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를 녹인 결정체, 그 무지하고 찬란한 마법의 뒷면

영화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리뷰

by 민드레


자크 리베트 감독의 1974년작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의 총집합체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기존 영화의 화법을 거부하고 ‘꿈의 논리’로 영화를 구성한다. "영화는 정해진 대본이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들이 놀듯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에 어울리게 관객을 이 거대한 마법진 속으로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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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도서관 사서 줄리는 공원 벤치에서 마술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나이트클럽의 마술사 셀린느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다가 여러 가지 물건을 떨어뜨린다. 줄리는 그것들을 되돌려 주려고 쫓아가지만 셀린느는 줄리가 자신을 추격한다고 생각해 계속 달아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줄리와 셀린느는 친한 친구 사이가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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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추격, 마법 같은 일상의 시작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마주했을 때, 나는 제목 그대로 두 자매가 햇살 아래 보트를 타러 가는 소박하고 평화로운 로드무비 같은 이야기를 상상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누가 정하지도 않았는데 서로를 쫓고 기묘한 저택에 발을 들이는 행동들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논리로 따지려 들수록 미궁에 빠지게 되지만 이를 ‘놀이’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연스러워진다. 이 영화는 관객이 결말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상상하며 서사를 완성해 가는 ‘공동 창작자’가 되길 권유한다. 우리 인생도 가르쳐준 대로 흘러가지 않고 갑작스러운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듯, 영화도 그러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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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 환상의 매개체


이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치인 사탕은 종이 위의 글자를 입체적이고 환상적으로 만들어주는 결정체다. 사탕은 저택 안의 이야기를 경험 혹은 체험하게 만들어준다. 저택 안의 이야기가 소설인지 평행세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사탕의 파편을 입안에 굴릴 때 정지되었던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환상의 매개체가 사탕(고체)에서 술이나 음료(액체)로 변화한다. 이는 단단했던 사탕이 현실의 음료 속에 녹아든 것처럼, 주인공들의 일상에 환상이 완전히 침투했음을 암시한다. 이제 그들에게 환상은 가끔 꺼내 먹는 기호품이 아니라, 숨 쉬듯 들이켜야 하는 생존의 음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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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에서 창조자로


그들이 상상하던 전형적인 옛날 드라마의 한 페이지를 떼어온 듯, 이 이야기는 인형극처럼 뒤죽박죽 이어진다. 셀린느와 줄리는 이 이야기를 체험하며 저택에서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을 가지고 나온다. 혼자일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토막들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사탕을 나눠먹고 기억을 공유하면서 하나의 개연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저택 안의 사람들은 유령처럼 정해진 비극을 반복하는 수동적 주체들이다. 하지만 제삼자인 방관자였던 두 주인공은 이 흐름을 깨고 능동적 행동을 통해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야기를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개입하여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겠다는 '의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서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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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입이 만든 새로운 서사


사탕을 먹고 주인공들이 ‘멈칫’하는 순간은 마치 현실의 내가 그 세계에 ‘로그인’ 하는 찰나처럼 느껴진다. 이 깜빡이는 순간은 연극 무대처럼 그려지며, 관객에게 기대감과 설렘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평범한 일상과 미묘한 세계의 공간을 아무런 예고 없이 등장시키고, 중간중간 이야기를 생략하여 혼란을 가중시키는 방식은 마치 최면술사가 관객을 홀리는 것 같다. 논리적 분석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며 "이 재미있는 놀이에 그냥 같이 놀자!"라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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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와 마법의 대가


그러나 이 찬란한 마법의 뒷면에는 서늘한 위태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줄리에게 현실은 이미 도서관 업무나 약혼자 같은 권태로운 의무로 가득 찬 공간일 뿐이다. 그녀가 저택의 비극을 ‘장난’으로 대하며 낄낄거리는 이유는 그것을 ‘어차피 가짜인 흥미로운 이야기’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상의 달콤함에 중독될수록 자극의 임계점은 높아진다. "상상은 한때이고 현실감의 무게는 계속해서 짊어져야 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행보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강력한 마법을 맛본 대가로 웬만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 그들에게 마법이 끝난 뒤 찾아올 ‘현실 타격’은 환상을 경험하기 전보다 훨씬 무겁고 잔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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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받아야 할 지점


가장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지점은 이들의 ‘놀이’가 가진 잔인한 속성이다. 아이들의 놀이가 때로 잔인해지는 이유는 대상이 가진 실제 감정이나 역사적 맥락을 배제하고 오직 자극과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환상 속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이들은 현실의 예의나 타인에 대한 존중마저 유희거리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다. 동양인을 향한 눈을 찢는 제스처나 ‘가미카제’를 농담의 소재로 삼는 장면은 당시 서구 예술가들이 가졌던 천박한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에게 동양은 그저 기괴한 소품에 불과했으며, 타자의 비극적인 역사조차 자신들의 유희를 위한 장식품으로 소비되었다. 이는 그들의 상상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인지를 폭로하는 오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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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 현실로 뛰쳐나오다


그렇다면 상상보다 현실이 더 진실되게 여겨진다면 그건 가짜일까? 줄리는 현실의 안전 대신 환상의 가치를 선택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 속에서 죽어가느니 차라리 환상의 보트 위에서 길을 잃기를 택한 것이다. 비록 그 대가로 윤리적 감각이 마모되고 현실 타격의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을지라도. 상상은 찬란하지만 짧고, 현실은 지루하지만 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실제로 보트를 타게 된 그들이 마주할 것은 평화로운 여행이 아니라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모호한 세계다.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구원은 환상을 현실로 끌어당겼지만, 그들의 선택은 환상이 현실로 마구 뛰쳐나오는 대가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