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사람들의 모임>
영국에는 정신건강(Mental Health)에 대한 캠페인이 많다. 이제는 우리 모두 정신적 질환 하나쯤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살면서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다. 정신적 질환으로까지 확대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결국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 다 '어려움'이라는 공통의 카테고리 아래에 놓여있다는 생각으로 일축되는 중이다. 물론 내 머릿속만의 결론이지만.
정신 건강에 대한 일반 사회의 인식이 한국과는 다르다고 느껴진다. 그것이 내가 이 쪽 분야로 전공을 틀면서 '찾아보기'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곳곳에서 한국에서는 본 적 없던 많은 캠페인과 표지판, 알림표들이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있지만, 이 곳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인가 보다. 여전히 정신적 어려움의 발현이 '나의 이야기'가 되면 쉬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영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말이다.
남편 회사의 CEO. 회사 내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어려움을 같이 헤쳐나가기 위해 개인 월급의 20%를 매달 회사로 기부하고 있다고 했다. 정신 건강에 대한 광고와 사내 교육, 정신 건강 보호를 위한 외부 교육기관의 섭외 등에 힘쓰고 있었다. 회사 경영자는 자신의 심적 어려움에 대한 인터뷰도 서슴지 않았다. 나의 분야라고 알고 있기에 남편은 늘 내게 그런 회사의 동향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 경영자의 적극적 지원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정신 건강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마치 친환경적 마인드를 가지지 않으면 도태된 기업처럼 여겨지기까지 하는 현시대적 트렌드, 나아가 전략처럼도 느껴지는 건 나 혼자 뿐인가? 뭐, 전략이었든 뭐였든 필요한 방향으로 선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환영하면서 부럽기까지 했다. 한국의 대기업도 이렇게 시대를, 사회를, 구성원들을 이끌어 갔으면 좋으련만.
그런 수많은 캠페인과 봉사활동 중 하나로 내가 참여하고 있는 우울한 사람들의 모임. 오늘 참여한 한 여성분, 오랫동안 이 곳 모임에 참석하는 분이셨다.
본인의 정신질환과 스트레스만 생각해도 바쁘실 몸과 마음인데, 사춘기 아이들 생각에 더없이 바빠지셨다 아이들이 자신의 질환에 대해 알지 않았으면 하신다고 했다. 자신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해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 진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으셨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해받을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일상을 해결하시느라 에너지가 부족해 보였다. 오늘은 남편분에 대한 이야기로 한 숨을 내뱉으셨다. 자신을 지지해 줘야 할 남편의 대응방식이 언제나 아쉬움 한 가득이라며.
그녀가 한 숨을 쉬면 나도 한 숨을 쉰다. 그게 한 숨 낼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게 내 업무는 아니다.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그녀의 눈을 통해 그녀의 세상을 보면서 옆에 있어주는 것이 내 일이다. 그녀가 괜찮대도 나의 한 숨은 얕아지지 않았다.
가족의 지지. 주변인의 지지. 나는 이 ‘주변인’의 영향력에 대해 조심성이 커지고 있다. 정신적 어려움은 누구나 겪는다. 인생에 우리를 시험하는 사건들은 마치 번호표를 뽑아 들고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 앞에 줄지어 존재한다. 나의 마음을 힘들게 할 사건이 생애에 걸쳐 하나도 없는 축복을 가진이가 있을까? 인간의 생로병사에 자유로운 이 없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결국 생로병사에 자유롭지 못하니, 어려움 없는 생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어려움이 내게 닥칠 때,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주변인, 내게 좋은 영향력만 미치지는 않는다. 나를 망가뜨리고, 나를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주변인도 있다. 나의 정신질환을 아이들에게 숨기는 배우자의 모습에 나는 어떤 느낌이 들까? 내가 제안했다 하더라도, 그러자고 쉬이 동의하는 배우자라면, 나는 그에게 어떤 마음이 들까? 어느 날은 괜찮아도 어느 날은 안 괜찮을 그런 날들이 반복되지 않을까?
