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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Apr 16. 2024

끝없이 어긋나는 질문과 응답하지 않는 무전기.

영화 <여기는 아미코> 리뷰


모리이 유스케 감독의 <여기는 아미코>는 2024년 2월 28일에 개봉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이마무라 나쓰코의 동명 소설 원작으로 데뷔작이자, 제26회 다자이 오사무상과 제24 회 미시마 유키오상을 받은 소설이다. 이번에 영화화가 되어 더욱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영화는 아미코가 바라보는 세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한 마을에서 사는 아미코는 자신만의 세상이 명확한 아이다. 노리를 짝사랑하는 아미코는 계속해서 노리를 쫓아다닌다. 엉뚱하고 산만한 아미코는 그 수업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유산으로 인해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지만 예전과의 평화가 계속 이어지는 듯했다. 아미코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남동생의 묘를 만들어 엄마에게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하염없이 무너지고 그날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아미코에 대하여.


유독 특이하다고 여겨지는 ‘아미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꼭 판단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미코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미코가 호감이 가는 캐릭터는 아니다. 타인의 약점을 뚫어지게 쳐다본다거나 싫다고 해도 계속해서 그 행동을 반복하는 모습이 호감으로 이어지기에는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초반부는 어른들이 시선에 의해서 부모들의 방치 행위가 학대라고 인식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아미코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거둬내고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아미코는 상당히 안타깝다.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하지만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영화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떤 부족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모의 무관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한 환경이 나왔으면 좋겠지만 영화에 나온 부분만 보더라도 무관심과 방치 그리고 이기심은 그저 학대일 뿐이다. 참혹한 장면이 나와야지만 학대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야 엄마의 표정과 아미코의 교육적으로 부족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저 사고뭉치,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잘 돌보아 주었다면 지금과는 좀 달랐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성장하지 않는다. 시간이 멈춘 듯 키도, 얼굴도, 표정도, 행동도 처음 나왔던 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심지어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한 태도를 취한다. 엉뚱하다고 산만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미코의 세계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알 수 없었던 행동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감당해야 할 상실감의 무게를 알려줬다면 아미코의 행동이 악의로 비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아미코와 유일하게 긴 대화를 나누었던 까까머리 친구의 진지한 충고가 굉장히 따뜻하게 다가왔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사실이나 몸에서 나는 냄새와 같은 것은 명백하게 짚어주어야 할 문제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네가 싫은 이유 백억 가지는 알려주지 않는 모습이 얼마나 웃음이 나던지. 노리에게 집중해서 보이지 않았던 또 다른 세상을 조금만 일찍 발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집안의 분위기는 엄마의 사산 이후 급격하게 변한다. 그들의 상실은 관계의 와해로 이어졌고 다시 이어 붙일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어쩌면 그 화목함이라는 것 뒤에 숨겨진 균열이 이제야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말을 잃었고 아빠는 의욕을 잃었으며 오빠는 비행 청소년이 되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아미코는 몸에서 냄새가 나고 학교는 맨발로 돌아다니며 친구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한다. 물론 오빠에 의해 따돌림을 피하게 되었지만 고립된 건 마찬가지였다. 아미코는 동생이 죽고 나서 이해하지 못할 환각을 듣게 된다. 귀신이라는 두려운 상대를 떨쳐내기 위해 즐거운 노래를 연달아 외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소음일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계를 느끼게 되고 그 환각의 정체를 마주하게 된다. 아미코의 방 베란다에서 들리는 소리는 둥지를 튼 새였을까. 아미코의 망상이었을까. 분명한 건 아미코에겐 죽음으로 인한 상실보다 행복했던 가족의 모습의 상실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알 수 없는 정체들이 차지하여 유일하게 아미코를 맞는다.



아미코의 감정에 응답하라.


영화 속에서는 부모의 방치, 아이의 부적응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는 방법 보다 아미코의 감정과 시선에 집중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아이가 나오는 영화에 기대하는 막연한 상상을 완전히 파괴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나오는 영화에 당연하다 여겨지는 어떤 ‘힐링’을 기대하기도 하고 ’ 아이다운‘ ‘사랑스러움’을 기대했다면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 감성에 적합하지 않다. 일관된 편견을 부수며 일반적인 아이의 모습이 아닌 조금 특별하다고 볼 수 있는 아미코의 시선으로 영화를 비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미코의 세계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카메라의 시선이 그저 아미코의 모습을 비추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완전히 깊숙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사실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았다. 공포스러웠다. 사랑 속에서 커야 할 아이는 무응답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응답을 기다리는 그 적막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문득 찾아오는 아미코에 대한 편견은 어떤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어른들의 합리화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게 만든다. 영화를 꺼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아미코의 악의 없는 천진난만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서 후반부에 다다르게 되는 순간, 아무도 아미코에게 응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이유 없는 무응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지금과는 다른 시선으로 어떠한 편견으로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아미코를 바라본다면 더욱 입체적인 모습으로 아미코의 세상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이해는 힘들더라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들여다본다면 아미코는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누군가가 아미코에게 응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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