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상화> 리뷰
둥둥 떠다니는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진심 어린 사랑도 영원한 사랑도 없는 이 허상의 세상을 그린 1998년작 <해상화>가 다시 관객을 찾았다. 이 19세기 상하이의 유곽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답고 숨 막힐 정도로 잔인하며 공허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유곽밖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햇빛은 스며들지 않으며 오로지 호박색 등불과 자욱한 아편 연기가 그 어두운 공간을 채운다. 이 황금빛 감옥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가 빠져나가는 부유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기녀들은 웃음을 팔고 남자들은 돈으로 유흥을 산다. 돈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위선과 가식이 흘러넘치는 환상의 공간이다. 욕망이 뒤엉켜 고달픈 현실을 잊게 해 줘 더욱 달콤하고 중독적이다.
왕은 기녀 소홍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그녀의 유일한 구원자이자 연인이라 믿는다. 하지만 소흥에게 왕은 그저 빚을 갚아줄 물주이자 방패였다. 사랑이라 믿었던 만큼 배신감은 컸고 불문율의 비즈니스는 무너졌다. 비단 왕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이라 믿었던 마음은 그저 바람처럼 지나가는 유흥의 한때였다. 진심을 다하지 않는 마음에는 아무것도 남을 수 없다. 그 영혼은 허황된 신기루 속을 헤맬 뿐이다.
제목 '해상화(海上花)'는 상하이의 기녀를 뜻함과 동시에 '바다 위에 뜬 꽃'을 은유한다.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물결치는 대로 떠밀려 다니는 꽃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간택되어 인생 역전을 꿈꾸는 여자,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 이렇게 유곽이라는 거대한 바다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 또 다른 희생양을 기다린다. 여자는 그대로인데 남자만 바뀌는 그 비극은 무한한 반복이 기다릴 것 같은 서늘함마저 느끼게 한다. 잡을 수 없는 꽃을 잡으려 했던 그 환상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바다 위에 핀 꽃은 한 곳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속이 무척이나 갑갑해져 온다. 마치 체한 것처럼 음악이 반복되고 더 나아지지 않는 상황은 관객의 속을 서서히 뒤집어놓는다. 물론 이 공간은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사랑을 요구한다는 것이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부적절함보다 더 불편한 것은 사랑을 사고파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을 재고 이용하면서도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도리어 서운함을 표현하는 태도다. 허황된 환상을 팔면서도 그 환상이 진짜가 되기를 바라는 이 속물적인 욕망은 이 유곽이 거래의 공간을 넘어 스스로의 기만에 갇힌 공간임을 보여준다. 수많은 진심과 거짓이 뒤섞여 오가지만 그 어떤 마음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허공에서 흩어진다. 이 공간에서 사랑은 소비되지만 남는 것이 없으며 반복될수록 공허가 더 짙어진다. 이렇게 거짓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에 나도 모르게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영화는 시각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미장센을 보여준다. 옷자락의 자수, 반짝이는 식기, 일렁이는 불빛은 매혹적이다. 하지만 그 화려함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향기'도 맡을 수 없다. 가짜 꽃(조화)을 보고 향기가 있다고 착각하는 건 진짜 꽃의 향기를 알지 못해서다. 그리고 사랑의 향기란 코로 맡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진심을 속이고, 엉겨든 욕망을 풀어헤치지 않은 채 눈에 보이는 환상에 취한다. 사랑은 존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억되지도 않는다. 누구도 진심을 다하지 않는 마음은 찌그러져 없어지며 진심의 꽃은 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넘치지만 진심은 결핍되고, 사랑을 욕망하지만 유예된 세계의 비극이다. 그 장면이 끝난 후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유흥을 즐길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