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리뷰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어도 그다지 절망스럽지 않고 마구 슬프지도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정말 간단한 답을 떠올릴 수 있는 질문이다. 당연한 결과를 이미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막연한 기대가 아닌, 좋아진다면 좋은 거고 나빠진다면 어쩔 수 없는 거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답이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많이, 그리고 따뜻하게 다뤄내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태풍이 지나가고>는 2016년 개봉작으로 제69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초청작이다. 이 영화는 <걸어도 걸어도>의 대구를 이루는 작품으로 유명하며 가족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료타는 유명작가를 꿈꾸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그가 이룬 것이라곤 젊은 시절 썼던 소설로 상을 받았던 업적뿐이다. 그는 흥신소에서 일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변변치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 소설 취재를 핑계로 흥신소에서 일하고 있지만 소설은커녕 자신의 삶을 유지하지도 못한다. 번 돈마저 도박으로 탕진하는 습관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전처 쿄코에게 양육비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료타에게 유일한 낙은 한 달에 한번, 아들 싱고를 만나는 것. 아들에게 좋은 것을 사주고 싶은 마음으로 무리를 하고, 싱고와 함께 어머니 요시코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찾아간다. 한참 뒤, 싱고를 데리러 온 쿄코는 태풍으로 인해 발이 묶여 요시코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료시코는 아들 료타를 대기만성형이라 믿어주려고 애쓰지만 솔직히 탐탁지 않다. 1인분은 하고 살 수 있으려나 걱정이다. 그는 실제 돈 될 것이 없나 아버지의 유품을 찾는 모습, 매번 도박으로 돈을 잃고도 다시 도박하고, 주변에 돈을 빌리러 다니며 민폐를 끼치고, 양육비 월세 모두 밀려서 쩔쩔매는 모습이 한심하고 정말 못나보였다. 하지만 자식을 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마냥 못나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꽃도 안 피고 열매도 안 맺지만 너라고 생각하고 매일 물 주고 있어" 료코를 찔리게 하는 말이면서도, 나 역시도 찔리게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곧이어 "그런데 배추벌레가 잎을 먹고 자라더니 얼마 전에 나비가 됐어. 다 어딘가는 쓸모가 있는 거야"라는 말이 마음 한편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거듭된 실패와 멍청한 행동에도 무한의 믿음을 쏟아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이런 거였지 하고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대사였다. 이 못난 자식을 영원토록 사랑해 주는 사람들, 우리 부모님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태풍이 예고되고 모든 것을 휩쓸어갈 만큼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아들 싱고와 전처 쿄코가 집에 머물게 되면서 태풍이 지나가는 그 시간 동안만큼 료타에게 기회의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계획된 것처럼 상황이 펼쳐지고 다시 함께하고 싶다는 내색을 한다. 하지만 무능함과 무책임함에 지쳐 이혼한 만큼 여전히 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다시 돌아갈 리 만무했다. 그녀는 이미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념한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을 아들 싱고와 함께 되새긴다. 태풍을 거치고 날은 맑아졌지만 바뀌는 것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을 계기로 과거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초판본을 소중하게 다루어주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거나 과거의 미련을 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불안정한 삶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그에게도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마무리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에는 꼭 한 명씩 실패한 사람이 등장한다. 어려움을 극복하려 애쓰는가, 무기력하게 그저 현재를 살아가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정말 실패한 삶인 건지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것과 더불어 자신의 현재를 인정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진짜 어른 남자인 거야"라는 말을 통해 보여준다. 누군가의 삶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태풍이 거치고 난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삶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도 자신의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전 작품과는 다르게 이 영화에서는 가족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족에 대한 시선이 이토록 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침묵과 거리감이 느껴지고 어두운 분위기를 감추는 밝은 이미지가 연출되었다면,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는 솔직함과 대화를 통해 유쾌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마치 태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쫴는 순간을 마주한 것처럼 새로웠다. 그다지 절망스럽지 않아서 복잡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특별한 결말이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아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아들 싱고에게는 할머니와의 대화 속에서의 위안과 태풍 속에서의 아빠와의 추억이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그리 나쁜 결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하지 않는 어른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배추나비'와 같은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더 나은, 그리고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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