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리뷰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오지만, 대처하는 것도 극복하는 것도 쉽지 않은 병이 바로 우울증이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을 겪었기에 조금이나마 이 시기를 조금이나마 견뎌내기 위해 무엇이 뭘까 하고 생각해보곤 한다. 누군가의 조언은 상처가 되고, 일어날 힘이 없음에도 뭐라도 하라는 말에 절망을 느끼곤 했다. 이미 내 안의 어둠에 잠식되어 혼자 삼키고 있던 그 마음에 해답을 주진 않더라도 그 상태 머물러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영화를 하나 발견했다. 바로, 2011년 개봉작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다. 이 영화는 우울증을 겪는 당사자보다는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츠레는 우울증에 걸리며 멈춘다. 규칙적인 삶에서 이탈한 그의 상태는 '퇴행'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병 자체에 의한 것보다 사회가 붙인 이름에 가깝다. 사회의 정상성 기준에서 벗어난 순간 성인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된 사람의 '멈춤'은 곧 수치심의 감정으로 돌아온다. 이불속으로 몸을 숨기는 모습은 회피가 아니라 방어의 태도에 가깝다. 우울이 온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통제가 가능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는 이 멈춤을 무능이나 게으르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거북이나 이구의 비유는 그 상태를 설명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외부의 온기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면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이구'는 고립의 상징이 아닌 위안의 존재다.
‘마음의 감기’에 걸린 츠레를 앞에 두고 하루코는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이전과 같은 속도를 츠레에게 강요하기보다 남편이 멈춰 선 자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과거에 자신이 절망에 빠졌던 것을 츠레가 구해준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가족과 반려동물 이구가 함께하는 집 안의 시간은 느리고 불완전하지만 그 속도만이 허락되는 회복의 방식처럼 그려진다. 이 영화는 우울증을 극복하는 과정보다는 그 곁의 사람들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츠레가 우울증에 걸리며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규칙적인 삶이다.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 저하가 아니라, 성인으로서 요구되는 기능을 마비시키는 상태에 가깝다. 당사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다가도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굴며 그런 자신을 자책한다. 그 변화는 예측할 수 없고 설명도 쉽지 않다. 그 변화는 예측할 수 없었기에 이 영화는 그 혼란을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함께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처음, 하루의 태도는 이해라기보다 개입에 가까웠다. 우울증의 원인을 회사로 규정하고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선택은 냉정해 보인다. 하지만 츠레를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요구보다 더 이상 그를 파괴하는 환경에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판단에 가깝다. 하루는 남편을 바꾸기보다 그를 둘러싼 조건을 바꾸려 한다. 그러나 보호자의 이해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감정을 받아내는 일은 곧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으로 이어지고, 그 불안은 보호자를 점점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경제적 책임보다 먼저 감당하게 되는 것은 끝없이 쏟아지는 우울의 무게다. 말이 없거나 지나치게 날 선 상태를 견디며 불안을 홀로 감내하는 동안, 보호자는 누구에게도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고 도움을 요청할 자격조차 없다고 느끼게 된다. 다 자란 성인을 다시 돌보는 감각은 육아와 닮아 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가혹하다. 츠레가 목을 매는 장면은 이 한계를 가장 잔인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당사자의 절망이자,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호자에게 남는 상처다.
조금만 삐끗해도 모든 것이 무너지는 사회에서 “쉬어도 괜찮다”는 말은 쉽게 무책임해진다. 우울증에 걸린 이들이 ‘게으르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설정한 정상성과 생산성의 기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 기준은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한다. 정해진 시간에 역할을 수행하고,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 그 규칙에서 이탈하는 순간 개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된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 ‘민폐’라는 개념은 우울증을 더욱 고립시키는 언어로 작동한다. 회복을 위해 멈춘 시간은 배려가 아니라 이기심으로 오해받는다. 츠레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과 하루가 만화가라는 설정은 이 오해를 더욱 쉽게 만든다. 개인의 속도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울은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결함처럼 취급된다. 이 영화는 그 질서 바깥으로 한 발짝 물러난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게으름’이라는 태도가 생존을 위한 재정비로 보인다.
공시 실패 이후 약 1~2년간 깊은 우울 속에서 고립된 시간을 보냈던 나에게 이 영화를 그때 봤다면 오히려 비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하루와 같은 존재가 없었고,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고 싶어졌다. 화면 속 관계가 위로가 되기보다는 내가 갖지 못했던 조건을 또렷하게 상기시키는 장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의 우울은 그렇게 매끄럽게 봉합되지 않고 이해는 쉽지 않으며 사랑은 늘 충분하지 않다. 현실과의 거리감 때문에 더 허구적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지독하게 마음을 갉아먹는 상태를 비교적 잘 표현한다.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무너지고, 완벽하지 않고 엉망인 자신의 모습에 또다시 실망하며 자책하는 과정은 우울증의 반복성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하지만 이 전개는 동시에 지극히 일본적이다. 현실과의 거리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나 성격을 보여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문제는 현실이 그보다 훨씬 절망적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부재한 관계도 많고,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우울증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충분히 전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울증의 한가운데에 있는 당사자에게 직접적인 위로가 되기보다는 그 시간을 이미 건너왔거나 곁에서 지켜보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더 의미 있게 와닿는다. 우울증이라는 지옥을 건너는 이들을 위한 지침서라기보다, 그 곁에 남아 있는 가족과 보호자를 위한 이야기다. 지나치게 희망적인 결말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망을 함께 안길 위험이 있지만, 현실의 우울이 이 영화보다 훨씬 잔혹하고 회복이 더디며 이해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이 영화가 선택한 태도 또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는다. “힘내라”는 말 대신 “지금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 원인을 묻지 않고 책임을 돌리지 않은 채 곁에 머무는 것. 감정마저 효율과 합리로 설명하려 드는 세계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탓하지 않는 모습은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보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영화는 조용히 보여준다. 그래서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는 마음 감기에 걸린 이들의 가족을 위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