐 아니라 삶 자체를 이야기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그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 막연히 믿은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와 연락이 뚝 끊겼다.
카톡에 답이 없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걱정이 분노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부터 “왜 나를 버렸지?”까지
마음속에는 온갖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이건 애착의 상실일지도 몰라
처음엔 이 감정을 ‘버림받음’으로 이해했다.
상담사로서 나는 애착 이론에 익숙했다.
정서적으로 의미 있는 대상이 예고 없이 사라졌을 때, 그 상실은 단순한 섭섭함이 아니라 ‘정체성의 일부가 무너지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착이란, 단지 영아기 부모와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성인기의 애착도 일생을 통해 다양한 관계 속에서 반복된다.
애착 이론의 창시자 볼비(John Bowlby)는 애착을 ‘심리적 안전기지’로 설명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얻고, 그 존재를 통해 세상과의 연결감을 유지한다. 특히 스트레스 상황(육아, 상실, 질병 등)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심리적 안전기지를 찾아 누군가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게 된다.
그녀는 그 시절 나의 정서적 안전기지였다.
육아로 지치고 고립된 시기에,
나는 그녀를 통해 위로받고 연결되었다.
그러니 그 관계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나는 단지 친구를 잃은 게 아니라,
나 자신 일부를 잃은 듯한 허전함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불현듯 스쳐 간 말이었다.
찾아보니, 시절인연은 불교에서 온 말이었다.
‘시절(時節)’은 특정한 시기와 조건,
‘인연(因緣)’은 원인과 관계를 뜻한다.
그러니까 시절인연은 ‘그 시절, 어떤 조건이 맞아서 맺어진 인연’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이 인연조차도 무상(無常)하다고 본다. 모든 인연은 흐르고, 머물다 사라진다. 억지로 붙잡거나, 끝을 분해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때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그 인연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애착과 시절인연, 두 세계관의 차이
이쯤에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겪은 이별은 정말 ‘버림’이었을까?
시절인연이라는 말은 관계의 끝을 비난이나 책임이 아닌 ‘자연의 흐름’으로 해석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억지로 붙잡거나, 잊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시절 함께 웃고 울었던 순간들을 ‘고마웠다’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깨달음이 왔다.
애착과 시절인연은 세계관에 차이가 있다. 애착 이론은 내가 ‘왜 그렇게 아팠는지’를 이해하게 해 줬고, 시절인연은 ‘왜 그 관계를 놓아도 괜찮은지’를 알려주었다.
이 둘을 함께 받아들이자 상실은 더 이상 ‘내가 잘못해서 생긴 실패’가 아니었다. 그저 장(場)이 바뀐 것이었다.
레빈의 장이론(Field Theory)
– 관계는 ‘사람’이 아니라 ‘장’의 작용
대학생 시절, 나는 ‘장 이론(Field Theory)’으로 연인 관계를 분석한 리포트를 쓴 적이 있다. 꽤 진지하고 흥미롭게 쓰고, 좋은 피드백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쉽게 떠오르고 삶에 적용되는 거 같다.
레빈은 인간의 행동을 단순히 개인의 성격으로 보지 않았다. B = f(P, E) / 물리시간에 본 듯한 이 공식
행동(Behavior)은 개인(Person)과 환경(Environment)의 함수다.
즉, 우리는 각자의 ‘심리적 장’(psychological field) 속에서 살아간다. 정서, 관계, 환경, 시간, 맥락 등 모든 요소가 상호작용하며 한 사람의 행동과 관계 패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조리원에서의 나와 그녀도,
그때의 ‘장’ 안에서 피어난 인연이었다.
그 장은 지금은 해체되었고,
그 장이 사라지자 인연도 자연스럽게 떠나갔다.
우리는 같은 시기에, 같은 조리원,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기에 서로에게 애착했고, 깊이 연결되었지만 삶의 구조, 시간표, 감정의 결이 달라지자 우리를 감싸던 장은 해체되었고, 그와 함께 인연도 조용히 흘러간 것이다. 이건 버림도, 외면도, 실망도 아니다. 그저 서로의 ‘장’이 변한 것이다.
양자심리학의 눈으로 본다면?
나름의 상처를 회복하고자 하는 ‘이상가’ 기질의 발상이 나의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게 했다. 양자심리학(Quantum Psychology)의 두꺼운 책을 다 읽지는 못하고, 개념 이해를 위해 아직 노력 중이지만 지금까지의 대략 이렇게 연결되었다.
모든 존재와 관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성과 연결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하는 점이 떠오른다.
즉, “나는 나”가 아니라 “너와 내가 연결된 방식 속에서만 ‘나’는 정의된다”는 개념이다. 그녀와 내가 함께 웃고 울던 그 시절, 나는 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나인 것이다.
관계가 멀어졌다고 해서 그 시절의 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나는 그 인연 속에서 한 시절을 온전히 살아냈고, 그 경험은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일부로 남아 있다.
요즘은 왜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자주 쓰일까?
어쩌면 관계의 단절이 일상이 된 시대이다. SNS를 통한 소통은 클릭 한 번으로 관계가 쉽게 생기고, 쉽게 사라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관계의 상실에 대한 죄책감, 미련, 원망을 덜어주는 말로 ‘시절인연’이 쓰이기 시작한 거 아닐까?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기 어렵지만, “시절인연”이라는 말 한마디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관계의 상실을 “누구 잘못”으로 보기보다 “시기와 인연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애착이라는 건 참 묘해서, ‘지금’보다 ‘그때’의 온기를 자주 꺼내보게 된다. 가끔은 그 온도 차를 받아들이지 못해 서운하거나, 상처받기도 한다.
애착은 관계 안에서 나의 정체성 일부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 관계가 사라지면 나 자신도 일부 잃어버린 듯한 고통을 느낀다. 반면, 시절인연은 관계를 ‘나의 일부’로 흡수하지 않고, 그때의 조건과 흐름 속에서 머물다 가는 자연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인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기보다는, 이 두 관점을 모두 이해하고 균형 있게 적용하는 것이 마음의 유연함과 치유에 도움이 된다.
이제는 조금씩 받아들여본다. 모든 관계가 ‘영원함’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어떤 인연은, 뜨겁고 짧게 우리 삶을 데우다 조용히 떠난다는 걸.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감당하지 못한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거리감이 있었을지도.
나의 부족함이거나...
이제는 묻지 않으려 한다.
어릴 적 딸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이모와 친구
그녀들의 이름을 더 이상 기억 못 하는 날이 왔다.
딸아이 무의식에 새겨졌듯 나도 그저 조용히 마음으로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인연이 닿는다면
나는 유쾌하게, 다정하게,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반겨줄 것이다.
그땐 정말 고마웠다고,
그 시절 함께여서 따뜻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 곁의 인연들에게
지나간 인연에까지 머무르지 않기로 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오늘 나에게 미소 지어주는 이들에게
더 진심을 쏟고, 더 따뜻하게 반응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함께 걷는 이들이
훗날 내가 “참 고마웠다”라고 떠올릴
또 다른 시절인연일지 모르겠다.
관계는 멀어지고,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진심이 오갔던 인연은
언제나 마음 어딘가에 남아
오늘의 나를 지탱하는 기억의 장(場)이 되어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김창완-노영심 ‘안녕’ 노랫말처럼
만남은 언제나 헤어짐으로 완성된다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