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사람들의 모임>
코로나 바이러스로 영국 전체 록다운(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2020년 3월이후 6개월 만에 록다운이 해제되고 나의 봉사활동 그룹도 다시 재개를 알린 지 한 달째. 내가 진행자로 주관하는 세션 두 번째 주를 지나고 있다
없던 병도 만들어 낼 판이다.
영국 전 국민의 반년의 칩거령. 얼마나 많은 이들이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걱정이 한가득이던 시간이었다. 다행히 나 자신에게는 그리 힘들던 시간이 아닌 것에 감사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지는 못했던 시간들이 끝이 났다. 끝이 아닌 끝. 아직 종식되지 못한 이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불안 불안한 줄타기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편안히 집 밖을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다. 오래된 불안에 억지로라도 집 밖으로 나와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달래야 하는 것이 필사적인 사람도 있을 '지금'이다. 걱정 반, 안도 반, 마구 섞인 감정으로 세션을 시작했다.
우울한 날들과 스트레스로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을 서로 이야기하고 경험을 주고받는 정신건강 모임.
참여자들의 균형적인 의사소통을 장려하는 역할을 안고 가는 나와 또 다른 진행자가 2인 1조로 이어가는 1시간 30분의 공간이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환영하는 일은 반가우면서도 신날 수만은 없는 분위기로 이어진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의 싸움, 자신과의 '잘 있음'에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마음 한쪽 깊이 있게 무겁고도 가슴 시린 일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의 시간으로 주어진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는 것. 늘 접하는 나의 직업적 환경임에도 익숙해지지 못하는 이 마음은 내가 직업인이기 이전에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동질감, 그 슬픔들이 내 마음 가운데를 또 훑어내린다. 우리 모두 그저 해 줄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보내주는 공감의 눈빛과 응원의 말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자 희망이 될지도 모를 각자의 다양한 시도와 경험들의 공유. 한 편 감사하고 한 편 서글픈 그네 타기의 1시간 30분이 내 온몸과 머리를 통과해 나간다.
나의 입술은 자주 앙 다물린다. 고개를 끄덕이고 눈빛을 내어주고, 말로는 내뱉지 못한 나의 응원의 말들이 내 머릿속을 홀로 돌아다닌다. '당신의 평화를 빕니다.' '당신의 한 주 어딘가에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깃들기를 빕니다.' '당신의 눈물, 오늘이 마지막이길 빕니다.'
조언과 해결책을 말할 수 없는 진행자의 위치. 나는 가끔은 저 참여자들 속에 참여자로 앉아 있고 싶다. 참여자로 앉아서 나의 생각, 나의 경험, 내게 통했던 임시방편 같은 꼼수라도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밀려올 때가 많다. 우리네 사는 모습이, 우리네 안고 가는 마음의 무거움이 모두 다르지 않기에, 당신의 이야기에 한 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또 이분의 이야기에 또 한 분이 경험을 보태면서 서로의 위로와 서로의 도움이 빛을 발하는 이 모임이 내게는 안심이며 감사이다.
참말 다행이다, 다행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과 친한 친구들의 지지를 말해주는 참여자가 있으면 내 얼굴에는 환한 복숭아꽃이 핀다. '참말 다행이고 다행이다.' 가까이에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희망, 그래서 신이 났다. 그러다 그 옆, 가족 없이 혼자이신 참여자. 나의 복숭아꽃이 시들어 줄기까지 꺾인다. 나의 환희는 곧내 꺼진다. 이 분에게서 살구꽃이 피었다가 저분에게로 가서는 가시덤불로. 내 마음속 정원은 잠시도 정지하지 못한다. 이 분에게 갖는 응원과 축복이 다른 분에게는 더 한 쓸쓸함으로 돌아설까, 마음이 불편하다. 기뻐도 기쁘기만 할 수 없고 슬퍼도 슬플 수만은 없는 한 시간 반을 견뎌내야 한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진단 명의 정신질환이 있다. 그 많은 이름들을 모르는 사람도 많고, 들어는 봤으나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관심한 사람들도 많다. 나는 가끔, 내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이긴 하지만 이 모든 질환들의 진단명이 굳이 필요할까 생각될 때가 있다. '불편한 감정', '몸까지 힘든 날들'로 발견되어 정리된 진단명들. 어려움의 종류와 불편함의 정도를 줄 세워 비교 대조하면서 너와 나를 묘사하고 규정짓기 시작했다. 환자들을 위한 분류인지 치료자들을 위한 분류인지. 환자들에게 꼬리표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의 가장 첫 줄로 사용되는 현실을 목격할 때면 가슴이 답답하다. 분류와 정리라는 것이 싫어진 이유다. 치료자들이 나누는 그 코드명들이 환자들에게 넘어가 그들 자신을 정의해버리는 것이 싫었다 그들은 아직 그림 그리기도 좋아하고 개와 산책하기를 좋아하며 요리와 자전거 타기가 취미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설명할 때 진단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I have Bipolar(나는 양극성 장애를 갖고 있어요)"라고 말하면 그나마 어감이 낫다. "I am Bipolar(나는 양극성 장애예요)"라고 들을 때마다 어디선가 마음이 안타까워졌다. '그게 당신을 정의하는 전부는 아닌 거, 아시죠?' 늘 혼잣말, 속으로 혼잣말.
진단받으나 아니나,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다. 모두 다 나름의 스트레스와 힘든 순간들로 마음이 힘들고 몸까지 힘들어 보는 경험을 한다. 그걸로 되지 않나? 매주 내게 던져지는 메아리다. 어차피 일반 사회 속에 사는 우리가 뭘 더 세세히 안다고 해서 그들을 위한 치료책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건 병원 관계자들만 알면 될 일이지 않나? 전공책을 열고 덮는 일상에서도 여러 마음이 오간다. 가볍게 아니면 무겁게, 어디에 무게추를 두어야 하는 건지, 아직도 헤맨다
마음속에서 나는, 책을 덮고 사람을 연다.
정신적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은 모두들 주변 사람들의 인식 부족을 이야기한다. 주변 사람들의 이해 부족으로 사회생활이, 인간관계가 힘들어진다고 말한다. 주변인들,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감정과 행동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있을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 감정마저도 타인을 위해 고이 접어 감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누구든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잠시 혹은 오랫동안 몸과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 극한의 스트레스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인식,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난 고될 것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태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인식하고 상상하기 시작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기 시작하면 서로가 덜 두렵고 덜 민망하고 덜 외롭지 않을까, 우울증 모임 그룹을 여는 매주 느끼고 있다.
매일같이 언제 어디서 터져 나올지 모르는 폭탄 같은 몸과 마음을 안고 보내는 그들의 전쟁 같은 일상들. 그 일상을 또 도움 없이 홀로 버티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입 안에 큰 풍선을 불게 된다. 답답하고 착잡한 마음에 입 안 가득 큰 숨 하나 가둬놓고 긴 얼굴로 숨을 참는 버릇이 생겼다. 이 곳에서 만나고 헤어진 후 돌아가는 집에 손이라도 잡아 줄, 아니 그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이라도 같이 보아 줄 단 한 명이 계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주 세션을 마무리한다.
'당신의 평화를 빕니다.'
편안한 잠자리를 가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또 한 번 평화를 빌고 모임 장소를 정리했다. 다음 주에는 또 어느 분이 다시 오시고, 또 어느 분이 새로 오실까. 오늘은 오늘로 생각을 접고, 다음 주는 다음 주에 생각하기로 마인드풀니스 한다, 지금/여기/현재에 집중한다.
'당신의 평화와, 나의 평화, 우리 모두의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