'왜, 나더러 숨기지 말라고, 그럴 필요 없다고 나를 말리지 않았을까?'
'왜 나는 숨겨야 한다고 말했을까?'
'나의 상태를 ‘숨긴다’는 것에서 내가 가질 또 다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숨기고 가는 그 길목 순간순간들에 나는 지치고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숨긴다는 것, 그것은 결국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나의 어떤 것을 ‘문제’라고 보고 ‘위협’이라고 보는 시선에 대한 해석은 나를 어떻게 대하게 될까?'
정신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 술에 의존한 날. 그녀는 병원에 실려갔고 하루 동안 '보호 조치'를 받았다. 감금 조치라 불렀다. 누구를 누구로부터 보호하고 보호받는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은 보호받지 못했다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 동안 보호조치를 받은 후 다음 날 귀가했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남편의 회피였다고 했다. 힘든 자신을 한 번 안아줄 법도 한데, 늘 그렇게 싸늘한 시선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대하는 것이 괴롭다고 말했다.
"한 번 안아달라고, 말해 보지는 못 하셨군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남편의 배려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만큼 나도 슬펐다. 그 순간마저도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그녀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마음을 달래고 싶었지만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표현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그저 눈빛으로 안아줄 수밖에 없는 나의 시간을 채워낼 뿐이었다. 모임의 진행자인 나는 조언을 하거나 제안을 할 수가 없다. 조언을 하는 것도 참여자들이고 어느 조언을 받아들여볼까 정하는 것도 참여자들의 자유이지만 진행자인 우리는 아무런 의견도 달아선 안된다. 그저, 그런 조언과 이야기가 편안하게 오고 갈 수 있도록 진행에 집중해야 한다. 진행자로 있는 날이 힘에 부치는 때가 있다. 참여자로 자리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적극적으로 공감해주고 싶고 적극적으로 이런저런 제안도 해보고 싶은 날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의 직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날, 그저 회기가 끝나면 홀로 종이에 끄적이며 내 마음을 뒤늦게 알아봐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자신의 질병에 대한 주변의 시선. 자신의 감정을 열어보이지 않고 닫아버릴 때, 그 감정의 역동은 복잡해진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다. 억울함을 느꼈고, 외로움을 느꼈으며 이겨내지 못하는 일상에서의 좌절감과 무력감도 느꼈다. 앞으로의 긴 생애 동안 해결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이 질병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중압감에 포기하고 싶어 했다. 홀로 치르는 이 전쟁 같은 생의 긴 길이가 지겹고 무서울 것 같아 보였다. '함께여서 오히려 더 외롭다'는 말이 또 한 번 느껴진 날이었다. 외로움만 해결하면 될 생이 차라리 나아 보였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인간 사회인데,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으로 오히려 더 괴롭고 외롭고 미안하고 서운할 수 있는 이 복잡한 인간의 마음, 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복잡하게 굴러가는 것이냐 답답한 마음이 일었다.
“네 마음이 중요해. 네가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지, 다른 사람 의견 뭐 중요하니? 무시해버려.”
말이 쉽다. 우리네 사는 인생의 여러 주제들. 쉬이 생각되는 주제가 있고 그렇지 못한 주제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씹는 껌 뱉는 것보다 쉬운 게 있는가 하면 어떤 이에게는 생을 다시 시작하지 않고는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도 있다. 어렵게 풀리는 주제들을 산 넘듯 물 넘듯 넘고 넘어가면서 흘러가는 생인가 싶어 졌다.
“너는 그것이 어렵구나. 내겐 이것이 어려운데.”
그렇게 넘어가면 모두가 똑같다. 우리 모두는 똑같다. 결국 복잡한 마음과 씨름하는 인간이다. 그 마음과의 씨름이 몸으로까지 넘어갔느냐 아니냐가 그 복잡함의 '정도'를 보여줄 뿐이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겨우, 인간이다. 그 공통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는 오늘 내 주변 누군가의 감정에 내 감정을 열어보았는가, 생각하며 세션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