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절멸의 천사> 리뷰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1962년작 <절멸의 천사>. 비논리적이고 기괴한 상황을 통해 현실을 풍자하는 초현실주의 미학이 돋보인다. 저택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노빌이 주최한 호화로운 만찬회가 열린다. 만찬이 시작되기 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인들이 모두 저택을 떠난다. 그리고 손님들은 식사를 만끽하고 저녁식사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만찬이 끝나고 손님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나갈 수도 없었다.
영화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예의와 위선 사이를 저울질하며 우아함을 뽐내던 이들은 갇혀있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족한 물과 식량, 위생에 위협받는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이들은 우아함은 온데간데 없어진다. 상류층의 체면은 무력해지고 사회적 외피는 벗겨진다. 종교에 의지해보아도 식량이 없고, 물은 부족하며 몸조차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것은 모두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영화는 상류 사회 계층들의 사회껍데기를 벗겨내고 그들의 도덕적 타락과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인간은 모두 같은데도 계급을 따지고 상하관계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이 문명으로 쌓아 올린 질서는 생사 앞에서는 이렇게나 무의미하다. 종교나 계급과 같은 것들은 허황된 것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구원이나 도덕적 가치 또한 무력하고 기만적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시도해 보았지만 상황 재현과 같은 방법이 통하며 탈출에 성공한다. 그 상황을 겪고 나서 이들은 성당에 가지만 기쁨도 안도의 기색도 찾아볼 수 없다. 성당 안의 사람들은 갑작스레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뒤이어 아무렇지 않게 양 떼가 성당 안으로 들어온다. 이 장면은 인간이 믿어온 성스러움과 권위마저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며, 문명과 종교가 얼마나 쉽게 뒤바뀔 수 있는 신념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갇힌 이유는 다뤄지지 않는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그 비논리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일부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이나 종교적인 체계가 온전한 해답이 될 수 없음을 다시금 보여준다.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곳에서는 문명이나 종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이 가진 지식, 부, 사회적 지위는 생존 앞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종교 또한 위안이 될 수 있으나 희생양은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종교는 인간 구원이 아닌 정신적 감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