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라는 말 대신 오늘 날씨가 좋네요 라고 해보자

영화 <안녕하세요> 리뷰

by 민드레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죠?". 우리가 습관처럼 건네는 이 말들은 과연 의미 없는 말일까?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59년작 <안녕하세요>는 이 질문을 시트콤처럼 꾸려 낸다. 겉면은 TV를 사달라며 침묵 파업을 선언한 아이들의 귀여운 소동극이지만 그 이면에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아이들이 거부했던 '쓸데없는 말'들이 사라진 세상은 더 진실해졌을까?



줄거리


똑같이 생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한 주택가. 아이들은 집에서 학교로 돌아오고 엄마들은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초등학생 미노루 형제는 오늘도 스모중계를 보기 위해 집에서 몰래 나와 이웃집을 드나들고 부모님은 그런 아이들을 못마땅해한다. TV를 사달라는 아이들의 투정에 아버지는 말이 많다며 공부나하라고 일축한다. 그러자 "어른들도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해요! '안녕하세요', '날씨가 좋네요' 같은 거요!"라고 반격하며 침묵의 파업을 시작하는데..



영화의 표면적 이야기는 'TV'를 사달라고 조르는 두 형제의 소동극이지만 곁가지로 드러나는 이야기들이 꽤나 흥미롭다. 집에서는 물론 학교와 동네에서도 입을 꼭 다물어버렸다. 말을 안 하기로 했을 뿐인데, 이 침묵은 엉뚱하게도 평온하던 마을을 뒤흔든다. 인사를 안 하고 지나치는 아이들을 보며 이웃들은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안 그래도 부녀회비 문제로 미묘한 신경전과 알 수 없는 소문이 오가던 차, 아이들의 침묵이 또 다른 오해를 낳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 한마디가 빠졌을 뿐인데, 그 빈틈에는 또 다른 의심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건의 시작은 동네 부녀회비의 행방에서부터였다. 개인적으로 소름 돋는 부분이었는데, 사실보다는 사견이 들어간 무책임한 유희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진실을 집어삼키는 과정이 적나라했다. 정말 눈도 깜빡하지 않고 거짓을 더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진실로 확정 짓는 모습이 섬뜩하기까지 하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점에서 영화는 '안녕하세요'라는 뻔한 인사가 뜻밖의 효과를 발휘한다. 비록 마음 없는 허울뿐인 껍데기라 할지라도 그 인사가 없다면 사람들은 본능 그대로의 민낯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 무의미해 보이는 인사말은 본능 그대로의 진심들이 여과 없이 쏟아져 충돌하는 것을 막아주는 우리 사회의 가장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윤활유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아이들이 열광하는 '텔레비전'은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한다. 반면, 정년퇴임 후 방문 판매원이 된 아버지의 동료는 속절없이 저물어가는 구세대의 비애를 대변한다. 한 시대를 먹여 살린 주역들은 은퇴라는 선을 넘자마자 문전박대당하는 '귀찮은 잡상인'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비정함은 집안의 어른을 대하는 이중적인 태도에서 정점을 찍는다. 방문 판매원을 단칼에 쫓아낼 때만 해도 "역시 할머니!"라며 치켜세우다가도 그녀가 회비 전달을 깜빡하는 실수를 하자마자 무섭게 돌변한다. "노망이 났나", "죽을 때가 다 됐나." 존경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늙음은 순식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쓸모가 있을 때는 '어른'이지만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가차 없이 '짐' 취급을 당하는 노년의 현실이 드러난다. 새것(TV)에 열광하는 세상에서 헌것(사람)은 그렇게 설 자리를 잃고 모욕당한다. 오즈 야스지로가 그려낸 1959년의 풍경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소름 돋게 닮아 있다.



영화는 1959년, TV와 세탁기라는 신문물이 밀려들며 급격히 변해가던 일본의 과도기를 날카롭게 포착해 낸다. 하지만 어딘가 개운치 않다. 마을을 뒤흔들었던 그 악의적인 소문들이 명쾌한 사과나 반성 없이 그저 시대의 소란스러움 틈에 슬그머니 봉합된다는 점이다. 상처를 준 어른들은 '없던 일'처럼 시치미를 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며 그 무책임함은 또 다른 말 아래 흐릿하게 묻혀버린다. 어영부영 넘어간 이 사건 뒤에 또 다른 소문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가 나누는 '안녕하세요'나 '날씨가 좋네요' 같은 말들의 가치가 재조명된다. 때로는 알맹이 없는 허례허식처럼 공허하고 허황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반전을 꾀한다. 그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말들이 타인과의 서먹한 거리를 좁혀주고, 때로는 가족 간에도 '하하 호호' 웃을 수 있게 만드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점점 서먹해지고 은연중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불완전한 세상일지라도 관계를 끊지 말고 이어가라고. 이 무의미한 소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한다. 기차역 플랫폼에 선 두 남녀가 "구름이 참 예쁘네요"라는 뻔한 말속에 설레는 사랑을 담아내듯, 우리는 오늘도 별다를 것 없는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