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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닿지 않을 가족이라는 평행선.

영화 <걸어도 걸어도> 리뷰

by 민드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속, 영화보다 잔혹하고 황당한 일을 현실에서 마주하곤 한다. 때론, 그것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보일지라도 그것 또한 현실을 반영한 다수의 생각이 투영된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고, 기억이 되기도 하며, 삶을 대변하는 이야기들로 채워지곤 한다. 그중에서도 '가족의 따뜻함'이라는 주제로 다가오는 영화 하나를 추천하려고 한다. 바로,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영화 <걸어도 걸어도>이다. 오래전부터 ‘명작’이라 불리며 추천을 받아왔지만, 늘 어딘가 마음이 무거워질 것 같아 미뤄두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2008년 개봉하였으며 제3회 아시아 필름어워즈 최우수 감독상, 제32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여우조연을 수상하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2025년 5월 21일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기억은 지나가도, 감정은 고스란히 마음에 남는다.


매년 여름, 장난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부모님의 집을 방문한다. 딸 지나미는 남편과 네 명의 아이들과 함께, 둘째 아들 료타는 재혼한 와이프 유카리와 아들 아츠시와 함께 고향집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모인 식구들이 반가운 만큼 어머니 토시코는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며 음식을 준비한다. 장남 준페이의 기일, 매년 초대되는 손님이 있었다. 바로, 요시오였다. 그는 10년 전, 물에 빠졌었고 준페이가 소년 요시오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 후 목숨을 잃었다. 매년 찾아오는 요시오지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료타는 어머니에게 이제 그만 와도 되지 않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그러자 어머니는 10년 간 숨겨왔던 진심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잔인할 만큼 솔직하고 현실적인 그 마음을.



가까워서 더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름, 가족.


북적북적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도 차마 지울 수 없는 가족의 그림자는 그 존재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만큼 준페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의 이야기는 고질적이었다. 크든 작든 그의 죽음은 이 가족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세상을 떠나 이곳에 없는 존재였음에도 누군가에게는 그리움, 누군가에게는 비교의 대상이 되어 한 구석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우지 못하는 추억인지, 고집인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부모에게는 아들이 소중한 존재였기에 아깝고, 아쉬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요시오를 부르는 이유도 어쩐지 께름칙한 이유였지만 적극적으로 말릴 수 없었다. 일말의 죄책감을 견디게끔 하려는 부모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속된 상실은 모두의 마음에 자리 잡아 있었다.


모든 치부를 안아줄 만큼 소중하고 지키고 싶은 존재자체가 가족의 의미라면 참 좋겠지만 가족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모두 나누어야 한다. 그만큼 가족이라는 존재는 따뜻한 동시에 숨 막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남보다 더 모를 때도 있다. 자식과 부모 사이는 더더욱 그렇다. 자식에게 부모는 더욱 많은 것을 이해해 주길 바라고, 부모는 자식에게 내심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는 그런 마음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크면 클수록 속마음을 이야기하기가 더 힘들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세대차이를 넘어선 어떤 가치관이 충돌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서 해결이 되기보다는 소모전으로 이어지고 서로의 의견만 관철하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싸움으로 번질 것이 뻔하니 이제는 소소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며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기만을 바라는 제법 불편한 자리가 마련된다. 그렇게 눈치를 보며 불편하고 아슬아슬한 자리를 '잘' 마무리하기만 하면 또 한 해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지만 불편하고 함께 있지만 따로 있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가족인 것 같다.


저 노랑나비는 말이지 겨울이 되어도 안 죽은 하얀 나비가 이듬해 노랑나비가 되어 나타난 거래



또 다른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는 것.


영화는 가족의 문제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한 화면에 담아내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도 괜스레 서운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작품에는 맺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며 전통적인 가족관 안에서 다른 형태의 가족이 얼마나 쉽게 환영받지 못하는지를 드러낸다. 료는 재혼을 했고 아츠시는 그의 친자식이 아니지만 자식처럼 아끼며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료의 어머니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인지 유카리와 아츠시에게 선을 긋는 태도를 보인다. 복잡해질 수 있는 자식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할 거냐고 거듭 질문하고, 식사 자리에서 아츠시 군이라고 부르며 거리를 둔다. 아츠시의 잠옷만 따로 준비하지 않는 행동에 와이프인 유카리는 참다 참다 서운함을 남편에게만 토로한다. 겉으로는 서운함을 내색하지 않고 잘 보이기 위해 살갑게 굴며 친근함을 표시했지만 상처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불가능하다 느꼈을지 모르겠다.


피로 맺어진 인연만이 진짜 가족일까? 아니면 함께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며 쌓여가는 정이야말로 진짜 가족의 모습 아닐까? 영화는 낯설지만 조심스럽게 만들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서서히 스며드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들 사이에서 진정한 가족으로 인정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서로를 향한 진심과 배려가 '가족'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형태를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계기가 된다. 영화 속에서 아츠시는 초반,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의 부재에 의한 문제인지, 달라진 환경에서의 불안감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방황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아츠시의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해소가 된다. 할아버지와의 대화에서였다. 장래 희망을 묻는 할아버지에게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 싶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이에 할아버지는 의사가 된 계기를 털어놓으며 은근 보람이 되는 일이라고 어필하는 모습을 통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가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언뜻 보였다.



미완성된 관계의 형태는 늘 그랬듯 완결 짓지 못한다.


이 영화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느끼는 사랑, 서운함, 거리감,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걸어서 걸어서' 떠나는 여정으로 풀어낸다. 그렇게 가까워질 듯 가까워지지 않는 가족의 문제는 평행선을 달린다. 가까이 있으면 싸우고 멀어지면 그립고, 어긋나지만 기대하게 되는 그런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곤 한다. 영화는 그런 솔직한 내면을 너무나도 잘 드러낸다. 그때는 잘해야지 다짐하지만 막상 그 순간에서는 나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게 되는 마음과 자식의 모든 것이 궁금한 그 마음이 부딪히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님은 집에서 다시 자식들을 보길 원하고 자식들은 다시 돌아가기 어려운 곳이 되어버린다. 어린 시절과는 다른 현재가 너무나도 낯설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님에도 찔리고, 아프고 상처 입는다. 인물들은 불편한 감정을 애써 감추려 하지만 그 억눌린 감정이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해결되지 않은 채 떠도는 감정들은 미세한 진동을 일으켜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냈다. 영화의 결말이 뚜렷하지 않아 좀 아쉬웠고 반복되는 영화의 언어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가족의 모습과 전통 가족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더 복잡해진 사회적 문제를 투영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답을 명확하게 내릴 수 없는 문제기 때문에 뭉뚱 거리는 듯한 마무리의 여운이 더 오래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길에서 답을 찾지 못할지라도, 걸어도 걸어도 닿지 않는 인생의 여정을 계속 걸어 나가야 하며,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풍경 속에서 저마다의 무언가를 찾을 것이라고. 영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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